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얼음공주. 절대 먼저 마음 열어 보이는 일 없고, 마음 주는 법도 없다. 자존심과 오만함을 철갑처럼 두르고 힘들수록, 괴로울수록 고개는 더 빳빳이, 그 누구에게도 굽히고 들어갈 수 없다. 국극단 단원들은 영서를 ‘성골 중의 성골’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의과 대학 학장에 어머니는 유명 소프라노, 언니 영인 또한 지금 핫하게 떠오르는 소프라노인 부와 명예, 교양을 갖춘 집안이다. 영서 또한 어렸을 때부터 성악을 배웠지만 일찌감치 깨달았다. 성악으로는 언니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언니의 그늘 밑에 평생 있다가는 엄마의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끝난다는 것을.
영서는 성악을 포기하고 명창의 밑으로 들어가 판소리를 배웠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스승에게서도 인정받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즈음 국극을 접하고 국극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엄마는 쌍수를 들고 반대했지만 영서는 기어이 국극단에 들어가버린다. 하지만 여전히 영서는 엄마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엄마의 인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고, 엄마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가 아쉽기만 하다. 성악 신동이었던 언니가 이름난 소프라노로 커가면서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이 마냥 부럽고 질투가 난다. 언젠가 내가 국극에서 남역을 맡으면 엄마도 언니를 볼 때처럼 날 그런 따뜻한 눈으로 자랑스러워하면서 봐줄까. 오로지 그날을 향해서 영서는 매분 매초를 치열하게 살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엄마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 영서는 늘 뭔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다. 노래, 춤, 연기 테크닉은 뭐하나 빠지는 것 없이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었지만 영서는 자신의 약점을 언젠가부터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역할에 푹 빠져서 몰입하지 못한다는 것. 무대에 올랐을 때 즐길 수가 없다는 것.
그런 영서의 콤플렉스를 사정없이 자극하는 상대가 바로 정년이다. 기가 막힌 소리 실력도 그랬지만 연기! 정년의 연기를 보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마치 맡은 배역과 한 몸이 되어버린 거 같았던 정년의 연기. 자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런 몰입과 집중을, 국극을 이제 막 시작한 정년은 해내고 있었다.
영서는 있는 힘껏 정년을 무시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정년의 무서운 재능에 불안해진다. 그리고 미워진다. 내 노력의 무게는 정말 정년이의 타고난 재능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일까? 하지만 영서는 아직 자신의 잠재력을 반의반도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