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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6:58

허병률(1885)

파일:허병률(경산 독립운동가).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허희(許羲)
이명 허화(許和)
자 / 호 문가(文可) / 일우(一友)
본관 하양 허씨[1]
출생 1885년 2월 2일[2]
경상도 하양현 읍내면 대곡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곡리)[3][4]
사망 1943년 1월 29일[5] (향년 57세)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대곡동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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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허병률(許秉律)은 1885년 2월 2일 경상도 하양현 읍내면 대곡동(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곡리)에서 아버지 허참(許傪, 1856 ~ 1928. 4. 28)과 어머니 청주 한씨(? ~ 1905. 9. 9) 한석도(韓錫道)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이웃 마을인 하양면 부호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1917년 박상진의 조선국권회복단과 채기중의 풍기광복단이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였다. 그는 광복회원으로서 처음엔 군자금 수합에 나섰다가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차례차례 체포되자 은거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1919년 음력 9월경 양한위와 권태일(權泰鎰)로부터 독립신문, 경고문 등의 문서를 교부받아 자산가와 관공서의 관리들에게 보내며 민족의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일전에 진행하던 군자금 모집 활동에 다시 힘써 1920년에는 오기수 등과 함께 모금한 8천여원을 소지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후 그는 그해 7월 박용선·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 등의 동지와 함께 권총과 탄약을 휴대하고 경성부 서린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의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즉시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 수합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이 총기를 구한 방법이 매우 흥미롭다. 동지 중 조한명의 친구에게 얻은 것인데, 이 친구는 나카지마란 이름의 일본인이었다. 조선인과는 달리 일본인은 총기를 구입, 소지할 수 있어서 나카지마의 이름으로 총기를 구한 것. 단순히 명의만 빌린게 아니라, 나카지마 본인이 직접 총기와 탄약을 구해서 전달해 주었다.

1921년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사기·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해 8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와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앞서 언급한 나카지마도 함께 검거되어서 재판에 넘겨졌으나, 허병률을 비롯한 광복회 동지들은 나카지마와의 연관성을 극구 부인하였고 이게 받아들여져서 나카지마는 100원의 벌금형만 받고 풀려났다. 나카지마의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925년 1월 23일 만기출옥하였으며, 출옥 당시 일제가 논밭을 주겠다며 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9년 언론을 통한 지하운동의 사명을 띠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대구지국 총무로 근무하며 그해 10월 때마침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영남지방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문을 17촌 지간의 족질(族姪)이자 동지 허동상을 시켜 살포하려다가 허동상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

이후 1937년 대한광복회 옛 동지인 우재룡 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학생 및 민중 봉기를 계획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으며, 1938년 고향인 경산군 하양면 대곡동 산속에 은신하여 청소년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던 중 1943년 1월 29일 사망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고향인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허병률 의사의 기념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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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경공파(文敬公派) 20세 병(秉) 항렬. 하양 허씨 31세. [2] 하양허씨문경공파세보 375쪽에는 1889년 2월 1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인근의 부호리와 함께 하양 허씨 집성촌이다. [4] # [5] 1942년 12월 2일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하양허씨문경공파세보 375쪽에는 1942년 12월 23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