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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7:49:29

호나우지뉴/클럽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호나우지뉴

1. 개요2. 파리 생제르맹 FC3. FC 바르셀로나
3.1. 2003-04 시즌: 바르셀로나의 에이스3.2. 2004-05 시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다3.3. 2005-06 시즌: 최전성기3.4. 2006-07 시즌: 몰락의 시작3.5. 2007-08 시즌: 몰락
4. AC 밀란5. 고향에서6. 다시 바르셀로나

1. 개요

18세의 나이로 그레미우에서 데뷔하였다.

2. 파리 생제르맹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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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리그 1의 명문 클럽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는데, 개인기가 뛰어난 브라질 선수들 사이에서도 한결 화려한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마다 보여 주면서[1]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도 참가하여 호나우두, 히바우두 투톱의 밑을 보좌하면서 당시 브라질 공격진은 3명의 앞 글자가 모두 R인 것에 착안해 3R로 불리게 된다. 특히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호나우지뉴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수비진을 농락하며 동점골 어시스트, 역전 프리킥 골, 게다가 퇴장까지 당하는 원맨쇼를 펼치며 브라질의 우승에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이 퇴장으로 가린샤 클럽의 다섯 번째 회원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4강에는 출전하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월드컵 이후 인지도와 몸값이 확 높아졌지만, 정작 소속 팀 PSG에서는 루이스 페르난데스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출전 기회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3]

2003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영입 의사를 밝혀 이적에 상당한 진척이 있었지만 맨유 보드진의 실책으로 무산되고 만다.[4] 결국 02-03 시즌 최악의 부진으로 회장과 감독이 교체된 FC 바르셀로나가 그를 영입하게 된다.

호나우지뉴가 스페인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주니뉴 파울리스타 미들즈브러 FC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 외에 많은 브라질 선수들이 잉글랜드에서 환경과 문화적인 차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떠난 것에 비해 바르셀로나는 이미 호마리우, 호나우두, 히바우두 등의 브라질 스타 선배들이 터를 잘 잡아 놓았기 때문에 안전한 선택을 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3. 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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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르사가 호나우지뉴를 영입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호나우지뉴의 이적료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바르사가 여유 자금을 모두 써야 하는 2,500만 유로였다. 성과에 따른 옵션에 포함된 금액이나 호나우지뉴에게 조항에 충족된 성과를 올리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기에 바르사는 흔쾌히 300만 유로를 추가로 냈다. 호나우지뉴는 맨유가 제시한 거액을 마다했고, 바르사는 팀의 명운을 걸고 빚을 냈다. 그리고 양측의 도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호나우지뉴는 그 돈보다 많은 것을 바르사에 헌신하며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고, 바르사는 호나우지뉴 영입을 기점으로 암흑기를 벗어나 약 10여 시즌 간 구단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3.1. 2003-04 시즌: 바르셀로나의 에이스

FC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시즌인 2003-04 시즌 초반에는 이전 해의 부진으로 인해 팀 자체가 틀이 안 잡혀서 본인의 활약도 그저 그랬지만, 후반기에 4-3-3 포메이션을 가동하면서 3톱의 왼쪽 윙어에 배치, 프리롤로 기용되면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플레이메이킹, 드리블, 개인기, 볼배급, 득점, 패스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측면 플레이메이커로서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역할 모두를 프리롤로서 수행 하였다. 후반기 엄청난 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5] 본격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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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지뉴의 바르셀로나 데뷔골
2003-04 시즌: 45경기 22골 11도움
라리가: 32경기 15골 6도움
UEFA컵: 7경기 4골 3도움
코파 델 레이: 6경기 3골 2도움

3.2. 2004-05 시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다

2004-05 시즌 본인의 활약도 정점에 오르고, 여름 이적시장 때 영입한 사무엘 에투, 데쿠같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힘입어 팀은 9899 시즌 이후 6시즌 만에 라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당시 주제 무리뉴 감독의 지휘 하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첼시와 16강에서 맞닥뜨렸는데, 2차전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수비진과 페트르 체흐 골키퍼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대단한 골을 넣기도 했다. 골을 허용한 페트르 체흐는 어이 없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는 2004년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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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바르사는 챔스 16강에서 맞닥뜨린 첼시에게 합산 스코어 5-4로 패배하였으나, 호나우지뉴는 이 시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4-05 시즌: 42경기 13골 14도움
라리가: 35경기 9골 12도움
UEFA 챔피언스리그: 7경기 4골 2도움

3.3. 2005-06 시즌: 최전성기

2005-06 시즌 엘 클라시코, 호나우지뉴 vs 레알 마드리드

2005-06 시즌에 호나우지뉴와 아이들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었다. 2005년 11월 19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는 2골을 기록하는 등 독보적인 활약으로 팀을 3-0 완승으로 이끌면서 상대 팀 레알 마드리드의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계속해서 2006년 4월 1일 안방 캄프 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도 득점했으나,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러나 팀은 라리가 2연패를 확정한다.

한편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공교롭게 또 다시 무리뉴의 첼시 FC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FC 바르셀로나가 총합 스코어 3-2로 첼시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면서 8강 진출하였다.[6] 8강에서 SL 벤피카, 4강에서 AC 밀란, 결승에서 아스날 FC를 차례로 꺾고 FC 바르셀로나가 1991-92시즌 이후 14시즌만에 유럽 정상에 등극하는 데 주축이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영웅이 세계 축구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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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최강팀 중 하나인 AC 밀란(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팀이자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다) 원정에서 젠나로 가투소 안드레아 피를로를 농락하는 호나우지뉴.

2005-06 시즌: 45경기 26골 20도움
라리가: 29경기 17골 15도움
UEFA 챔피언스리그: 12경기 7골 4도움
코파 델 레이: 2경기 1골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경기 1골 1도움

이 세 시즌 동안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실로 경이로웠다.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 보여주면서도 자기 중심적 플레이가 아닌 팀에 보탬이 되는 플레이를 하여[7] 세계인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클래식 더비에서, 하프 라인부터 치고 나가 레알 수비수들을 농락한 골을 두 번이나 넣은 것.[8] 오죽하면 레알 홈 관중들조차 허탈한 표정으로 기립박수를 쳐줄 정도였다. 이 기립박수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에게 보내는 "고작 선수 하나도 못 막는 이게 레알이냐?"라고 조소가 담긴 박수와 다른 하나는 상대 선수의 플레이에 경탄을 담아 보내는 박수였다.

당시 인간 같지 않은 실력과 독특한 외모[9] 덕분에 붙은 별명이 바로 외계인.[10] 절정의 기량에 달한 호나우지뉴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과 기대감은 대단해서 고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였다.

특히 이런 기대가 정점에 달한 시기가 2006 독일 월드컵이었는데 당시 에이스 호나우지뉴에, 살이 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포텐셜만큼은 인정받는 스트라이커 호나우두, 브라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스피드와 슈팅 파워를 모두 갖춘 타겟형 공격수 아드리아누에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카카까지 브라질 공격진의 네임밸류는 정말 엄청나서 소위 ' 판타스틱4', '천상의 4중주'라고 불렸을 정도이다. 루시우, 제 호베르투 등의 수비진들도 상당히 대단한 편인 것은 마찬가지라서 전문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특히 브라질 국민들은 자국의 우승을 거의 반쯤 확신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네임밸류만 꽉꽉 채워넣고 공수 밸런스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조합적 한계 때문에 본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늙은 수탉이라고 비아냥받던 지네딘 지단 필두의 프랑스한테 8강에서 덜미를 잡히고 탈락한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호나우지뉴의 고향에 세워진 동상을 불태우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전성기 때 외계인 모드였던 딩요도 사람인지라 꼭 막히는 수비수가 한 두명씩 있었다. 대표적으로 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전/로테이션 센터백이였던 이반 엘게라, AC 밀란 야프 스탐, 첼시 FC 칼리드 불라루즈[11]가 있었다. 이 중 야프 스탐은 2005-06 UEFA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딩요를 말 그대로 꽁꽁 묶어버리며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맹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밀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한다.[12]

이 시즌은 향후 10여 시즌간 이어지는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전성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시즌이기에 굉장히 큰 의의가 있는 시즌이다.

3.4. 2006-07 시즌: 몰락의 시작

그러나 '호나우지뉴와 아이들'의 전성시대는 2년만에 끝났다. 2005-06 시즌 막판 챔스 4강부터 시작해서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정적으로 변모하고 화려한 드리블보다는 킬패스만 노리는 모습을 보여주어[13][14][15] FC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워낙 외계인인지라 일시적인 컨디션 저하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2006-07 시즌에 이르러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골잡이 사무엘 에투의 장기부상으로 인하여 팀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호나우지뉴는 팀에서 요구하는 다이나믹함을 점점 잃어가며[16][17] 챔피언스리그는 16강에서 탈락. 라리가에서도 막판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당하면서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18]

2006-07 시즌: 49경기 24골 13도움
라리가: 32경기 21골 8도움
UEFA 챔피언스리그: 8경기 2골 2도움
코파 델 레이: 4경기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경기 2도움
UEFA 슈퍼컵: 1경기
FIFA 클럽 월드컵: 2경기 1골 1도움

3.5. 2007-08 시즌: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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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덴 아자르에게 자주 이렇게 얘기하곤 해. 호나우지뉴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어. 아마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만, 그 선수는 매일 연습을 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결국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되지. 네가 호나우지뉴 또는 메시라고 할 지라도 연습을 게을리한다면, 2년 후에는 넌 잊혀지고 다른 이 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야.
- 사무엘 에투[19]

07/0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막장의 길로 들어선다. 호나우지뉴는 팀 전체 훈련에 1년 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면서 나이트 클럽 죽돌이가 되어간다. 늘어나는 뱃살에 움직임은 둔해지고, 게다가 자율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던 감독인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이러한 호나우지뉴에 대해 통제를 가하지 못하였고 팀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팀 또한 사무엘 에투의 부상재발과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이제 갓 20살인 리오넬 메시가 팀을 떠받들다시피 하게 된다.[20] 호나우지뉴의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브라질 동료 에드미우송이 그의 방탕한 사생활을 폭로한 검은 양 사건도 이때 터졌다. 결정적으로 2007년 12월 23일에 당초 훈련 불성실로 인해 제외되었던 그가 안데르송 데쿠와 함께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복귀한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0-1로 진 게 독이 되어 라 리가에서는 3위로 밀려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그래도 4강까지 오르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 사실상 후반기에는 그는 팀의 전력에서 완전 제외된 상황이었고 저 성과도 거의 메시 혼자 이뤄낸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2008년 5월에 레이카르트가 경질되었던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1-4 참패를 당한 바르사는 내리 2년을 레알 마드리드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바르사를 지지하는 스포츠 신문 <문도 데포르티보>는 헤드라인으로 "창피하다!"라고 내걸었고, <스포르트> 역시 "당신들은 바르사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라는 문구를 어떠한 사진 없이 검은 배경에 배치한 1면에 내보내며 극도의 실망을 표했다. 그리고 시즌 이후 실력과 인기 모두를 잃어버린 그를 FC 바르셀로나가 더이상 안고 갈 이유도 의사도 없었던지라 결국 이적시장에 나오게 된다.

바르셀로나 전 부회장이 밝힌 내막에 따르면 호나우지뉴를 내보낸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가 메시에게 악영향을 줄까봐여서 였다고 한다. 예전만 해도 바르사는 메시를 그냥 재능쩌는 유망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챔스전 등에서 그가 보통 재능의 소유자가 아님을 알아본 이후부터 식단, 행동습관, 심지어 잠자는 시간까지 몽땅 다 계획을 세워주고 따르게 할 정도로 투자를 그에게 집중하여 말 그대로 축구기계 육성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팀에서 그렇게 공들여 기르던 메시는, 태업을 일삼으며 클럽과 마찰을 빚던 호나우지뉴를 매우 따르고 있었고 호나우지뉴와 그 당시 지적받던 선수들도 막내였던 메시를 무척 아껴서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니며 거의 가족처럼 대해줬다.

또 호나우지뉴가 몰락한 데에는 개인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바르사 입단 초기에 그는 여동생인 데이지, 어머니 미겔리나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살며 축구에 집중했었다. 문제는 여동생인 데이지가 지역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 선수 에두아르두 코스타와 교제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후 데이지는 코스타가 PSG로 이적하자 그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면서 이에 외로움을 호소하던 어머니까지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갔다. 이미 호나우지뉴 본인은 바르셀로나 생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지만 홀로 남은 집에서 호나우지뉴는 끝없는 외로움을 느꼈고, 성공의 향취와 더불어 자기 관리에 소홀해져 음주가무에 빠진 채 데쿠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에서의 밤문화를 즐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르사는 호나우지뉴의 방탕한 사생활이 그 자신의 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좋지 않게 봤지만 클럽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메시가 그에게 물들까봐 더 걱정했다고 한다.[21][22] 특히 어릴 때부터 아르헨티나인 특유의 육류 식단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던 메시가 밤문화까지 배우고 자제력을 잃기 시작하면 어쩌나하는 염려가 컸다고 한다. 팀 내부에선 호나우지뉴를 내보내지 않으면 선수단 분위기는 물론 결국엔 메시까지도 지금의 자제력을 잃고 망가질 것이란 목소리가 커져갔고 메시가 기대대로 07/08 시즌 혼자서 팀을 떠맡는 역할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낼 정도로 성장하자 결국 바르사는 그들의 미래를 하락세의 에이스 호나우지뉴가 아닌 어린 메시에게 걸기로 결정하여 그를 올바른 에이스로 길러내기 위해 호나우지뉴와 기타 선수들을 내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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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시즌 리오넬 메시의 데뷔골을 어시스트하는 호나우지뉴. 후일 새로운 에이스의 태동을 함께하는 현 에이스라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참고로, 이 때 어시스트를 해준 호나우지뉴의 등에 업혀서 손을 흔드는 리오넬 메시는 일명 어부바 세리머니로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이 당시 호나우지뉴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고, 당시 어린 막내였던 리오넬 메시를 아껴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저 데뷔골도 경기가 끝나갈 즈음에 리오넬 메시가 사무엘 에투와 교체되어 들어오자 호나우지뉴가 "어이쿠, 내 동생한테 데뷔골 챙겨줘야지?" 하는 식으로 팍팍 밀어준 덕이 컸다. 저 데뷔골이 들어가기 2분 전에도 호나우지뉴의 로빙 어시스트 - 리오넬 메시의 로빙 슛 골의 똑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그 골은 오프사이드로 노 골 판정을 받았었다.

2007-08 시즌: 26경기 9골 3도움
라리가: 17경기 8골 1도움
UEFA 챔피언스리그: 8경기 1골 2도움
코파 델 레이: 1경기

4.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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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가 추락한 호나우지뉴였기에 이적이 될까 싶었지만 AC 밀란에서 그의 영입을 추진하여 성사. 베를루스코니는 그를 여전히 캄피오네라면서 영입했다. 사실 AC밀란이 호나우지뉴를 원했던 것은 2년 전부터였는데,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로 정점에서 한풀 꺾인 상태의 지뉴에게도 베를루스코니가 계속 러브콜을 보냈던 것이 유명했다. 당시에 여름-겨울 이적시장에서는 호나우지뉴 밀란행 임박과 언제나 그 사실을 반박하는 지뉴의 에이전트 호베르투[23]밀란 행은 사실무근이라는 기사가 2년동안 지겹도록 반복됐었다.

하지만 결국 08/09 시즌에서야 영입이 성공했다. 이후 호나우지뉴는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나이트는 바르셀로나 시절에 비해 덜 갔다고 한다.

2009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 CF AC 밀란의 에이스였던 카카를 영입해갔고 호나우지뉴는 카카의 공백을 메꿔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예전의 다이나믹함은 사라졌지만 살이 약간 빠지고, 볼키핑과 특유의 패스가 살아나주면서 밀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며, 전성기에 보여주던 특유의 화려한 드리블 돌파도 간혹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 유벤투스전에서 2골을 넣더니 일주일 뒤인 시에나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후로도 그때 그 시절 보단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있지만, 국가대표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상황. 브라질 국가대표 前 감독 둥가는 "모든 선수들에게 기회는 열려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호나우지뉴는 나의 계획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산 시로에서 치러진 2009/10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는 발로 나와서 맨유의 수비수 하파엘, 조니 에반스, 리오 퍼디난드를 혼자서 제치고 1골[24] 1어시를 올리는 그야말로 외계인의 복귀라 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팀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밀리며 맨유에게 3골을 내주며 패배했다. 스피드를 제외한 경기력이 엄청나게 돌아온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2차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기도 했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선 밀란 전체가 관광을 당하며 4-0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AC 밀란의 1, 2차전은, 특히나 그 중에서도 2차전은 안드레아 피를로 박지성에게 문자 그대로 '지워졌던' 그 경기가 맞다.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국대에도 끝내 뽑히지 않았는데 카카와 포지션이 겹쳐서도 있지만 후보조차로도 못뽑히는 이유는 둥가 감독이 더 이상 브라질 특유의 화려한 개인기위주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의도[25]에 있다. 유벤투스와 함께 부진한 지에구도 그 이유가 더 커서 뽑히지 못하였다.

2010년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고 브라질 대통령이 브라질 국대에는 호나우지뉴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의욕을 상실할 것을 우려한 일부 팬들이 있었으나, 이후 벌어진 키에보 베로나전에서 지쳐쓰러질 때까지 뛰는 모습을 보여주어 팬들을 훈훈하게 했다.

그리고 10-11 시즌 개막전, 그야말로 날아다니면서 팀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체중도 전성기시절하고 1kg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고 세리에 A 어시왕을 찍었던 09-10시즌보다 드리블이 민첩해지고 활동량도 늘어났다. 허나, 다시 폼이 떨어지며 벤치만 달구다가, 안토니오 카사노의 영입이 확정되면서 친정팀인 브라질 리그 그레미우로 돌아가는 것에 합의했다가 막판 플라멩구의 개입으로 인해 플라멩구로 이적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한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이 30살의 축구 선수 인생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나 페이크였다.

5. 고향에서

이렇게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사실상 월드 클래스 선수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허나 아직 31살로 몇년정도 더 뛸만한 나이대이고, 금세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리그에서 자주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고 네이마르의 산투스를 상대로 3골 1어시라는 미친 활약을 펼쳤다. 역시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 경기는 산토스가 플라멩구를 3:0으로 일방적으로 압도하다다 호나우지뉴가 역전시킨 경기라서 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종합 스코어는 산투스 FC CR 플라멩구에 5:4로 승리했다.

고향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멩구에서 서서히 몸을 데우며 활약했지만 임금 체불이 이어지자 법정 공방 끝에 계약을 해지했다.

2012년 6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이적했다. 그리고 계속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런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 다시 한 번 발탁되었다. 또 시즌 도중 월드 사커 선정 2000~2009 최고의 선수 트로피까지 받는 영예도 누렸고, 특히 이 시기 호나우지뉴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은퇴할 생각까지 했으나 팬들의 지극정성과 쾌유가 겹치며 은퇴를 그만두게 되었다.

2013년 2월 7일, 잉글랜드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PK를 실축하면서 역적이 되어버렸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변명은 있다. 스콜라리 감독도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면 다시 감을 잡을 것이라는 평가를 했다. 그 이후 남미의 챔피언스 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했다. 본인 또한 대회 MVP로 선정. 대회 우승 직후 호나우지뉴는 "모두가 나에게 이미 끝난 선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난 아직 더 뛸 수 있다는 걸 이번 우승으로 증명했다."라며 그간의 설움을 단박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2014년 1월 1일엔 '2013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해 클라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그리고 2014년 1월 8일 터키의 베식타쉬와 계약하며 유럽으로 복귀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뜨며 유럽 대항전에서 다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팬들의 기대가 증폭 중이었지만 갑자기 미네이루 잔류 기사가 뜨며 물거품이 되었다. 미네이루 회장의 잔류 확정 SNS와 더불어 브라질에 남는 것이 확정. 유럽에서 보고싶던 이들에겐 아쉽게 되었으나 본인은 브라질 월드컵을 위해 안정적인 브라질 리그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2014년 자국 월드컵에 뽑히지 못했다. 미네이랑의 비극이 일어나자 브라질 관중들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게 야유를 보내는 한편, 호나우지뉴의 공백을 실감한 듯 그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돌이켜보면 이름값에 비해서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크게 돋보이지는 않다. 유일하게 활약했던 2002 한일 월드컵은 호나우두의 8골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고 2006 독일 월드컵은 프랑스에게 털리며 주가 폭락과 더불어 폼 추락. 2010 남아공 월드컵과 자국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은 뽑히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지만, 짧은 전성기와 더불어 시대를 초월해서 역대급의 반열에 들 수도 있었던 그의 평가를 깎아먹는 요인인 것도 맞다. 반대로 그의 선배 호나우두는 클럽팀에서의 짧아도 너무 짧은 활약이 국대에서 보여준 역대급 선수로서의 모습을 퇴색시키는 면이 있다.

뜬금없이 팀을 무단 이탈하여 자유계약 신분으로 풀렸다. 과거 바르셀로나 동료였던 데쿠의 친선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팀에 말도 없이 떠났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안됐다고. 그래서 미네이루는 깔끔하게 자유계약으로 풀어줬고 호나우지뉴는 다른 리그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26]

2014년 9월 6일 리가 MX 소속의 케레타로 FC로 이적하였다.

2015년 7월 11일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하며 브라질로 복귀하였다.

2015년 9월 29일자로 플루미넨시와 계약을 해지했다.

6. 다시 바르셀로나

2016-17 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끝난 직후 FC 바르셀로나가 미국 진출을 노리며 9월 6일 런칭하는 뉴욕 애비뉴 지사의 공식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8년 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클럽으로의 복귀이며 구단 측에선 과거의 전 세계구급의 인기와 호나우지뉴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바탕으로 구단을 대표할 공식 앰버서더 적임자라고 발표하였다. 불과 며칠 전 레알 마드리드 CF의 앰버서더로 호나우두가 임명된 것을 견제한 것으로도 보인다. 관련기사

2017년 4월에 열린 레전드 엘 클라시코 친선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전성기 종종 보여주었던 노룩 로빙 패스로 한 번, 왼발 로빙 패스로 한 번, 역습 상황에서 쓰루 패스로 한 번, 총 3도움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를 3:2로 관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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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30일 캄 노우에서 열린 자선경기[27]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레전드 매치에서 다시 한 번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에드가 다비즈 등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들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었다. 결과는 비록 1:3으로 패배했지만 경기를 뛰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즐겁게 뛰었으며 팬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외계인 퍼포먼스를 선사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레전드 선수로 출전한 박지성의 파울로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넘어지기도 했는데 웃으며 악수하는 장면 역시 축구 올드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1] 이 시절에도 개인기는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여기서 최상급으로 개인기수준을 끌어준 선수가 파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제이제이 오코차이다. [2] 왼쪽에서 올려준 크로스를 왼발로 받아서 오른쪽으로 띄운 후,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오른발 시저스 킥으로 마무리해 골까지 넣은 것은 실로 경이로울 정도로 예술적이다. [3] 다만 이는 호나우지뉴의 잘못이 크다. 축구 외적으로 그는 여자를 데려오는 것에만 집중하거나 나이트에 출몰하는 날이 잦았다. 호나우지뉴가 빅클럽 이적 의사를 밝히는 등 문제를 일으키자 감독이 출전 횟수를 점차 줄여 나간 것. 호나우지뉴는 파리에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식단 조절과 전술 훈련을 지도받았고, 구단에게서는 그를 위해 여러 가지 케어를 해 주었다. 루이 페르난데스도 그를 특별히 신경 써 주면서 호나우지뉴는 특혜를 톡톡히 받았다. [4] 맨유 보드진이 원래 합의한 금액에서 더 깎으려다가 빡친 PSG가 맨유와의 협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또 마케팅을 생각해서 못생긴 외모 때문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를 놓치고 대신 영입한 선수가 바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5] 다만 상승세의 원인이 호나우지뉴 한 명의 활약 때문만이 아니라 시즌 중 임대해 온 에드가 다비즈 또한 크랙 못지 않은 활약을 해주었던 것도 크다. [6] 이때 역시 상기 언급한 전 시즌의 '궁둥이 씰룩씰룩 골'에 버금가는 오른발 감아차기 슈팅으로 원더골을 터뜨렸는데 당시 센터백으로서 완전무결이었고 세트피스시의 득점력까지 갖추고 있던 존 테리피지컬로 압도하고 넣은 골이 바로 그것이다. # 흔히 존 테리의 두 번째 흑역사로 불리기도 한다. [7]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를 시도하는 일반적인 선수들은 화려함과 실속을 둘 다 챙기기는 정말 어렵지만, 호나우지뉴는 화려하고 예측하기 힘든 개인기를 뽐내면서 템포가 상당히 빨랐고 연계에도 착실히 신경을 썼기에 화려함과 실속 양면을 모두 챙겼다. '실속' 면에서 기복이 심하다는 평도 있는데, 호나우지뉴의 연계는 동료들이 예측하기 쉬운 안전한 연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기복이 심하다고 평가하는 것인데, 거꾸로 동료들의 수준이 호나우지뉴의 수준을 못 따라간다고 할 수도 있다. [8] 지금은 세계적인 수비수지만 당시엔 포텐 충만한 유망주였던 세르히오 라모스를 두 번이나 관광보내고 득점을 했다. [9] 호나우지뉴는 고가의 명품 브랜드 의류를 자주 입었는데 기자가 이에 대해 묻자, "내가 생긴게 이런데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10] 당시의 야구계에도 외계인이 있었다. 바로 페드로 마르티네스. [11] 함부르크 SV에서 첼시로 이적하여 먹튀가 된 네덜란드의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다. 거친 태클과 타이트한 맨마킹으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카드도 꽤 수집했다. [12] 결정적으로 캄프 누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밀란에게 주도권이 밀리고 셰브첸코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일명 푸욜의 장풍 사건으로 골이 무효화되고, 탈락하고 만다. [13]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호나우지뉴의 화려한 플레이에 대해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아예 호나우지뉴를 따로 불러놓고 '예측 가능한 행위'를 하라는 주문을 했을 정도. 다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한 게, 거의 완성된 팀인 클럽과 달리 국대에서는 대부분이 단판, 토너먼트인데다가 당시 브라질은 공격자원을 살려보겠다고 호베르투 등의 일부에게 극단적으로 수비와 중앙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호나우지뉴의 예측 불가 플레이가 상당히 부담감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고 국대 동료들도 매일같이 보는 클럽 동료가 아니라서 팀 플레이 면에서는 어쩔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14] 주전 여부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뛰고싶었던 호나우지뉴는 스타일을 강제적으로 바꿔야만 했다.(이 때부터 우울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표팀 자체에서 호나우지뉴에 관한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다. 모 TV 프로에서 당시 경기 영상을 분석했는데, 호나우지뉴가 비어있든말든 일부러 주지 않는 모습들이 자주 잡혔다. 카카나 호나우두의 경우 쳐다봐놓고 안 줘버리는 행위도 자주 했을 정도였다. 호나우지뉴가 코치진과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잘해주기 힘든 측면이 있긴 하지만, 축구계에서 좋은 주장은 이런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카카나 호나우두는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위대한 리더형 인물은 아니었다. [15] 독일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경기를 보면 일반적으로 호나우지뉴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정적이며 화려한 모습도 매우 적다. [16] 호나우지뉴 개인적인 부분에서는 이미 06 월드컵에서 축구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떠오르는 메시에 대한 푸쉬 여부를 놓고 바르사 이사진들의 알력다툼이 일어난 시점도 이 때. 호나우지뉴는 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리고 앞서 06 월드컵 시절부터 겪기 시작한 조울증을 확진받았다고 한다. 프로 의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울증을 확진받을 정도면 육체적 부상과 같은 수준으로 일종의 병이라고 봐야 된다. [17] 그러나 우습게도 06/07 시즌의 호나우지뉴는 리그에서 21골을 넣으며 역대 커리어 유일의 리그 20골대 득점 기록을 세운다. [18] 사실 승점은 똑같았고 골득실은 바르셀로나가 앞섰으나, 라리가는 골득실보다 승자승 우선이다. 그해 엘 클라시코 결과는 1무 1패로 열세였기 때문에 레알이 우승했다. [19] 15/16 시즌과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의 아자르를 보면 소름끼치게 들어맞는다. [20] 또한 이 당시 언론에서는 호나우지뉴와 에투의 불화설이 떠돌았다. [21] 특히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함께한 감독이라 불리는 이 당시 코치 과르디올라가 메시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갖고있던 사람 중 하나였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호나우지뉴의 나태함을 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와 어울리는 것에 대해 메시에게 여러차례 경고를 했다고 한다. 과르디올라는 선수들의 피치 밖 사생활에 대해 엄격하기로 소문난 감독이라서 더 그랬다는 이야기가 많다. [22] 그러나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호나우지뉴가 이적 요청을 했을 때 과르디올라는 팀에 잔류할 것을 권했지만 지뉴가 마음을 굳힌 상태라 결국 설득에 실패했다고 한다. 당시 바르셀로나 보드진들은 검은양 사건 등 사생활로 말썽을 일으켜 시즌을 망친 호나우지뉴 등의 선수단 때문에 사생활까지 통제할 감독을 물색하다 펩을 선택했을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즉 사생활 통제와 메시의 미래를 위해 호나우지뉴를 짤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본인들은 신임감독인 펩보다는 당시 보드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3] 풀네임은 호베르투 데 아시스로 호나우지뉴의 친형이자, 부상으로 은퇴해 동생의 에이전트를 한다는 그 형이다. [24] 호나우지뉴 입단 1년 뒤 임대 온 데이비드 베컴의 어시스트 [25] 그런데 둥가의 이러한 선택은 일견 만용으로도 보이나 06년 독일 월드컵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남아공 월드컵에서 그다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현역 주장 시절처럼 어느 정도 독선적이었고 과도하게 자기 생각을 밀어붙인 경향이 있다. 현역 국대 시절에는 동갑내기 베베투가 잘 뒷받침했지만, 감독으로서는 무리수였다.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이후 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목표로 브라질은 둥가식과 기존 브라질식의 축구를 절충하는 과정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26] 이 부분이 말이 많은게 미네이루가 대인배처럼 풀어줘서 그렇지 결코 프로 선수가 보일 행동은 못된다. 아직 자세한 전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생활이 문란하긴 했어도 아드리아누처럼 무단 이탈하지는 않았는다. [27] 본 경기의 모든 수익은 바르셀로나 지역 어린이 병원에 기부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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