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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17:06:46

인판트 동 엔히크

항해왕자 엔히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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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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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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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7CCC8><colcolor=#000> 비제우 공작
인판트 동 엔히크
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
파일:Henry_the_Navigator1.jpg
출생 1394년 3월 4일
포르투갈 왕국 포르투
사망 1460년 11월 13일 (향년 66세)
포르투갈 왕국 사그레스
아버지 주앙 1세
어머니 랭커스터의 필리파
형제 두아르트 1세, 페드루, 이사베우, 주앙, 페르난두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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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 왕자이자 비제우의 공작이었다. 그는 셋째 왕자로서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판트(Infante)였으며, 그의 업적으로 인해 항해왕자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라고 불렸다.[1] 다만 오해와는 달리 엔히크 왕자는 직접 원정에 나선 적은 없다.

2. 생애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자 두아르트 1세의 동생으로 1415년에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하자 세우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1418년에 무슬림 세력이 연합해 세우타를 공격하려고 하자 리스본에 있다가 군대를 준비해 세우타로 향했지만 수비 부대가 무슬림 세력을 격파했다.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주앙 1세가 원정을 중지시켜 리스본으로 돌아갔으며, 1419년에는 알가르브 총독에 임명되어 유럽 남서쪽 끝 사그레스에 거류지를 건설해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해 1420년부터 탐험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탐험대의 파견을 통해 포르투산투, 마데이라 제도 등을 발견했고 페레스트레루를 포르투산투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엔히크는 탐험가들이 마데이라 섬의 나무가 너무 울창하고 덤불이 무성해 평평한 땅을 만들 수가 없어서 나무를 불태운 것을 알고는 포도나무를 심으라고 명령하였고 이후 마데이라 섬은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1433년에 주앙 1세가 죽자 형 두아르트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에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는 펄펄 끓는 암흑의 녹색 바다가 있고 악마가 살고 있다는 미신이 퍼져 그 곶을 함부로 탐험하지 못했는데, 엔히크가 보낸 지우 이아느스 등의 탐험가가 1434년에 보사두르 곶을 넘어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 것을 보고받아 그 미신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1438년에 두아르트가 죽고 아들인 아폰수 5세가 재위했는데, 아폰수 5세가 어려서 어머니인 아라곤의 레오노르의 섭정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둘째형인 페드루가 레오노르의 반대편에 서서 레오노르를 쫓아냈음에도 엔히크는 궁정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프리카 탐험에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1441년에 원정대가 사금덩이와 흑인 2명을 잡아오면서 이는 해소되었으며, 1443년부터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 대한 항해와 교역권을 독점했다.

여러 탐험가들의 발견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과를 얻으면서 1448년 9월 15일에 기니 연안에 대한 탐방, 교역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아프리카 탐험에 대한 독점권,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왕, 교회, 기사단, 부하, 해상왕국의 후계자 등에게 양도했다.

1460년 11월 13일에 사그르스에서 사망했다.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선 인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는 평생 포르투갈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인도 항로는 1480년대에 들어서 개척된다. 한 마디로 엔히크 왕자 사후 이야기. 하지만 엔히크 왕자가 시작한 아프리카 항로 개척이 인도 항로 개척의 씨앗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수긍하는 사실이다. 이때 기초가 다져진 포르투갈의 항해실력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때 꽃피워진다.

대항해시대 전만 해도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인도-지중해-이탈리아 항로였는데 여긴 유럽 서쪽 끝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길 뿐이었다. 비록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하면서 서쪽으로 가도 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지만, 콜럼버스는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발견했을 뿐 정작 그 자신은 그 곳이 인도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훗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 곳이 확실히 인도가 아님을 밝혔지만, 그도 단지 그곳이 인도가 아님을 밝혔지 인도에 간 적은 없다. 결국 아프리카 항로를 통해 인도에 닿은 건 1497년, 아메리카 항로를 따라 인도에 닿은 건 1522년으로 아프리카 항로가 더 빨리 인도로 가게 되었다.[2] 결국 엔히크 왕자의 안목은 옳았던 것이다.

3. 기타


[1]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항해왕자 헨리(Henry the Navigator), 스페인어식으로 항해왕자 엔리케라는 표기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2]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메리카 항로는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대양을 건너야 했기에 난이도가 더 높았던 반면, 아프리카 항로는 그냥 연안을 따라 항해만 해도 이미 절반은 따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리마저 아프리카 항로가 더 짧다. [3] 정치 75 전투 75 지모 84. 보A궁B기B수C, 건설/문화/등용/기동/돌격. [4] 바스쿠 다 가마,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