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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0:42

헨리 부르시에

성명 헨리 부르시에
Henry Bourchier
생몰년도 1404년 ~ 1483년 4월 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리틀 이스턴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빌리
아버지 윌리엄 부르시에
어머니 글로스터의 앤
형제 토머스, 윌리엄, 존, 엘레노어
아내 케임브리지의 이사벨라
자녀 윌리엄, 헨리, 험프리, 존, 토머스, 에드워드
직위 외 백작, 부르시에 남작, 부르시에 자작, 에식스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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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장미 전쟁에서 요크 왕조의 편에 섰다.

2. 생애

1404년경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리틀 이스턴에서 초대 외 백작 윌리엄 부르시에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딸인 글로스터의 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윌리엄[1], 존[2], 토머스[3], 엘레노어[4]이 있었다.

142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외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426년 레스터에서 기사 작위를 받고 케임브리지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케임브리지의 이사벨라는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와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인 앤 모티머의 외동딸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증손녀였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모티머 가문의 영지 관리권을 획득했다.

1427년부터 베드퍼드 공작 존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군사 작전을 수행했으며, 1430년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했고, 1436년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 포위한 칼레를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을 때 참여했다. 1439년 프랑스와의 휴전 협상을 벌인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1441년 처남이자 노르망디 총독 요크의 리처드를 돕기 위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리처드로부터 뉴샤텔의 대장이자 피카르디의 총독에 선임되었다.

1432년 사촌이자 제4대 부르시에 여남작 엘리자베스 부르시에가 사망한 후 제5대 부르시에 남작에 선임되었고, 에식스에 있는 부르시에 가문의 영지를 획득했다. 1446년 그동안의 군 복무를 인정받아 부르시에 자작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1449년 프랑스군의 노르망디 대공세로 인해 외를 비롯한 프랑스 내 영지를 전부 상실했다. 1450년 또는 1452년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50년대에 잉글랜드에서 두 파벌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고, 이는 점차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한 파벌은 헨리의 처남인 요크의 리처드가 이끌었고, 다른 파벌은 부르시에의 의붓형제인 험프리 스태퍼드가 이끌었다. 그는 자연히 둘 중 한 쪽을 지지하길 꺼렸고 갈등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1454년 요크의 리처드가 첫번째 호국경을 맡고 있을 때 왕실 의회에 출석해 잉글랜드 총리에 선임된 형제 토머스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1455년 1월 헨리 6세가 정신병에서 회복한 뒤 리처드를 호국경에서 해임한 후 직무에서 물러났다.

1455년 5월 22일 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의 리처드는 헨리 6세와 에드먼드 보퍼트를 따르던 왕실군을 기습해 에드먼드를 살해하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그가 이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리처드는 헨리를 재무장관에 선임했다. 그러나 1456년 10월, 헨리 6세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압력을 받고 헨리를 재무장관에서 해임했다. 그는 이후 요크 파벌과 랭커스터 파벌간의 대립에서 중립을 고수했지만, 1459년 랭커스터파로 구성된 의회가 요크파에 가담한 그의 두 아들을 반역자로 선언하자 공개적으로 요크의 리처드의 편에 섰다.

1460년 7월 노샘프턴 전투에 참여해 요크파의 승리에 일조했고, 다시 재무장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이 시기까지 헨리 6세의 폐위를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1460년 12월 요크의 리처드가 랭커스타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뜻밖의 참패를 당하고 전사하자 입장을 바꾸고 1461년 3월 3일 요크의 리처드의 아들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추대했다. 1461년 3월 29일 타우턴 전투에 참여해 요크군의 결정적인 승리에 기여한 뒤 에드워드 4세로부터 추밀원 회원이자 에식스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파인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로부터 몰수한 영지 일부를 받았다.

1470년 랭커스터 왕조가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과 동맹을 맺고 에드워드 4세를 밀어낸 뒤 헨리 6세를 복위했다. 헨리는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재무장관 직에서 해임되었고 한동안 런던 탑에 감금되기도 했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4세와 조지 플랜태저넷 사이의 비밀 협상에서 중개자 역할을 맡았으며, 에드워드 4세가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즉시 가담해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 네빌을 꺾고 요크파의 승리를 확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포콘버그의 사생아'로 일컬어진 토머스 네빌[5]이 랭커스터 반란군을 이끌고 런던을 기습 공격할 때 끝까지 항전해 런던을 지켜냈다.

그 후 헨리는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재무장관에 복직했고, 랭커스터 공국의 총독을 맡아 랭커스터 파벌의 준동을 억제했다. 또한 1473년에 잉글랜드 국새 수호자를 맡아 상당한 급료를 받았으며, 자신의 영지 내에서 양모를 유럽 대륙으로 수출하고 지중해에서 사치품을 수입하는 등 수익성 있는 무역을 수행했다. 그의 영지는 그에게 1년간 1,400파운드의 수입을 가져왔다. 여기에 에드워드 4세로부터 노섬벌랜드의 워크와 트란델 남작 영지도 넘겨받았다. 현대 학자들은 에드워드 4세가 1471년 복위 후 1483년까지 별다른 반란을 겪지 않고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헨리가 랭커스터 파벌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왕을 충실하게 보좌해줬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1483년 4월 4일, 헨리는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기 5일 전에 사망했다. 사후 에식스의 빌리 수도원에 안장되었지만, 나중에 리틀 이스턴 교회로 이장되었다.

3. 가족


[1] 1415 ~ 1470, 제9대 피츠와런 남작 [2] 1416 ~ 1474, 초대 버너스 남작 [3] 1418 ~ 1486, 워체스터 주교, 일리 주교,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 총리, 잉글랜드 추기경 [4] 1417 ~ 1474, 제3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부인 [5] 초대 켄트 백작 윌리엄 네빌 사생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