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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6:10

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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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으로 옮겨진 한표의 이후 모습[1]

1. 개요2. 배경3. 창경원 반입 이후4. 사망

1. 개요

1962년에 포획되어 1973년에 창경원에서 사망한 대한민국 아무르표범.

2. 배경

KBS파노라마 ‘한반도 야생은 살아있다 1편 – 표범의 마지막 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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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24일 산청군 고촌마을에서 표범에게 공격당한 주민 윤보안(당시 30세)이 표범을 두들겨 잡았다는 내용의 국제신보 1959년 3월 30일 자 기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로도 남한 내에서 표범에 대한 목격담은 계속 이어져 왔으며 실제로 몇차례 포획되기도 하였는데,[2][3] 살아있는 표범이 포획되어 동물원에 전시된 사례로는 합천군 오도산에서 어린 수표범이 포획되어 창경원에서 '한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약 11년 간 사육·전시된 사례가 있다.

파일:leo4.jpg
1962년 합천군 오도산에서 표범을 포획한 인물인 황홍갑의 주민등록증 사진.[4]
"그때 스무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손에 몽둥이랑 낫, 손도끼 같은 걸 들고 조심조심 다가갔어. 표범이 시뻘건 입을 벌리고 송곳니를 드러내긴 했어도 도망은 못 갔지. 홍갑이의 덫에 단단히 걸려 있었으니까."
그는 조부로부터 어릴 적에 올무 거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배가 꽉 조여서 그런지 표범 소리가 마치 비명 같더라고. 캬~, 캬악~하는게 말이지."
"철사 끝이 소나무에 묶여 있어서 대단한 맹수라고 해도 어쩔수는 없었던 모양이야. 철사도 그냥 철사가 아니라 강철 와이어였거든."
"강철 와이어였나! 그래서 도망가지 못했구나!"
나는 탄식하며 소리쳤다.
"와이어는 얇지만 끊어지질 않거든. 표범을 차라리 두들겨 죽였으면 간단했을 텐데 홍갑이가 생포하자고 했지. 서울의 동물원에 보낸다고 말이야. 대단한 남자라니까, 표범을 전 국민에게 보이고 싶다나."
남자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손도끼로 잘라서 그것으로 날뛰는 표범의 목을 제압했다.
(후략)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76~77

1962년 2월 12일 오전, 합천군의 오도산에서 오도산 인근의 가야마을에 거주하며 올무를 통한 사냥을 취미로 하던 당시 44세의 주민[5] 황홍갑(黃紅甲)이 설치한 올무에 허리가 걸린채로 포획된 이 어린 수표범은 당시 국내 유일의 동물원이었던 창경원에 이 표범을 기증하고자 한 포획자 황홍갑의 뜻에 따라 마을 주민들에 의해 생포되었는데, 포획하는 과정에서 황홍갑의 동생인 황홍수(黃紅秀)의 오른쪽 손바닥을 발톱으로 할퀴어 뼈가 보였다고 할 정도의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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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이 할퀸 손바닥의 흉터를 내보이는 황홍수. 1985년 촬영. 당시 63세.[6]
"어허, 조용히 좀 하게. 동네 남자들이 총출동해서는 드럼통을 옆으로 누이고 저기에 굵은 철사를 칭칭 감아서 우리로 썼어."
드럼통이 뚫린 방향은 굵은 철사로 격자를 만들어 막았다.
"표범을 안에 집어 넣는 일이 좀 힘들었지. 격자 사이로 머리를 먼저 밀어 넣고, 다리의 밧줄을 끊은 다음 기다란 꼬리가 끝까지 들어 갔을 때에는 만세를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고. 와하하~,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지."
(중략)
"드럼통에서 아흐래동안 먹이를 주었어요. 마을에 있는 집토끼는 다 먹어치워서, 소고기와 돼지고기 같은 걸 사왔죠. 물도 챙겨 주고요. 음, 드럼통은 이 창가 밑에 놓여 있었어요."
말을 끝내자,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땐, 어두워지면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어요. 혹시라도 드럼통에서 빠져 나올까 무서워서 오줌 누러도 안 갔죠. 그러고 보면 산 저편에서는 그 짝이 울어댔었어요. 구슬픈 목소리로 상대를 찾는 거겠죠. 그러면 잡혀 온 녀석도 대답을 했어요. 드럼통 안에서 캬옹~ 하면서······."
"다른 표범이 구하러 오기라도 할까 봐 모두 걱정했지요."
"여러분, 혹시 산에서 우는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할머니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누구도 들은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김씨 할머니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바람 소리라도 호랑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법이지. 오도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니까. 하물며 드럼통에는 살아 있는 표범 한 마리가 그르릉 하고 있었으니."
경남대학교의 함 교수도 눈을 크게 떴다. 이 나라의 동물학계상 전대미문의 이야기였다.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60~62

생포된 표범은 마을 주민들이 기르던 토끼 등을 먹이로 공급 받으며 드럼통으로 만든 임시우리에 수용되어 있다가 합천 경찰서에서 창경원에 표범을 기증코자 한다는 전보를 보내게 되었다. 전보를 받은 창경원 측에서는 이를 등을 오인한 것이 아닌지 다그쳐 물었으나 정황상 표범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수의사 권순호(權純鎬)를 가야마을로 급파해 포획된 표범이 표범이 확실한지 확인하도록 하였다.

19일 오전에 현장에 도착한 권순호는 표범이 확실한 것을 확인하고 마을에서 이동 상자를 급조해 표범을 수용하여 저녁 즈음에야 묘산면으로 옮겼는데, 이송 중 먼 곳에서 어미가 출몰하여 따라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표범을 트럭에 싣고 합천에서 출발해 새벽 세시에 대구에 도착한 뒤 권순호는 우체국 문이 열기를 기다려 표범임이 확실한 것을 확인했으며, 저녁에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전보를 창경원에 보내었다.

3. 창경원 반입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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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합천군 오도산에서 포획된 뒤 창경원으로 옮겨진 한표에 대한 1962년 2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표범 확인 금일저녁 서울도착 권"
직원들 모두는 환호성을 울렸다. 서울역에 나아가 받아싣고 맹수우리에 풀어놓았을 때 함성은 다시 터졌다. 어엿한 한국표범! Korean Leopard! 아무르표범! Panthera pardus orientalis! 이놈이 바로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그놈 아니가! 실로 해방 후 초유의 쾌거였다. 우리는 이 수컷의 이름을 "한표"라 지어줬다.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293

표범은 20일 저녁 창경원에 도착해 맹수사에 수용되었으며, 창경원에서는 '한표'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7] 한표를 포획하여 기증한 황홍갑에게는 30만원의 사례금이 지급되어 이 사례금을 자택 보수 공사에 사용했으나 가야마을이 외진 곳에 있어 인부를 부르고 길을 넓히는데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하며, 이후 황홍갑은 52세에 다리에서 떨어져 돌에 머리를 부딪힌 후유증으로 인해 4년 간 투병하다 『한국의 마지막 표범』의 저자인 엔도 키미오가 1985년 가야마을에 방문했을 때 이미 3~4년 전에 사망한 상황이었다고 한다.[8]

창경원 측에서는 한표를 사육하면서도 한표와 짝을 지을 암표범을 몰색하던 중 1963년 7월에 이리시(익산시)의 한 교회에서 3년 생 암표범 한 마리를 포획했다는 연락이 오자 해당 표범을 수령받으려 했으나 해당 암표범은 총상 또는 덫으로 인해 오른쪽 앞발목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던데다 교회측에서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요구했던 탓에 구해오지 못했다고 하며, 이후 이 암표범은 교회 측에 의해 약용으로 도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9]
남북의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에서 자연보호라는 것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러나 1969년 IUCN(세계자연보전연맹)은 아시아에서의 호랑이 격감을 세계에 알렸고, 그것을 계기로 1970년에 인도의 호랑이 수렵이 금지되자 드디어 한국에서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동물원에서는 이 표범의 자손을 남기고 싶어 했지만 암컷 표범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도 표범 암컷을 구입해 동거 시켰고, 무사히 교미가 이루어져 1972년 9월 17일에 두 마리의 새끼가 태어났다. 모두 암컷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로 인도 표범은 임신하지 않았다.
-한국의 마지막 표범 p.110
1971년 10월 20일 창경원. 8년의 약혼기간을 오늘로 끝내고 신랑 한표군(한국표범)과 신부 인표양(인도표범)의 국제결혼식을 올리는 날이다.
아침 8시. 구름 한점 없이 하늘은 푸르고 등 뒤의 먼 햇살이 솜처럼 따사로운데 덜미에 간간이 스치는 소슬바람 또한 상쾌해 결혼날 치고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하다.

(중략)

어쩌다 한 번이지 두 번이나 당할 쏘냐. 달려드는 놈을 앞발로 받아 보기 좋게 한 펀치를 안긴다. 뒤로 나가떨어진 신부,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굴하지 않고 반격한다. 이제야 남편의 본때를 보여주나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이 어찌된 셈인지 퇴각한 놈은 또 신랑놈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꼴 사납게도 콧등에 두줄기 할퀸 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새빨갛게 피가 비친다.

아무리 짐승이기로서니 부창부수, 다소곳하게만 군다면 해로울게 없을 텐데 저다지도 앙탈을 부릴 것은 또 뭐람? 승자에 대한 박수는 고사하고 더욱 밉살스러울 판인데 게다가 한술 더 떠 이젠 제법 기고만장 거들먹거리다가 항복이라도 받으려는 셈인지 꿇어 엎드려 고개도 못드는 신랑 앞으로 가서는 면전에 꽁무니를 돌려대고 상쇠잡이 상모 꼬느듯 꼬리를 휘젓다가 가뜩이나 쓰린 콧등을 꼬리 끝으로 톡톡 건드린다. 자지러지게 놀란 신랑놈. 참다 못해 펄쩍 뛰어 저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차라리 오들오들 떨기조차 한다.

이쯤되면 더 볼 게 없을 것 같다. 거꾸로는 됐지만 한편이 완패하여 전의를 잃고 항복했으니 더 이상 큰 싸움은 없을 것 같다.
(후략)
- 오창영 에세이② 동물의 사랑학 p. 56~65

파일:archWebViewerStream.jpg
한표(뒤)와 인표(앞)의 합사 시도 당시 사진. 1971년 10월 20일 촬영. 국가기록원 소장.

이렇듯 사실상 국내에서는 한표와 같은 아종의 아무르표범을 더 이상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당시 냉전 구도 상 주변 공산권 국가에서 아무르표범을 도입해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창경원 측은 한국표범의 혈통을 절반이라도 보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고라니 한 쌍과 꿩 20마리를 보내는 동물교류를 통해 인도 델리 동물원에서 공작 한 쌍과 암컷 인도표범을 들여왔다.[10]

1964년 1월 28일 창경원에 도착한 이 암컷 인도표범은 '인표'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인표와 한표는 인표가 창경원에 도입된 지 7년이 지난 1971년 10월 20일에 합사되었고, 합사 초기에는 인표와 한표 사이에서 싸움이 있었지만 인표가 한표를 제압하는 것으로 합사에 성공하여 1년 뒤인 1972년 9월 17일에 둘 사이에서 두 마리의 교잡종 암컷 표범 자매가 태어났으나[11] 이 이후로는 인표와 한표 사이에서의 번식은 없었다.

4. 사망

한표는 창경원에서 11년을 살다 1973년 8월 11일 순환기 장애로 쓰러졌고 8일 뒤인 8월 19일 새벽 4시 30분에 사망했는데, 죽기 전부터 부분적으로 구더기가 끓는 등 괴사가 일어나 가죽이 심하게 상해 골격표본만을 만들어야 했다고 하며 사망시의 체중은 87kg으로 과체중이었고 몸길이는 98cm에 어깨 높이는 69cm, 가슴 둘레는 95cm였으며 꼬리 길이는 측정되지 않았다.[12]

파일:한동산표범.jpg
1988년 서울대공원의 소식지에 실린 한표와 인표 사이에서 태어난 교잡종 표범에 대한 내용. 다만 1980년대에 한국의 표범에 대해 조사한 엔도 키미오의 기록 및 오창영 창경원 수의관의 기록과는 태어난 일자가 다르게 기재되어있다.
인표는 그 후 9월 17일 암새끼 2마리를 순산했다, 한인(韓印)각 50%의 혼혈표범은 커가며 겉모습이 거의 아비를 닮아갔다. 이 자매는 서울대공원에 와서도 사뭇 늠름하더니 작년(1989년) 11월에 한놈이 죽고 지금은 일곱 살인 동생만이 건재하다.
- 오창영 에세이② 동물의 사랑학 p. 67
본문 중 '일곱 살인 동생'은 정황 상 '열일곱 살'의 오타로 보임.
조선 표범 사망 후, 혼혈로 태어난 표범에게 수컷 인도 표범을 들였지만 교미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혼혈 암컷 한 마리만 살아 있다.
"그 암컷에게도 조선 표범의 특징이 잘 남아 있습니다."
오 부장이 표범 우리까지 안내해 주었다. 인도 표범과의 혼혈임에도 당당한 풍채의 표범이었다. 혀연 송곳니를 드러낸 모습은 도저히 생포할 수 있는 크기의 표범이 아니었다.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111

한표의 사망 이후 창경원에서는 인표와 한표의 딸 자매들을 번식시킬 목적으로 1977년에 수컷 인도표범을 추가로 도입해 합사했으나 이 자매들은 번식하지 않았다. 이후 인표는 1981년에 사망했으며 인표와 한표의 딸들은 창경원의 서울대공원 이전 시점까지 생존해 서울동물원으로 인계되어 사육되다 1989년 11월에 둘 중 하나가 죽었고,[13] 다른 하나도 1990년에 서울동물원의 연도별 동물수용목록에서 사라진다.[14]


[1] 비만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한국전쟁 시기에 우리나라에 출전한 어떤 미국군인이 궁중에 있던 표범의 털가죽으로 만든 모포를 미국으로 가지고 가 자랑한 일이 화제가 되어 '라이프'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3] 또한 이때는 동물보호법과 사냥 금지령도 없었으며 환경과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었다. 뒤늦게 동물보호법과 사냥 금지령이 내려진 것도 1970년대였다. [4]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82 [5]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56~57 [6]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89~90 [7]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 p.293 오창영 에세이2 동물의 사랑학 p.56~67 [8] 한국의 마지막 표범 p.66 [9]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 p.198, p.293 오창영 동물기 p.311 한국의 마지막 표범 p.111~112 [10]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303, 475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12900329207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1-29&officeId=00032&pageNo=7&printNo=5621&publishType=00020 [11] 오창영 에세이2 동물의 사랑학 p.67 [12] 한국의 마지막 표범 p.110 우아한 살육자 표범 p. 14 [13]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 p.303 오창영 에세이2 동물의 사랑학 p.67 한국의 마지막 표범 p.110 [14] 한국동물원80년사 서울대공원 전국동물원·수족관편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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