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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1:46:04

한중 분지


1. 개요2. 상세

1. 개요

중국의 지명.

한중 분지에서의 북쪽으로는 진령 산맥에서 시안(장안)이 있는 관중 분지가 있으며[1] 남쪽은 '다바 산맥(대파 산맥)'에서 오늘날의 쓰촨 성, 충칭시가 있는 파촉 분지로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장강 유역(후베이성, 호북성)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천수에 이른다.

한중 분지를 관통하고 있는 강은 한수다.
파일:한중 중국.jpg

가운데에 한수가 흐르는 비옥한 분지[2]이다.

비옥하다고는 하나, 땅 자체가 좁아서 파촉 분지나 강남 하류 등 생산량이 높기로 유명한 지역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관중 분지 파촉 분지, 동정 평야의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인 요충지다.

한중이 아닌 다른 루트로 파촉 분지에 진입하려면 촉한멸망전 등애가 간 무도-음평[3]처럼 한중보다 더 험한 산악지역을 통과하거나, 장강(양쯔 강)을 타고 거슬러서 파서지역으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음평 산길은 등애 문서에 나오듯이 전시나 평상시나 도저히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산길이다. 장강 루트는 바로 장강 삼협으로 불리는 곳으로, 평상시에 교역을 위한 루트로는 좋아서 현대 중국에서도 수운으로 잘 활용하고 있지만, 계곡이 험하고 물살도 빨라서 군사용으로는 상당히 부적합한 길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관중 지역과 파촉 지역을 오가는 교통이 모두 한중을 통과하고, 전쟁의 진격로도 모두 한중을 통과했다.

2. 상세

고대에는 초나라의 영토였던 시절이 있었으며, 한수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초나라가 성장하면서 장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초나라의 중심지도 동정 평야로 옮겨지면서 중심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전국시대 들어 팽창한 진에게 한중을 빼앗긴 초나라는 파촉 분지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하게 되고, 결국 지속적으로 진나라에게 압박을 받아 수도 '영'마저 빼앗기게 되면서 몰락했다.

한고조 유방과 서초패왕 항우가 아직 군벌로서 진에 반기를 들고 연합하던 시절, 누가 진의 수도 함양성(현 셴양시)에 먼저 입성하는지를 두고 경합을 벌였다. 초 의제는 진의 본토인 관중 (현재의 섬서성 지역)에 먼저 진입하는 자를 관중왕에 봉할 것이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승자는 유방이었으나, 반진 연합군의 맹주에 가까운 중추적 역할을 하던 것은 초나라의 후계라는 정통성을 가진 항우의 세력이었기 때문에 유방은 관중 대신 훗날의 위협을 제거할 겸 첩첩산중의 분지라 진출이 어려운 한중을 영지로 받았으며, 진의 명장이던 장한 등을 삼진왕으로 봉해 유방을 감시했다.

그러나 위에 설명된 대로, 군사/지정학적으로는 엄청난 요지인 탓에 세간에서는 항우가 유방에게 관중 대신 한왕으로 봉하고 한중에 가둔 게 가장 큰 실책이라고 평할 정도다. 험한 지세와 그럭저럭 풍요한 물산 덕에 한중 지방은 전쟁 내내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물자를 제공했는데, 딱 유방이 북진한 직후에 관중에는 대기근이 돌았기 때문에 이곳을 본의 아니게 얻지 못했다면 유방은 그대로 자멸했을지도 모른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들에겐 오두미도 장로의 본거지, 그리고 한중 공방전 이후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지에서는 사천성 지방을 서천(西川)이라고 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한중 지방을 동천(東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후 비옥한 한중 분지 지역은 촉한이 차지하고 한중 동쪽 산간 지역 요충지인 상용 지역은 잠시 촉한이 차지했다가 동삼군(東三郡)이라고 하여 조위가 차지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에서 조비의 위황제 등극보다 유비의 한중왕 선언에 더 많은 기록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진수가 촉 출신이라서라는 얘기도 있지만 삼국지의 전체 흐름, 특히 의 대립에선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조비가 위나라 황제에 오른 것은 당시 멸망한 거나 다름없었던 후한 황실에 소위 막타를 친 정도라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것은 역사적인 흐름보다 당시에는 엄청난 정치적 제스처였다.

한고조 유방은 항우와 대립하다가 한중 땅을 분봉받아 한왕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왕조가 일어섰다. 그의 후손 유비는 한중왕에 오르면서 선조인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망해가는 한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유비가 그 옛날 유방처럼 제2의 한고제가 된다는 제스쳐는 정치적으로 큰 상징을 가진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돗자리나 짜던 놈이 나와 맞먹으려고 하다니!"[4]라고 단순히 빡쳐서 유비를 치려고 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정사나 창천항로에서 조조가 괜히 유비의 한중왕 등극 소식을 듣고 충격 받은 게 아니다.

간단 요약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유비가 '조조는 항우와 같은 역적이고 나는 한 황실의 종친이니 한고조의 뜻을 이어받아 역적을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하겠다.'라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5]

이후에도 진령 산맥 깊숙한 곳에 분지에 있는데다가 서안과 성도사이의 중간지, 잔도로 인한 높은 침략 난이도 덕분에 지방정권들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약했다. 중원 평야 파촉 분지가 서로 분열되어 있어 싸울 때에는 군사 요충지로서 잘 나갔지만, 통일왕조시기에는 군사적 요충지의 가치가 떨어져서 명/청대엔 망한 동네였다. 촉한멸망전 이후 양주(梁州)가 설치되었으며 당나라 때는 흥원부(興元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송나라 때는 최고 행정구역으로 이주로가 설치되어 이주로의 치소 역할을 담당했다. 송나라 때까지는 現 사천성의 전신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원나라 때 現 섬서성의 전신인 섬서행성으로 넘어와 흥원로(興元路)라는 명칭을 거쳐 명청시대에는 한중부(漢中府)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서부대개발을 벌일 때 이 지역에 고속도로를 연결해서 시안-청두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부활했다. 지금은 고속철도도 뚫려 있다.


[1] 이 진령 산맥을 뚫고 가는 길은 삼국시대 때 자오곡 계책으로 알려진 자오도라고 한다. 현재에도 차길은 있지만 편도 1차로에 급격한 턴과 구배로 우리나라 시골 국도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다. 현재 사용되는 도로는 남북조시대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한위진시대때의 자오도는 폭이 더 좁아 왕복 1차로 수준에 길이 더 험하다. [2] 애초에 '한중'이라는 이름도 한수에서 따온 거다. 한나라~ 위진남북조 시기엔 '이 지방은 토양이 비옥하고 물이 맑다. 공품이 나오는 것은 거의 삼촉(三蜀:촉군,광한군,건위군)과 맞먹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화양국지에 있다. 여기서의 한중은 상용까지 아우르는 영역으로 촉한이 차지한 영역보다 더 넓은 구역이다. 하지만 상용이 요충지이기는 하나 대부분 산악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촉한이 차지한 한중 영역에서 나오는 물산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원래 광한서부도위-광한북부도위가 있는 곳이었다. [4] 당시 조조는 위왕이었다. [5] 촉한은 스스로 내세운 명분상으로는 후한을 잇는 나라이며, 중국대륙(후한 영토)의 적법한 지배자이다. 물론 실질적으론 후한과 촉한은 유비의 황실 혈통만큼 미세한 연결고리만 있을 뿐이고 지방군벌이 세운 소국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엔 매우 중요한 명분면에서 실제 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에게 조조가 크게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한중왕' 유비와 '위왕' 조조가 서로를 역적이라고 했을 때 유비 쪽으로 크게 명분이 기울게 되는 것. 이 때문에 한중왕에 오른 후 벌어진 형주공방전이나 후에 있는 촉한의 북진 당시 이들에게 호응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던 것이고, 유비의 칭제에 대한 비난여론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유비처럼 ' 전한 경제의 방계황족이었으나 군사를 이끌고 세력을 키워 망한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운' 루트를 탄 자가 바로 광무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