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에 대한 내용은 돛자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은박 재질의 돗자리 |
1. 개요
앉거나 누울 때 밑에 까는 얇은 물건. 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용도나 취향에 따라 원 모양 등 다른 모양을 한 경우도 있다.2. 종류
원래는 골풀이라는 식물로 엮어 만든 '자리'(깔개)를 의미하지만 현대에 골풀로 짠 돗자리는 보기 힘들다. 1980년대까지는 골풀로 만든 돗자리가 많이 보였지만 점차 사용이 편리하고 가벼운 스티로폼 은박 재질로 대체되어 1990년대 중반에는 골풀이 자취를 감추었다.소풍 등에 사용하는 돗자리는 매트로도 불리며 땅바닥의 흙과 같은 더러운 것이 옷이나 짐에 묻지 않기 위해 사용하며 보통 합성 섬유 등으로 만든 튼튼하고 가벼우며 방수성이 있는 것을 사용한다. 휴대가 편리하도록 얇은 경우가 많지만 보온을 위해 스티로폼 재질로 두껍게 나온 돗자리도 있다. 가게에서 싸게 파는 돗자리들 가운데서 스티로폼 은박지 돗자리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여름에 너무 번쩍거리고 빨리 뜨거워지는 단점이 있다.
대나무 돗자리는 보통 여름을 시원하기 지내기 위해서 혹은 제사(차례)를 지낼 때 바닥에 절을 하기 전에 깔아두는 용도로 사용한다. 본래는 돗자리를 자리,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를 돗자리로 불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돗자리가 자리를 대체하게 되며 의미 변형이 일어났다. '이부자리, '잠자리'가 이 '자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2.1. 화문석
화문석(花紋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특산품으로, 풀로 엮은 돗자리에 염색을 한 왕골로
화문석에 수놓는 문양은 주로 "희 ( 囍)"자나 용, 봉황, 호랑이, 원앙, 학 등의 영수(靈獸)의 모습, 그리고 매화, 모란, 국화 등의 아름다운 꽃의 모습 등이 있고,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러한 수놓인 문양에 따라 화문석을 분류하여 불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용이 새겨진 화문석은 용문석(龍紋席), 노란색 꽃을 새긴 건 황화석(黄花席)이라 불렀다.
고려 시대 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란이나 송나라, 원나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을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이하응 초상 | 복원된 철종어진 |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조선시대에는 명~청대의
조공 및 무역 물품이었고,
조선통신사 등을 통해서 아시카가 쇼군가나 도쿠가와 쇼군가, 몇몇 다이묘 가문들에게 선물로도 주어졌다.[1] 유기물로 만든 돗자리 특성상 현대에 유물이 전해지는 것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옛 공신 초상화와
부산 용두산 대화재 사건 후 그나마 건진 어진들을 통해 그 화려함을 옅볼수 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3. 효과
- 방냉: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한다.
- 방습: 여름에 습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일본에 다다미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 위생: 땅에 있는 각종 먼지, 균, 기생충을 차단해줄 수 있다. 옷에 흙물이 드는 것도 막아줄 수 있다.
- 자리 표시: 불꽃놀이 축제같은 거라도 하는 날에는 비교적 중요해진다. 해수욕장에서도 마찬가지.
4. 용도
5. 언어별 명칭
영어 | Mat 또는 Rug | 아랍어 | حصير ,حصيرة |
일본어 |
むしろ(筵, 蓆), ござ(茣蓙, 蓙)[2] うすべり(薄べり·薄縁)[3] |
페르시아어 | حصیر ,بوریا |
중국어 | 席子(Xízi), 凉席(Liángxí), (稿)荐((gǎo)jiàn), 箦(Zé) | 스와힐리어 | Jamvi, Kitanga(예배용), Kirago, Shupatu |
베트남어 | Chiếu | 우즈베크어 | Bo‘yra, Bordon |
태국어 | เสื่อ, เสื่อสาด | 튀르키예어 | Hasır halı |
몽골어 | гудас | 러시아어 | цино́вка |
힌디어 | चटाई | 루마니아어 | Rogojină |
네팔어 | सुकुल | 라틴어 | Psiathium, Storea, Teges, Matta, Phormio |
캄보디아어 | កន្ទេល | 이탈리아어 | Tappetino |
인도네시아어 | Késétan, Tikar | 에스파냐어 | Estera |
6. 여담
은박 돗자리는 햇볕이 세게 내리쬐면 금방 뜨거워지니 특히 여름철의 사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예전에는 풀을 짜서 돗자리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금도 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골, 부들, 갈대 등으로 만든 것 같다. 다다미의 재료 중 하나가 골풀로 만든 돗자리이다. 은박 처리가 되어 있는 돗자리는 여름철 주차시 햇볕 차단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삼국지의 유비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로 모친을 모시면서 짚신과 돗자리를 짜서 파는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유비를 깔 때 쓰는 별명 중 하나가 돗자리 장수. 인터넷에선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님' 이라는 별명도 있다. 심지어 유비 생전에도 적대세력에게서 '돗자리나 짜던 촌놈'이라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연의에서는 숙적인 조조가 유비에게 빡칠 때 '돗자리 짜던 귀큰 놈'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후한 말기에는 아직 북방민족의 영향을 덜 받아서 모두가 좌식생활을 했기 때문에 돗자리는 생필품이었고 이거만 팔아먹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뿐이고 난세와 전란의 시대였기 때문에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아가는 정도였을 것이다. 일단 사서에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도 일을 하지 않으면 생업이 불가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똑같이 좌식생활이 보편화된 이후의 한국의 기록을 봐도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조선의 화가 김홍도의 자리짜기 그림에서는 너무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고 있지 못한 상황을 묘사해 놓았을 정도인데 조선시대에는 몰락 양반들이 그나마 밥벌이로 하던 일이 돗자리를 만들어서 장사하는 일이었다. 농사일이나 상인 일은 꺼렸지만[4]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 돗자리 만드는 일을 했다고. 김득신의 유명한 그림인 파적도에 나온 양반도 돗자리를 만들다가 병아리를 물어가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 튀어나온 상황을 그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오리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은 유배 중 소일거리로 돗자리 짜기를 했다고 한다. 해당 문서로.
조선 후기에 방문한 이양선의 선장이 문정하러 간 사또에게 의자를 권했지만, 사또가 갑판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선장도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던 일화도 있다.
고려의 초대 국왕인 왕건은 과거 나라를 세우기 전( 궁예의 부하 시절)에 오씨 부인을 만났고 만나자마자 서로 사랑에 빠져 원나잇 스탠드를 가진 적이 있었다. 왕건은 오씨와 성관계를 하던 도중 오씨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오씨를 임신시키지 않고 서로 쾌락만을 즐기기 위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했지만, 오씨는 왕건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서 왕건이 현자타임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사이 돗자리에 흘린 왕건의 정액을 몰래 쓸어담아 자신의 질 안에 넣었고 그렇게 임신을 해서 왕무(고려 2대 국왕)를 출산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피가 이어지지 않는 정종(고려 3대) 이후 또는 조선의 사관이 혜종을 의도적으로 낮추기 위해 또는 왕건의 다른 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었던 오씨를 업신여기기 위한 기록으로 당연히 신빙성이 낮다.
점쟁이들이 돗자리를 깔고 점을 보는 것에서 착안하여 뭔가를 예언하는 것을 돗자리 깐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터넷상에서 돗자리를 깔아준다고 할 땐 어떤 드립을 치거나 특정 상황을 만들기 위해 베이스를 깔아주는 행위 혹은 컨셉충이나 특정 사람, 드립이 나타날 걸 예측하고 미리 선수를 치는 행위를 이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국밥충이 등판할 만한 게시글에 미리 "국밥충 나와주세요" 라고 댓글을 단다던가, 이시국 드립이 나올법한 게시글에 "이시국씨 등판해 주세요" "이시국씨는 출입 금지입니다" 라는 댓글을 다는 식이다.
현실에선 소풍 갈 때 돗자리 까는게 대표적이지만[5] 유명 스팟 등에서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대기타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장기간 시위나 팬싸인회 등에서 자리잡기 위해서라던지.
대나무 돗자리의 경우 드물게
강화도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화문석 왕골돗자리는 보기보다 가격이 꽤 나가는 편이다. 특히 화문석 장인이 왕골을 엮어 만드는 100% 수공예품이며 장인이 직접이 만들기 때문에 디자인이 같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제품이 없으며 제품 각각의 고유의 느낌을 가지고 있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화문석이라고 자부하기도 한다. 명품 못지않는 가격에 한정품 느낌이 강해 사치스럽다고 할 수 있다. 돗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이다.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에는 `문장리`라는 지역이 있다. `문장리`는 해보면사무소가 있는 면소재지이다. 이 문장리라는 지명에서 '문장'은 왕골 돗자리 장이 서는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농촌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로 인하여 왕골을 재배하여 돗자리를 만드는 집이 많이 줄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수백 년의 왕골자리 제작 전통을 이어왔다. 주민들은 왕골을 대단위로 재배하여 그 줄기를 말린 후 겨우내 거의 모든 집마다 있던 돗자리 짜는 틀로 돗자리를 만들었다. 돗자리 짜는 틀을 보지 못한 분들은 천을 짜는 베틀을 옆으로 길게 늘이고 길이를 줄인 후 세운 모양으로 어떻게 보면 옛날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는 틀과 비슷한데 날실이 더 촘촘하다고 보면 된다. 돗자리는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짜므로 일반적으로 부부가 함께 작업을 했다. 베틀의 '바디'와 같으나 돗자리의 폭이 크므로 더 무겁고 튼튼한 나무 부품을 남편이 위로 들면서 날실을 교차해 벌려주면 부인이 베틀의 '북' 대신 긴 꼬챙이에 말린 왕골 줄기 하나를 끼워 씨실처럼 옆에서 밀어 넣는다. 그러면 남편이 바디를 내려 왕골 줄기를 누른다. 그리고 남편은 다시 '바디'를 위로 들어올려 날실을 벌려준다.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하여 돗자리를 짜며 미리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해 놓은 왕골 줄기를 적절히 삽입하여 예쁜 문양도 넣었다. 해보면 문장리와 월야면 월야리의 주민들은 수 백년 동안 겨울이면 이 돗자리 짜서 장에 내다 팔아왔고 조정에 진상도 해왔으며 결국 돗자리 장이 서는 곳으로 유명해져서 결국 '문장'은 정식 지명이 되었다.
[1]
그 예로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40회에서 화문석이 언급된다.
[2]
여담이지만 발음이
goza다...
[3]
むしろ는 풀로 엮은 깔개의 총칭이고, ござ는 테두리를 댄 돗자리를, うすべり는 휘갑친 돗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4]
양반 체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릴 때부터 방법을 배우고 인맥을 확보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뛰어들면 망하기 딱 좋은 업종이라 더 그렇다.
[5]
그리고 어째 서양의 소풍(그러니까 피크닉) 하면 왜인지 천 돗자리, 그것도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체크무늬 돗자리 위에 과일이나 나무바구니 등이 늘어진 풍경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 편한건 요새 나오는 은박재질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