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
||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Juan Carlos Valerón |
|
본명 |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산타나 Juan Carlos Valerón Santana |
|
출생 | 1975년 6월 17일 ([age(1975-06-17)]세) | |
스페인국 카나리아 제도 아르기네긴 | ||
국적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6cm | |
직업 |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은퇴) | |
등번호 | 21번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CD 아르히네힌 (1987~1990 / 유스) UD 라스팔마스 (1990~1994 / 유스) UD 라스팔마스 (1994~1997) RCD 마요르카 (1997~199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8~2000)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2000~2013) UD 라스팔마스 (2013~2016) |
국가대표 | 46경기 5골 ( 스페인 / 1998~2005) |
[clearfix]
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로 플레이 메 이 커들의 시대라 불렸던 당대에 스페인이 내놓았던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다.2. 클럽 경력
2.1. 데포르티보 이전
발레론은 2부와 3부 리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라스 팔마스에서 활약하며 빛나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를 마요르카가 영입하였고 그는 마요르카에서 리그 5위와 코파델레이 준우승에 공헌한다.이듬해 발레론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였고 이적한 다음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강등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팀은 결국 강등당한다.
2.2. 데포르티보 시절
라리가에 영구 결번이 존재했다면 데포르티보의 마지막 21번은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이었을 것이다.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데포르티보가 발레론을 영입한다. 첫 시즌 발레론은 데포르티보에서 자우밍야와 경쟁을 함과 동시에 좋은 활약을 보이며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사실 자우밍야(Djalma Feitosa Dias, 약칭 Djalminha)는 지나치듯 설명하기엔 이룬 것이 꽤 많은 알려지지 않은 라 리가를 대표할 브라질산 천재적인 공격형 미드필더중 하나다. 플라멩구 유스 출신으로, 97년 파우메라스 소속으로 뛰다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로 이적해오면서 라 리가 커리어를 시작하고, 하비에르 이루레타의 4-2-3-1포메이션에서 로이 마카이 밑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출장해 99-00 시즌 라 코루냐의 클럽 역사상 유일한 라리가 우승을 이끈 핵심 멤버이다. 97~98부터 5시즌을 뛰면서 정규시즌 126경기 36골, 팀 역사상 가장 높은 UEFA 챔피언스리그 2회(00-01,01-02)4강 진출을 이끌며 26경기 9골을 넣었다.
2000년 데포르티보에 들어온 발레론을 이루레타는 중앙에 기용했다. 이 자리는 작년까지 자우밍야의 자리였지만 원래 팀의 10번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프란의 노쇠화로 발레론을 영입하고 자우밍야를 왼쪽으로 이동시켰다. 자우밍야는 여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때문에 자신을 원래 자리인 중앙에 쓰지 않는 이루레타 감독과 크게 갈등을 빚었고, 결국 다음시즌인 01/02 시즌부터 발레론은 자우밍야를 밀어내고 주전 차리를 꿰찬다. 당시 자우밍야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놀라운 일이었다. 이루레타 감독은 플레이메이커로서 더 이타적인 성향을 띠는 점으로 발레론을 선택했다고 한다. 물론 인터뷰내용은 그렇고 실제로는 자우밍야가 워낙 알아주는 성깔때문에 이루레타와 마찰이 잦았다는게 발레론에게 자리를 내준 가장 큰 이유였다. 발레론이 아틀레티코의 강등으로 운좋게 굴러들어온 케이스이기도 하지만, 자우밍야는 피치 위에서 자신의 테크닉을 과신하는 유형의 선수였고 이때문에 클럽에서는 물론 브라질 국가대표에도 1997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이후에는 뽑히지 못했다. 2002년에도 기회가 있었지만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와의 갈등때문에 카카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한일 월드컵도 승선에 실패했다. 90년대말 지오반니 에우베르와 함께 화려한 클럽 커리어에 비해 국대 경험이 전무한 선수로는 대표적으로 꼽히는 선수다.
발레론은 이적 첫 해부터 자우밍야가 그립지 않을 만큼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리그 준우승 및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공헌한다. 특히 코파 델 레이 결승의 경우 매우 의미가 크다.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은 제3의 구장에서 개최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한 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치러졌기 때문. 매우 논란이 컸는데 마드리드 그리고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내세운 명목은 '코파 델 레이 100주년이니 국왕이 있는 마드리드에서 열려야한다.'였지만 사실 레알 마드리드의 100주년을 코파 우승과 함께 하려는 속셈이었다. 비센테 칼데론도 있는데 명백히 스포츠맨쉽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 역사적인 결승에서 발레론은 트리스탄의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한 것을 비롯 종횡무진 활약하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는데 하이버리에서 전 경기를 통틀어 무패행진을 달리던 아스날을 격파하는데 크게 일조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 후반에 교체 투입되어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3:2 역전승의 주역이기도 했다. 눈부신 활약은 당연히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고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02/03 시즌에 들어가기 전 수페르코파에서 만난 발렌시아를 상대로 1차전 선제 결승골을 기록하여 3:0 승리를 주도하고 2차전에서도 1:0 승리를 이끌며 수페르코파 우승을 이끌었다.
02/03 시즌 리그 3위 및 로이 마카이가 29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는데 큰 도움을 줬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선 스페인 클럽의 무덤이라는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2어시스트, 나머지 1골에도 관여하며 3:2 신승을 거두는데 크게 공헌했다. 스페인에선 두고두고 회자되는 발레론의 명경기 중 하나다.
03/04 시즌 역시나 리그 3위로 시즌을 끝마치게 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03/04 시즌부터 챔피언스 리그가 16강부터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러지게 되면서 발레론은 전보다 체력 안배에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발레론의 데포르티보는 16강에서 유벤투스를 격파, 8강에선 디펜딩 챔피언 AC 밀란을 상대로 그 유명한 리아소르의 기적을 일궈내며 역사상 최초로 4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발레론은 2번째 골을 터트리는 것은 물론 플레이메이커의 정석을 보여주며 4:0 승리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04/05 시즌에 접어들면서 전술의 핵심이던 마우로 실바의 부진 밎 스트라이커들의 부진 및 이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떠먹여줘도 받아먹질 못하니.. 루케와 함께 발레론은 리그 전 경기에 출전하며 고군분투했지만 체력적인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05/06 시즌 발레론은 루케와 판디아니가 이적하고 프란과 마우로 실바가 은퇴한 팀을 빅토르 산체스와 함께 이끌며 고군분투했다. 특히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 받았는데 기존의 문제점이던 득점력이 향상되면서 다시금 날아오르게 된다. 당연히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이름을 올릴 것 같았으나 2006년 1월 불의의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게 된다. 1년 만에 돌아왔지만 부상이 재발하며 2008년 1월까지, 2년 동안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만큼 발레론은 은퇴를 몇 번이나 고민했다고 한다.
2008년 1월, 07/08 시즌 21라운드 바야돌리드 전 마침내 발레론은 정상적으로 복귀한다. 재밌는 점은 발레론이 복귀한 날 데포르티보는 3달 만에 승리를 거뒀다.
부상과 오랜 공백으로 인해 그의 플레이는 예전만 못했지만 가끔씩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클래스는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미구엘 앙헬 로티나는 플레이메이커를 배제한 433 포메이션을 선호했는데 10/11 시즌 과르다도가 잔부상에 시달리자 발레론을 다시금 주전 기용하게 된다. 발레론은 기대에 부응했으나 떠먹여 줘도 못 먹는 스트라이커들로 인해 강등을 막진 못했다.
11/12 시즌, 호세 루이스 올트라가 새로이 부임하면서 발레론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30대 중후반에 접어든 발레론이었지만 세군다 리가를 씹어먹었고 그 시즌 최우수 공격형 미드필더상을 타게 된다. 그의 활약상에 힘입어 데포르티보는 세군다 리가 최다 연승 및 최다 승점을 기록하며 1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12/13 시즌, 발레론이 데포르티보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세군다 리가와 수준이 다른 만큼 시즌 초반기엔 플랜 B의 중심이자 조커로 기용되었다. 하지만 데포르티보는 모래알 같은 수비로 인해 일찌감치 20위로 쳐졌다. 2013년 1월 페르난도 바스케스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다시금 주전으로 기용되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선발로 투입된 레알 마드리드 전, 세련된 볼 터치와 매끄러운 패스로 팀의 공격을 주도했다. 호나우두는 교체 투입되기 전 발레론이 몇 살이냐고 코칭 스태프에게 묻고 37살이라는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자신이 갓 데뷔할 시절에 뛰던 선수가 아직도 멀쩡히 뛰고 있으니 놀랄만도 하다.
그러나 전반전에만 2명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는 악재가 터졌고 이로 인해 후반전 들어 체력적인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발레론을 교체하지 못한 것, 외질과 호날두의 투입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팀은 2대1로 패배한다.
다음 라운드, 셀타 비고와의 갈리시아 더비에서 발레론은 환상적인 패스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3:1 승리에 크게 일조했다. 말라가 전 이후 2달 만에 거둔 승리였다.
마지막 불꽃을 화끈하게 태웠지만 역시나 떠먹여 줘도 못 먹는 공격수들의 클래스로 데포르티보의 강등을 막는데 실패했다. 경기가 끝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데포르티보 팬들 사이에선 물론 스페인 축구 전문 방송에서도 화제가 되며 주위의 안타까움과 눈물을 자아냈다.
2.3. 라스 팔마스
데포르티보를 떠난 그가 이적한 팀은 고향 팀이자 자신의 데뷔 팀인 UD 라스팔마스였다.14/15 시즌 발레론은 UD 라스팔머스를 데리고 1부 리그 승격을 이루어 냈으며, 2015년 7월 17일 재계약을 맺었다.
프리메라 리가로 승격하면서 발레론은 출전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다 했다. 9월 캄프 누 원정에서 후반전 교체 투입될 당시 일부 바르셀로나 팬들도 기립 박수를 보내는 등 훈훈한 장면도 연출했다. 그리고 16년 4월, 2년 만에 리아소르로 돌아온 발레론은 키케 세티엔 감독의 배려로 후반전 교체 투입된다. 리아소르에 모인 모든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당시 장내 아나운서도 ''신사숙녀 여러분 교체 투입될 선수를 맞이합시다. 영원하라 발레론"을 외치며 특별히 소개했다.
2016년 5월 8일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라스 팔마스가 성적도 좋아 분위기도 좋았고, 본인 역시 인성이 좋았기 때문에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하게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발레론은 UEFA 유로 2000에 참전하지만 8강에서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에게 패해 탈락한다.발레론은 2002년 한일 월드컵 32강 본선 조별리그 1차전 슬로베니아를 상대로 골을 기록해 팀의 승리를 이끌고 뛰어난 활약을 통해 팀을 16강으로 이끈다.
팀은 16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아일랜드를 꺾고 8강에서 한국을 만나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호아킨 산체스와 함께 시종일관 공격를 주도하여 한국을 몰아부쳤지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해 8강 5위로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그는 UEFA 유로 2004에 참가하여 러시아와의 1차전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당시 스페인의 감독인 사에스는 발레론보다는 모리엔테스를 더 선호했고 이후 발레론은 2차전 그리스전과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 별 다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은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 0-1로 패하며 본선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되어 유로 10위로 8강 진출 실패하고 만다.
그는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을 당해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고 이후 주전자리를 차비 에르난데스에게 내어주게 되며 국가대표로 더 이상 소집되는 일은 없었다.
4. 플레이 스타일
다른 플레이메이커들처럼 섬세한 개인기와 볼 컨트롤, 재치있는 두뇌 플레이를 자랑했으며 특히 패스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단점이라면 득점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그의 플레이 성향과도 연관이 있다. 발레론은 상당히 이타적인 선수로 자신에게 득점 기회가 오더라도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에게 볼을 건내는 편이다. 본인이 직접 해결할 수도 있지만 최대한 안정적으로 동료들을 최대한 이용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동시대 선수들의 정점에 있는 슈퍼 에이스 지네딘 지단, 발렌시아의 에이스 파블로 아이마르, CA 보카 주니어스의 후안 로만 리켈메에 비해 임팩트가 덜 한 느낌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럼에도 발레론이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이유는 경기를 뒤집는 결정적인 골들이 그의 환상적인 패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 데포르티보는 프리메라 리가 득점왕을 01/02 시즌 02/03 시즌 2년 연속 배출했는데 발레론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디에고 트리스탄과 로이 마카이의 골 영상을 보면 거의 발레론 어시스트 스폐셜이나 다름 없을 정도였다.
지단에게 마르세유 룰렛이 있다면 발레론에겐 제자리 볼키핑이 있다. 말 그대로 제자리에서 아웃프런트와 인프런트로 섬세하게 볼을 컨트롤하면서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동시에 동료들이 움직일 시간을 벌어준다. 지단과는 또 다른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
제자리 볼키핑을 통해 상대를 교란시키는 동시에 상대 수비에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순식간에 스루패스를 넣어주는 플레이는 전매특허다.
또한 중거리슛 능력 또한 나쁘지 않았으며, 강력한 슈팅으로 골키퍼가 반응을 못하게 유도하는 것보다는,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골문의 구석을 노리는 플레이를 선호하였다.
흔히 지네딘 지단에 이어 후안 로만 리켈메를 마지막 클래식 플레이메이커라고 부르는데, 진짜 최후의 클래식 플레이메이커는 발레론이다. 이들에 비해 훨씬 오래 뛴 발레론은 15/16 시즌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5. 대회 기록
-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2000~2013)
- 코파 델 레이: 2000-2001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0, 2002
- 세군다 디비시온: 2011-2012
6. 발레론에 대한 말말말
단 한 번 대인마크를 했었는데, 그게 바로 발레론이었다.
젠나로 가투소
젠나로 가투소
내가 라스 팔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발레론이 마중을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위대한 선수이기 때문이다. 구단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성의였고 나는 이에 감동했다.
케빈프린스 보아텡
케빈프린스 보아텡
발레론은 너무나도 이타적이다. 나는 항상 발레론에게 너는 골만 넣으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여러번 그가 득점할 거라 생각하고 쇄도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공은 발레론의 발을 떠나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덜 겸손하고 이타적이었다면 더 위대한 선수로 남았을 것이다.
디에고 트리스탄
디에고 트리스탄
축구 팬이라면 누구든지 발레론의 플레이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소위 말하는 입장권을 사서 직접 보러갈 만한 가치를 지닌 클래스의 선수다. 나이가 많이 들었음에도 그의 클래스는 한결같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나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매주 발레론의 경기를 보러 갔다. 축구 선수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언제나 나의 롤 모델이었다. 어릴 적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내가 항상 존경할 선수다. 어릴 적 나는 발레론이 새겨진 축구 카드를 모았다. 축구 선수로서 그와 함께 필드 위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다비드 실바
다비드 실바
내가 지도한 선수들 중 가장 천재적이었던 선수를 꼽자면 발레론과 레예스다.
호아킨 카파로스[2]
호아킨 카파로스[2]
7. 기타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선수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 가장 뒤에 나온 발레론에게 모든 커피요금이 청구되어 당황해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동료들이 발레론의 주머니에 계산되지 않은 과자를 몰래 넣었다가 경고부저가 울리는 바람에 발레론이 곤란해 하고 동료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대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다.팀 동료들은 발레론이 선한 인간성을 가지고 순진한 면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발레론은 사생활 면에서 깨끗하며 아프리카 가나에 축구 스쿨을 만들고, 고액 기부를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고, 평소에도 소박한 인간성과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맨시티의 스페인 대표팀의 전설 다비드 실바가 우상으로 삼는 선수라고 밝혔다. 다비드 실바는 발레론이 달던 등 번호 21번을 임대 시절을 제외하고 팀을 옮기면서도 계속 달고 뛰고있다. 심지어 다비드 실바는 발레론과 고향도 아르기네긴(Arguineguín)으로 같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인치곤 꽤 특이하게도 개신교 신자다.[3]
[1]
단순히 립 서비스라곤 볼 수 없는 것이 과르디올라는 패스 앤 무브를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감독이다. 또한 발레론은 유소년 시절부터 성인 무대 데뷔까지 중소 클럽에서 보냈는데 과르디올라의 수준에서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은 타고난 천재라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2]
유망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감독. 웬 듣보냐고 할 수도 있겠는데 긴 설명 필요없이 다니 알베스, 세르히오 라모스, 필리페 루이스 세 선수를 발굴, 육성한 감독이다.
[3]
같은
스페인어를 쓴다는 특성 때문인지 남미 출신의
오순절 신자들이 많이 이주해서 근래에는
개신교 신자가 좀 늘고 있다고는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흔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