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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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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입장
2.1. 긍정적인 입장2.2. 부정적인 입장2.3. 제3의 의견

1. 개요

허무주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관련된 내용을 서술하는 문서.

(空)을 추구한다는 불교를 허무주의에 비교하거나 아예 허무주의로 취급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불교는 허무주의다와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와 '윤리와 사상' 교과목에서는 불교의 사상적 견해는 허무주의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면 고통이 발생하니 깨달음을 얻어 이러한 고통에서 해탈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무의미하니 대충 살아라라고 주장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극단적 염세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논쟁과 논란은 현재 진행중에 있다.

2. 입장

2.1. 긍정적인 입장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석가모니가 생로병사를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그 역시 죽음을 극복하지 않았으며, 이때 설파한 "사람은 결국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범소유상 개시허망(모든 형상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등을 통해, 결국 불교도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이는 세상사 좋을 것 하나 없고, 뭘 해도 소용없으니 포기하면 편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불교가 환생, 윤회나 지옥등등의 이야기를 설법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과학적으로 발전해나가는 현 상황에서 보면 그런거 없다,즉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뿐, 실제로는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이라는 의견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불교 = 허무주의란 의견은 경전이나 불교 설화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범소유상 개시허망도 그렇지만 이 세상은 불타오르고 있는것과 같다. 그런데 중생은 쾌락에 빠져 이것을 모른다, 이 육체는 병과 똥덩어리만 가득할뿐인데 가꾸어서 뭐하느냐등을 강조하는 만큼, 이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니 즐기지도 말고 가꾸려 하지도 말라라고 하는것을 통해 공포 마케팅은 오래전부터 존재하였고, 이를 통해 중생들에게 허무함만이 존재할뿐을 강조하는게 아니냐는 의견을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불교계 종교인들중에서도 현재까지도 전파되고 있는 불교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의견은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줄여서 말하자면 불교에서 알려진 신적인 존재는 다 만들어낸 존재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을 세뇌시켜 허무주의로 이끄는게 아니냐라는 것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비롯한 수많은 불교 어휘들은 언뜻보기에 허무주의를 연상시킨다.

2.2. 부정적인 입장

반면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불교의 공(空)은 결국 사성제 12연기 등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므로 허무주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위에 나와 있듯이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것을 기본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흔히 알려진 '세상사 좋을 것 하나 없다.' 따위의 사고를 지칭한다면, 오히려 세상을 '모두가 불성을 내재한 꽃의 바다'(화엄종 계통, '이사무애 사사무애'), '살아가며 겪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부처'( 선종 계통) 등으로 바라보는 불교 사상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서 있다.

실제로 붓다의 중도 또한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극복하자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며, 승려들중에서는 공사상은 염세주의가 아니며, 재행무상을 깨닫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뭐든 될수도 할수도 있으며, 그와 동시에 얼마 없는 인생을 더 착실하고 열심히 살수 있게 해준다는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많이 나온다.

또한 불교 = 허무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부정당한지 오래인데, 바로 석가모니가 수행자시절에 만났던 육사외도중 한명인 산자야 벨랏티풋타와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를 만나게 되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회의론과 단멸론은 자신이 바라는 진리가 아니다라며 부정한 일화를 통해 불교가 허무주의와 동일하다는 의견 자체가 이들의 주장과 다를바가 없다는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2.3. 제3의 의견

불교의 공 사상'절대적인 깨달음'만으로 허무주의와 구분짓기는 어렵다며 반박는 의견도 있다. 즉, 허무주의다, 허무주의가 아니다,라면서 굳이 다툴 필요가 있겠냐는 의미.

애초에 허무주의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것에 비해, 공 사상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 즉 자성(自性)이 없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성욕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기피하고자만 한다면, 허무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은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욕구에 대한 절대적 도덕률이나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니 굳이 부끄러워 하며 감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공 사상을 가진 사람은 "욕구라는 것은 본디 비어있는 것이니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절대적 진리'라는 말에 오류가 있는데, 불교의 핵심교리는 번뇌를 불러 일으키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이지 벗어나'야 한다'가 아니다. 물론 불교 자체가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하면' '어떠어떠한 상태에 이르를 수 있다'라는 사실적 판단에서 온다는 점을 1차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해탈을 '해야한다'고 가정할 경우,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중생에 대한 구분이 생겨 버리는데(衆生相), 이는 공 사상에 그리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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