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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2680> 행정원원장 · 사법원원장 · 감찰원원장 · 고시원원장 |
<colbgcolor=#0d2680><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 1계 제5임 입법원장
황궈수 黃國書 | Huang Kuo-sh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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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년 8월 8일 |
일본령 대만
신치쿠청 홋포지청 (現 대만 신주현 베이푸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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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7년 12월 8일(향년 82세)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
학력 |
지난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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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1계 제 3임 입법원 부원장 |
1950년 12월 5일 ~ 1961년 2월 25일 | |
제 1계 제 5임 입법원장 | |
1961년 2월 28일 ~ 1972년 2월 19일 | |
경력 |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참의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고참실 주임 타이완 철로관리위원회 위원 제헌 국민대회 대표 제 1대 입법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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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의 군인, 정치인. 대만 최초의 본성인 입법원장이다.2. 상세
초명은 예옌성(葉焱生)으로, 학생 시절 일본 경찰과의 충돌을 계기로 1920년에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상하이 지난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군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염황자손(炎黃子孫)'에서 따온 황(黃)을 성으로 삼아 개명하였다.[1] 중국국민당의 추천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수석 졸업한 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에서 포병 장교로 종군하여 중장까지 진급하였다.전후 대만이 중화민국으로 반환되자 대만으로 귀환하여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와 타이완 철로관리위원회[2]에서 활동하였고 제헌 국민대회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제1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완성 입법위원으로 출마하여 3위로 당선되었다. 1950년 입법원 제6회기 제16차 회의에서 입법원 부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61년 입법원장에 선출되어 최초의 본성인 입법원장이 되었다.
1972년 1월 10일에 그가 상무이사로 있던 보험사인 국광인수(國光人壽)가 1970년에 벌어진 비리 사건을 계기로 파산하는 일이 발생하자, 동년 2월 19일에 건강을 이유로 들어 입법원장을 사직했다. 사퇴 후에도 종신 입법위원으로 재직하다[3] 1987년에 사망하였고 고향인 신주현 베이푸향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1대 입법위원 선거 | 타이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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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891 | 당선(3위) | 초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