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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02:00:09

한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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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무숙(소설가)2.jpg
1950년 당시의 한무숙
성명 한무숙()
향정(香庭)
본관 청주 한씨[1]
출생 1918년 10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통의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사망 1993년 1월 30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사이트 한무숙 문학관

1. 개요2. 생애, 활동3. 한무숙문학상4. 가족5.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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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소설가. 역시 여류 소설가인 한말숙의 언니다.

2. 생애, 활동

1918년 10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통의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의 외가에서 경상남도 창녕경찰서 경부로 근무하던 아버지 한석명과 어머니 인동 장씨 장숙명(張淑命, 1893. 9. 20 ~ ?)[2] 사이의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2살 되던 1919년 11월 2일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도경부(道警部)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제3부 부산경찰서로 발령을 받자 이를 따라 경상남도 부산부로 이주했다.

부산봉래공립심상소학교(現 부산 봉래초등학교),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화가를 지망하여 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말봉의 소설 '밀림'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1940년 김진흥(金振興)과 결혼 후 완고한 집안의 며느리로 그림 그리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소설가의 길을 선택했다.

1943년 '신시대'라는 잡지의 장편소설 모집에 일본어로 쓴 '燈を持つ女(등불 드는 여인)'을 투고,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조선연극협회 작품 모집에 희곡 '마음', '서리꽃'이 당선되었다.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첫 번째 작품은 1948년 국제신보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역사는 흐른다'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월훈'(1956), '감정이 있는 심연'(1957), '축제와 운명의 장소'(1963), '우리 사이 모든 것이'(1978), '빛의 계단'(1960), '석류나무집 이야기'(1964), '만남 상·하'(1986), ' 생인손'(1987) 등을 발표했다.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다.

1993년 1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심부전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74세.

3. 한무숙문학상

사후 한무숙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993년 남편 김진흥에 의해 한무숙재단이 설립되어 1995년부터 시상하고 있다. 제1회 수상자는 동생 한말숙의 친구인 박완서다.

4. 가족

아버지 한석명 일제강점기 사천군수, 동래군수, 하동군수를 지냈고, 오빠 한복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판사, 광복 후 변호사를 지냈다. 여동생은 소설가 한말숙이고 여동생의 남편은 국악인 황병기다.

남편 김진흥(金振興)은 1916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김덕경(金悳卿)의 차남으로 태어나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한일은행장, 한국주택은행장, 한국종합금융 회장을 지낸 원로 금융인이다. 슬하에 장녀 김영기(金榮起, 1941 ~ ), 장남 김호기(金虎起, 1942 ~ ), 차남 김용기(金龍起, 1944 ~ ), 차녀 김현기(金賢起, 1946 ~ ), 3남 김봉기(金鳳起, 1948 ~ )를 두었다.

장남 김호기가 현재 한무숙문학관 관장으로 있다.

5. 수상



[1] 참의공파(參議公派) 31세. [2] 장윤규(張潤奎)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