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에 나온 황표정사
이번 정사에서 의정부 당상들이 매일 빈청(賓廳) 에 나아가고, 이조·병조의 당상이 의논에 참여하여, 제수(除授)하는 대성(臺省)·정조(政曹)·연변 고을의 장수와 수령은 반드시 3인의 성명을 썼으나, 그 중에 쓸 만한 자 1인을 취하여 황표(黃標)를 붙여서 아뢰면
노산군(魯山君)이 다만 붓으로 낙점(落點)할 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황표정사(黃標政事)’ 라고 일컬었다.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기록1. 의미
황표정사(黃票政事)는 문종이 어린 단종을 위해 임시로 만든 인사제도로 세조때에 가서야 없어졌다. 원래 조선시대의 인사는 이조가 담당하여 처리를 하는것이 일반적이나, 문종이 죽음을 앞두고 어린 단종의 즉위가 염려되어 김종서에게 부탁하여 생겨나게 되었다.문종은 단종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인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이럴 경우 왕실의 여자 어른이 후견인을 맡아서 직무를 대행하는 형태로 보완해야 하지만, 하필이면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하였고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도 이미 사망해서 수렴청정을 맡을 어른이 없었다. 단종의 유모이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있긴 했지만, 조선에서는 후궁이 수렴청정을 행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김종서[1] 같은 관록이 있으면서도 왕실에 충성스러운 정치인들에게 부탁하여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이로 인해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이 우의정을 맡게 되고, 의정부 서사제 시스템에서 의정부의 역할이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오지만, 의정부에서 인물을 낙점하고 올리면 왕은 도장만 찍으면 되는 것이다.
2. 문제점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은 성리학적 관점으로나, 정치구조상으로나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신하는 임금을 보필하는 것이고, 임금이 내려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신하가 임금의 권력을 휘두른다면?[2] 특히나 인사는 권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원래 조선의 인사권은 이조가 담당하였다. 그런데 의정부 서사제 하에서의 의정부가 인사까지 맡는다면 권력의 편중 현상은 너무 심해진다.그나마 수양대군 일파의 주장과는 달리, 기록을 살펴볼 때 그 대표인 김종서가 무슨 역모를 꾸민다거나 권세를 부린 흔적은 없었다. 실제로 김종서는 북방에서만 10여 년 이상 임무를 수행한 충신이요, 다른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훌륭한 고명대신의 보필이 뒤따른다면 충분히 정치적 긴장을 극복하고 단종의 무대가 펼쳐질 수 있었다. 비슷한 예로 고명대신으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 이상의 권위를 지녔지만 일생을 황실에 충성을 바친 제갈량이 있다. 또 다른 비슷한 사례로 청나라 강희제가 있는데, 청나라 강희제는 즉위했을 때는 겨우 8세여서 단종처럼 다른 고명대신들이 보필했었다. 그러나 강희제의 고명대신들은 왕에 대한 보필을 철저히 수행했고, 주위는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후 성장한 강희제는 청나라를 반석 위에 세웠다.
문제는 이로써 실질적으로 왕의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의 능력 및 충성심, 인품과는 별개로 이 자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황표정사는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들의 양심에만 맡기기엔 너무나도 불안정한 체제였다.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횡행하는 김종서, 황보인을 위시한 황표정사에 대한 음해는 바로 이 부분을 이용해서 수양 측에서 억지논리를 펼친 주장이 먹힌 까닭이다.[3]
또한 이는 결과적으로 단종의 친위 세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도 초래했다. 의정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권력의 축은 자연히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 대신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유력한 종친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4]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또한 원칙상 단종을 보필해야 했던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일파도 원로 대신 일파 자체에 대해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는 분열 양상이 초래된 것.
3. 결과
결국 이러한 황표정사를 빌미로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김종서 일파의 권력남용으로부터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합리화되었다.주상(主上)께서 처음 즉위하여 내린 교서(敎書) 안에 오직 당상 이상 및 연변(沿邊) 수령·대성(臺省)·정조(政曹) 등의 벼슬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검찰(檢察)하여 제수하라 하였는데, 황보인·김종서 등이 주상을 어리다고 무시하고 문무관(文武官)의 제수를 대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잡고 권세를 오로지하여 황표(黃標)[5] 를 붙여서 주상으로 하여금 손을 놀릴 수 없게 하고, 탐욕을 자행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아, 주군(州郡)에서 뇌물로 올리는 것이 공물(貢物) 바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며,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하여 매관(賣官)하고 옥(獄)을 파는 것이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마음에 화심(禍心)을 간직하여 용(瑢)에게 아부하여 용의 복심으로 하여금 중외에 포열(布列)하여 권세 있는 요직을 나누어 차지하였다.[6]
[1]
이미
황희가 직접 정승감으로 키운 인물이다.
[2]
결국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물론 세도정치의 경우 엄밀히 말하자면 외척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지만 말이다.
[3]
상술되었다시피 선왕의 왕후들이 살아있어서 수렴청정을 했다면 설령 황표정사를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왕족(왕비)이 주도하는 모양새이므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겠지만 그런 인물들이 죄다 죽었으므로 이런 주장이 먹혔다고 할 수 있다.
[4]
물론 이들뿐만 아니라 왕족들 대부분이 이런 황표정사에 크게 분노했다. 애시당초 이들은 태종의 후손들이고 당연히 이방석을 끼고 돌았다고 생각한 정도전을 좋아할 수 없었는데 황보인과 김종서의 무리들이 정도전이 한 것보다 더 심한 짓을 하고 있었으니 좋아할 리 없었다. 특히 양녕대군같은 경우는 이들에게 심히 적대적이었다.
[5]
여기서의 황표가 황표정사이다
[6]
단종 8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0월 25일(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