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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3-19 15:30:43

한니발 바르카/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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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2. 변호3. 비판4. 변호5. 비판6. 변호7. 비판

1. 비판


총사령관인 한니발한테 패배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는 논리가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는데 한니발은 자기 본국의 전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카르타고의 군사적 역량이 무능한 건 맞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분명히 전쟁을 총괄하는 사람의 책임이다. 무슨 전쟁을 카르타고 내부에서 한니발과 의논조차 하지 않고 결정했겠는가? 이베리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는 사실상 바르카 가문의 영지라고 평가받을 만큼 한니발의 위치는 낮지 않았고 전쟁 개시 시점을 보면 아예 한니발은 히스파니아 주둔군의 총사령관(혹은 상당힌 높은 지휘관)이었다. 이런 인물을 놔두고 카르타고 내부에서 몰래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당시 정황으로 추측컨대 한니발은 전쟁을 반대하긴커녕 오히려 찬성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위대한 그리고 위험한 전략적 움직임을 한니발이 맡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직후 로마의 패권은 더욱 강화되었고 카르타고의 패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아니, 약화된 수준을 넘어서 이 전쟁의 여파로 카르타고의 패망 자체가 앞당겨졌다. 하물며 로마는 한니발의 전술을 연구하고 적용해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한니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로마군의 전술 수업 교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2. 변호


단, 이건 한니발에게 약간 억울할 수도 있는데 한니발 입장에서는 로마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쇠락해가는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말로 당시에 직접 모의 전쟁을 치러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동료 장수들이 회전 무승 신화를 찍을지 알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해도 동료 장수들이 상대 본진 절반 가까이 점거+동원 가능 병력 30% 이상 몰살에 지휘관급도 몇 명이나 죽여서 힘 다 빼준 군대 상대로 무승 신화 찍을 것을 예측한다던가 자기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닌 소년이 상대 쪽에서 갑툭튀 할거라는 것을 다 예측해낼 수 있는 게 아니면 전쟁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소리 아닌가?

해당 비판의 글쓴이의 경우 한니발이 피아간의 힘의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여 무모한 전쟁을 하였다는 주장인데, 이 부분은 리비우스가 자신의 사료의 서두에서, so changeable were the fortunes of the war, and so evenly matched the fighting, that it was the eventual victors who came closer to ruin.라는 말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훗날 로마에서 자신을 횡령죄로 고발한 자에게 말한 It ill-became the Roman people to listen to accusations against P. Cornelius Scipio, to whom his accusers owed it that they had the power of speech at all 에서 간단히 반박된다.

당대의 로마인들도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하마터면 나라가 망할 뻔 했다고 생각하는 시각은 스키피오조차 자신이 아니었으면 로마라는 나라가 없었을 거라는 취지의 말로서 드러내고 있고 리비우스도 거의 막상막하였다는 주장을 하는데, 한니발이 전쟁을 찬성했는지 안했는지 정황으로 가정하는 해당 글쓴이가 이런 '로마인의 시각'을 접했다고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무능한 사령관들이 많은 카르타고의 문제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도했다면 그 이길 수 없을 카르타고쪽에 붙은 당대의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 이탈리아 중부의 삼니움, 이탈리아 남부의 마그나 그레시아와 브루티, 아풀리아의 도시들과 시라쿠사를 포함한 시칠리아의 도시들,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도자들은 모두 2천년 뒤에 풍문으로 들어온 사람보다 더 부족한 판단을 했다는 말인가?

당대 로마, 카르타고의 세력권의 절반 이상이 카르타고가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만큼 당시의 정세는 "카르타고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일 정도로 로마의 입장에서 심각하였으며 힘의 균형이 비등하였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시를 기록한 역사가 조차 하마터면 로마가 망할 뻔 하였다라는 평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위에 비판에도 나오지만 피아간의 식별에 있어서 국력과 물량, 전략 뿐 아니라 자기 나라의 장수들의 무능력, 로마 장수들의 유능함까지 고려하여 판단내리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능력 정도가 아닌 초능력을 요구하는 과도한 요구사항이라 할 수 있는데, 장수의 유능함은 군대를 맡겨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스페인 부임전 안찰관으로 도시의 행정을 맡고 있는 동안 그의 군사적 역량이 그 정도로 시대를 초월할 정도였는지 파악할 수 있었나? 그의 실력이 뛰어났음이 드러난건 그가 비로소 군대를 지휘하면서 부터였다. 한니발의 피아간의 전략차를 파악하는데 있어 군대를 아직 맡아보지 않은 카르타고인들의 능력을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한니발 가족들과 장교들은 스페인 부족을 연이어 격파해왔고, 한니발의 당대 로마장군들은 카르타고인들도 쉽게 이겨온 스페인 부족보다 약하다고 평가되는 갈리아인들만 쭉 상대하고 있었기에, 로마 장군들의 실력이 한니발을 제외한 모든 카르타고 장군들을 능가함을 헤아리는 것은 한니발이 신이 아닌 이상 파악할 수 없는 요소이다.

3. 비판


하지만 카르타고의 경제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딱히 나라가 망해가거나 쇠락해가는 중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위 문장에서 말하듯이 전쟁 이후에 국력 차이가 훨씬 더 심해졌다. 이베리아의 상실은 물론이고 누미디아는 적으로 변모했으며 자주국방권까지 박탈당했다. 게다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에게 유리한 가정 뿐만 아니라 불리한 가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로마가 파비우스의 전략을 더 빨리 실행했다면 칸나이 전투는 없었다. 또, 게마누스의 기병대가 칸나이 회전에서 합류했다면 한니발은 기병과 보병 모두 열세한 상황에서 로마군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칸나이 이후에 로마는 정면 회전을 피하고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바꾸게 된다. 한니발이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것처럼 카르타고 장군들 또한 그들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총사령관의 자질 중 하나는 사람 보는 안목이다. 한니발은 카르타고 장군들의 능력을 과신했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한니발이라고 비판 불가의 성역이 아니다. 전쟁의 주요 자휘관으로써 손을 뻗고 발을 담근 이상 한니발 역시 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스키피오의 발언은 원로원에 열받아서 한 거라고 보는 게 맞다. 스키피오는 전쟁의 종식을 앞당긴거지 로마에 불리한 전황을 뒤집은 건 아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전략과 마르켈루스의 게릴라 전술로 스키피오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 승부의 추는 로마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 역시가들의 발언은 로마의 성과를 과장하기 위해 위기를 부풀려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카르타고에 붙은 세력이 많았다는 식으로 반박을 하는데, 따지고 보면 로마 연합의 해체는 한니발의 의도되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를 지지한 세력들도 많았고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고 봐야 하는가? 그리고 카르타고에 붙은 세력들이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어떻게 되었는가? 과정만 중요시하고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는가?
로마와 카르타고의 병력동원 능력만 봐도 상당히 차이가 크고 장군들의 실전 경험도 카르타고가 떨어졌다.

또한 장수의 자질에 대해선 군대를 맡겨보기 전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제갈량이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마속에게 군을 맡겼다는 것이다. 위의 논리라면 제갈량의 마속 중용도 얼마든지 미화하고 포장할 수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사람 보는 안목이 그만큼 떨어졌고 전세 예측하는 능력이 낮았다는 소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카르타고의 장군들이 전패를 했다고 하는데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한노 또한 로마군을 이긴 적이 있다.

하지만 한니발이 전세가 기울어 돌이키기 힘들 정도가 되자 현실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로마와의 협정을 멋대로 파기한 카르타고 과격파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겠다고까지 하면서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다. 한니발의 구상대로 자마 전투를 피하고 로마와 협정을 맺었다면, 최소한 카르타고의 멸망만은 막거나 늦출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자마 패전에 예정보다 훨씬 가혹한 강화 조약, 한니발 망명까지 이어진 국가 막장 테크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4. 변호

위의 논자의 비판에 있는 결함은, 역사적 기록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생각날 시 그 가설이 왜 옳은가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를 갖추고 이후 그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해야한다는 역사학 접근방법이 있는데 그 원칙을 어긴 전제로 논거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예를들어 스키피오와 리비우스가 두 국가와의 싸움이 비등하였으며 스키피오의 출연으로 인해 반전되었다고 말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면 그를 반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역사적 기록 혹은 증거물, 학문적연구결과들이다. 따라서 위의 로마인들의 기록이 왜곡에 불과하고 실제 전쟁은 로마의 원싸이드한 싸움에 불과하였다는 반박이 가능하려면 글쓴이는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 가령 기록을 뒤집을만한 새로운 고고학적인 발견이거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새롭게 연구된 학설의 레퍼런스라던가, 아니면 이러한 검증을 하는게 직업인 역사학자가 저술한 2차 포에니 전쟁 관련 저서의 내용의 언급이 필요하다.

이러한 근거 제시를 생략한 채 역사적 기록인 리비우스의 서술과 스키피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리비우스는 로마편을 들어 과장한 것일 뿐, 스키피오는 열 받은 것일 뿐"

이렇게 일축하는 것은 건 글쓴이가 두 로마인에게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관심법을 사용했거나 아니면 두 사람의 말은 틀렸다 그 이유는 내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라는 소감과 느낌의 피력에 불과하므로 어떠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의 등장의 중대함을 두 로마인이 강조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전황은 로마인이 카푸아를 점령했긴 하였으나 한니발은 타렌톰을 점령함으로서 전선이 이탈리아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다. 또한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를 제압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는 로마가 그쪽의 물량을 동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물량을 투입해서 유지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렇듯 지중해 전역은 한니발과 그 동맹세력의 협력으로 인해 스테일메이트가 된 상황이었다.

이 상황서 두 세력의 운을 결정짓는 전장터는 스페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세력을 물리치고 이탈리아로 들어오느냐 아니면 로마가 카르타고의 세력을 물리치고 아프리카로 들어오느냐에 의해 전황이 크게 바뀌기 때문이었다.

즉슨 이탈리아가 교착상태가 된 이상 두 세력의 승부를 결정짓는 건 스페인 전쟁이며 이곳이 두 세력의 결전장이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스키피오의 등장으로 인해 후자가 되어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떠나야했으나 만일 전자가 된다면 세개의 카르타고군단이 북이탈리아로 들어와 갈리아와 연합해 압박하게 되며 스페인에 퍼부운 카르타고의 물량이 이탈리아에 집중될 것이므로 로마는 점점 핀치에 몰리게 된다.

여기서 이를 승리로 이끈 장수가 스키피오이니 스키피오가 말한 나를 고발하는 자는 나 덕에 살아있는 것 이리 말하는 것을 단순 열받아 허풍떠는 것으로 볼 수 없고 리비우스가 두 국가의 전쟁은 너무도 팽팽하였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이를 역사서에 적었다고 볼 수도 없다.

비록 위키 작성은 퍼블릭에 오픈되어 있다하나, 이렇게 역사적 기록을 증거와 근거의 제시없이 자신의 감성으로 추론한 소감을 하나의 이론화 하여 위키에 남기는 패턴을 가진 유저들이 넘치기 때문에 위키의 질적 하락이 생기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나무위키가 그 대상이 되는데, 유저들은 이런 패턴을 스스로 삼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여진다.

5. 비판

전혀 아니다. 그냥 세력판도 색깔만 칠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는데, 로마와 카르타고는 주요 전장에서의 거리와 전개할 수 있는 병력부터가 다르다. 우선 시칠리아는 소위 '귀신떨거지들'이 알아서 내분으로 말아먹어서 로마군에 완전히 들어온 상태였고, 당장 로마가 해로를 점거하고 있는 상태에다 시라쿠세이가 마르켈루스에게 함락당한 이상 시칠리아 전선이 새로이 형성되기란 불가능한 상태였다. 카르타고로써 한니발에게 지원해주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중간 기착지인 시칠리아가 넘어간 이상 이 전쟁, 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제 남부 이탈리아의 한니발을 살펴보자. 로마는 남부 이탈리아 전선으로 끊임없이 병력을 보낼 수 있다. 왜? 홈그라운드니까. 지속적인 병력전개가 가능한 한편, 한니발이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은 북부 이탈리아나 남부 지중해를 통해서인데, 남부 지중해를 통한 지원은 시칠리아가 넘어간 이상 매우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북부 이탈리아를 통해서인데, 북부 이탈리아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내려오려면 에트루리아와 중부 이탈리아-라티움, 캄파니아 지방을 지나야 한다. 과연 기존 카르타고 장군 능력치로 적군이 득시글대는 본진을 뚫고 남부 이탈리아의 한니발에 합류할 수 있을까?

북부 갈리아의 경우도 켈트족의 저항역량은 한니발이 다녀간 이후로 꽤나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비록 로마군을 패배시키며 선전하긴 했지만, 그건 홈그라운드니까 그런 거고...사실상 유의미한 남쪽으로의 공세는 불가능하다. 한니발이 무려 2만의 전사대를 북부 켈트족에서 용병으로 충당했는데, 당시 이탈리아 갈리아의 갈리아족이 뽑아낼 수 있는 물량의 상당부분이 반도 남쪽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제대로 된 '공세'를 취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로마군 수비대 괴롭히면서 자기네 땅에 들어온 로마군 뺨 몇 대 때리는 게 고작이지.
다시 말해 당시 전장은 스페인 - 카르타고 / 북부, 중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 로마 / 남부 이탈리아 - 한니발로 세력판도는 도찐개찐으로 보일지 몰라도 로마는 언제나 남부이탈리아에 물량을 쏟아부을 수 있는 반면 한니발은 제한된 병력 가지고 버텨야 했다는 소리다. 이게 어딜 봐서 스테일메이트인가? 한니발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이지. 스키피오의 스페인 전선 승리는 이 상황에서 거의 재생불가능한 결정타를 한니발과 카르타고에게 먹인 거지, 균형을 깨뜨린 게 아니다.

쓴 사람은 조금만 생각해보자. 한니발이 북부 이탈리아에 진입한 이후 남부 이탈리아에 진입해 성실한 동맹국들을 얻기까지 그는 보급문제로 그야말로 개고생해야 했고 로마군의 끊임없는 견제마저 뚫어야 했다. 자세한 것은 Hannibal's mules라는 논문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 역경을 모두 견뎌내고 칸나이까지 이끌어간 것은 한니발이 천년에 한번 나올 먼치킨이었기 때문이지 이탈리아 횡단 전략이 특출난 전략이라서가 아니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듯 '능력치도 딸리는' 카르타고 장군들이 잘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이 있는 남부 이탈리아까지 내려오겠다. 만약 스페인 버리고 카르타고가 북이탈리아에 들어오는 순간 그건 한니발 침공의 재림이 아니라 카르타고 입장에서 전략적 재앙이 될 것이다. 왜? 스페인에는 현지 동맹부족이라도 있었지, 북이탈리아에는 동맹국도 켈트족 외에는 딱히 없었던 데다가, 켈트족의 유망한 전사들은 이미 한니발이 죄다 이끌고 남부 이탈리아로 내려가버렸으니까!! 과연 그들이 중부 이탈리아 근처에 진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오면 꼭 '한니발이 북상하면 된다.'라는 말이 나올 텐데, 한니발이 북상하면 '그 능력치 딸리는'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한니발이 없는 상황에서 남부 이탈리아 전선을 유지나 할 수 있을까? 즉 '세개의 카르타고군단이 북이탈리아로 들어오는'순간 스페인에서 존버하면서 조금이라도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언 나갈 수 있었던 것을, 재앙으로 이끌어가는 거나 다를바 없다는 거다!

더해서, 스페인은 카르타고에서 해로로 지원이라도 해줄 수 있었지 북이탈리아는 그런 것도 없다. 카르타고측에서 그나마 한니발이 이탈리아 간 이후로 전황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 지원하려고 수를 쓰며 로마군 뚫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스페인의 산악지형 이용해 닥치고 존버하면서 들어온 로마군 몰아내는 것이었다.

한세기 후에 비리아투스가 보여줬듯이 스페인 산악지형은 게릴라전에 환상인 지형이다. 그런데도 왜 하스두르발을 비롯한 바르카 가문 장수들은 되도 안되는 회전을 걸어대서 병력을 공중에 날려버린 것일까? 이유야 간단하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있으니까. 형님인 한니발을 지원해줘야 하니까. 즉 바르카 가문의 세력이 강한 스페인으로써는 한니발이 이탈리에서 혼자 고생하는 걸 두고볼 수 없었으니 계속해서 방어하기 좋은 스페인에서 벗어나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고 그러다 병력 다 말아먹고 알아서 자멸한 것이다.

6. 변호

해당 작성자는 완전히 미래가 이렇게 전개될 거라는 if소설을 쓰고 있으나 이런 if 전개로는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반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나 이에 답한다면 스테일메이트가 되었다는 평은 내 평가가 아닌 리비우스 사료에 나오니 쓰기전에 혜안을 갖추기 위해 먼저 1차사료를 읽는게 좋다.

또한 위 글쓴이는 포에니 전쟁 초기 2만 전사대를 차출한 것으로 10년이 지난 시점까지 겔트족 물량 대부분이 남부에 묶여 있다는 가정을 하고있다. 허나 북부 이탈리아의 갈리아 세력은 아마존 부족 수준의 국력이 아니다. 예를들어 한니발이 북부에 있었을때 그가 한 마을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그때 갈리아인은 그 마을서만 5만명이 대응하러 나왔다. 갈리아인의 인적 동원력은 무시못할 수준으로 한니발이 2만명을 차출하였다하여 10년간 갈리아인의 물량 대부분이 남부에 있다 말할 수 없다.

또 시칠리아가 넘어갔으니 카르타고가 보급을 할 수 없다고 글쓴이는 주장하는데,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상실 이후 보급을 못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스페인에서 소멸시켰고, 이후 아프리카로 진입하여 군대를 보이는 족족 격파함으로서 카르타고가 물량을 뽑아 보낼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군사적 상실이 아니었으면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나 아님 남부 이탈리아로 물량을 투입하는 게 불가능할 리 없으니 스페인에서의 스키피오의 활약은 전체전황에 있어서도 매우 중대하였다.

저기 글쓴이가 말하는 시라쿠사 점령된 이후에 카르타고가 보급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카르타고 백여척 전투함은 시라쿠사 포위전때 시라쿠사인에게 식량을 보급하러 수시로 왔다갔다했으며 로마선단이 시칠리아에 멀쩡히 지켜보면서도 이들을 막지도 못했다. 또한 시라쿠사 점령이후 그 선단은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톰에가 로마 수비대 성채를 봉쇄하였다. 또 그 이후 시칠리아 점령 이후에도 저 북부 이탈리아까지 항해해 마고와 군대를 상륙시켰다. 그러므로 남부 한니발에 대한 보급이 불가능하다는 가정 또한 일방적인 가정일 뿐이다. 고대시대의 해상봉쇄 수준은 21세기 미국이 레이다 망을 가동시키는 스케일이 아니다.

또한 스페인에서 게릴라전이 왜 불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말할거라면굳이 한니발 형제들의 마음을 읽을 것 없다. 그들이 왜 떠날 수 밖에 없고, 또한 전투에서의 거듭된 패배로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지가 사료에 나와있으니까 그것을 읽으면 된다.

사료상 이들이 철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의 점령은 완벽하게 행정통치되는 상태가 아닌 카르타고나 로마가 그곳에서 힘을 과시하면 스페인의 부족들이 이들을 따르는 연맹체의 형태였다. 각 스페인 부족들은 부족장이 다스리고 있고 이 부족장들이 카르타고를 지지하면 카르타고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것이고, 또한 로마를 지지하면 로마가 스페인을 지배하게되는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한니발의 형제들이 스키피오에게 여러번 패배하자 이 부족장들은 모두 로마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카르타고 군은 스페인에서 보급을 받을 길이 없어지게된다. 이러면 게릴라전도 불가능하니 결국 떠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7. 비판


리비우스가 스테일메이트라고 한다고 해서 실제로 스테일메이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리비우스 자체도 당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사료에 쓰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로 인정된다면 폴리비오스가 '스키피오가 한니발보다 뛰어나다'라는 말도 사실로 인정되어야 하며, 리비우스의 뇌내망상인 '알렉산더가 동시대 로마에 쳐들어와도 로마가 쳐바름'이란 것도 사실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냥 사론일 뿐이며, 1세기 로마인들의 포에니 전쟁에 관한 대략적인 인식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구절일지는 몰라도 그것을 '실제 상황'에 대입하면 매우 곤란합니다.

또 1차 사료를 얼마나 읽고 그런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마추어 수준에서 한니발 전쟁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려면 Hoyos, Lazenby, Goldsworthy가 쓴 포에니 전쟁 관련 서적이나 Gabriel이 쓴 한니발 평전을 읽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정 1차 사료를 읽고 싶으면, 다른 저명한 학자가 덧붙인
코멘터리와 같이 읽도록 합시다. 학자들이 책 쓸 때 인용문에 1차사료만큼이나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이나 서적이 더 많은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리비우스가 스테일메이트라고 했다고 한다면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그런 언급을 했는지, 인용을 하던가 아니면 최소한 어디인지 표기라도 하길 바랍니다. 그냥 '리비우스가 한 말이다.'라고 하면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더해서 리비우스가 그런 말을 했든 안 했든 그것과는 별개로, 당시 스키피오가 노바 카르타고로 출정하기 전 했던 연설을 봐도 딱히 스키피오가 당시 정황이 백척간두의 위기, 또는 팽팽한 접전 상황이라고 인식한 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네이버 부흥 카페의 thwmunba님 번역)
이제 신들의 은혜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는 모든 일이 계속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나날이 더 좋아지고 있다.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와 아그리겐툼을 점령했고, 적을 온 섬에서 몰아냈다. 회복된 속주는 로마 인민의 지배 아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르피를 탈환하고 카푸아를 점령했다. 한니발은 온 도로를 가로지르며 로마로부터 도망쳐 구석진 땅 브루티움으로 도망갔고, 안전하게 적지를 떠날수만 있게 해 주십사 신들께 빌고 있다. (nunc benignitate deum omnia secunda prospera in dies laetiora ac meliora in Italia Siciliaque geruntur. in Sicilia Syracusae, Agrigentum captum, pulsi tota insula hostes, receptaque prouincia in dicionem populi Romani est. in Italia Arpi recepti, Capua capta. iter omne ab urbe Roma trepida fuga emensus Hannibal, in extremum angulum agri Bruttii compulsus nihil iam maius precatur deos quam ut incolumi cedere atque abire ex hostium terra liceat) Livy26.41.15~16

당사자인 스키피오가부터가 '모든 일이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나날이 더 좋아지고 있는' 순풍을 탄 상황이라고 하고 있는데, 도대체 스키피오가 등장 이전에 그 전세가 팽팽한 스테일메이트였다는 소리는 어떤 추론과정을 거쳐 나온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제 켈트족에 대해서 한번 논해봅시다. 변호하는 측에서는 "당시 전황은 로마인이 카푸아를 점령했긴 하였으나 한니발은 타렌톰을 점령함으로서 전선이 이탈리아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다. 또한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를 제압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는 로마가 그쪽의 물량을 동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물량을 투입해서 유지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렇듯 지중해 전역은 한니발과 그 동맹세력의 협력으로 인해 스테일메이트가 된 상황이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 글쓴이는 켈트족을 한니발의 '동맹세력'이라고 단정짓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켈트족은 한니발의 제대로 된 동맹이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한니발과 상관없이 언제나 해오던 로마와의 투쟁을 계속해온 것에 가까우며, 수많은 부족으로 분열되어 각자 움직였기에 단일화된 정치적 응집체도 아닙니다.

우선, 당시 갈리아 키살피나의 인구와 거기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부터 언급하고 넘어갑시다. 갈리아 키살피나의 당시 인구는 100만 정도로 보이는데(Brunt, Italian manpower) 이 정도라면 성인 남성은 약 30만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는, 전사들의 비율은 1:5정도일 바, 20만 정도의 동원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켈트인이 단합해서 한니발과 로마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면, 문제없이 북부 전선을 형성해 로마를 핀치로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라 보입니다.

당연히 그게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라는 것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현실은 냉혹하니, Bc218~217년을 기하여 한니발에 대한 켈트인들의 '적대감'이 고조됩니다. 한니발이 켈트인의 암살을 두려워해서 다른 언어를 쓰고 매일마다 변장했다는 기록도 있는 바(Poly 3.78.1~4) 그가 단일화된 실체로서의 '켈트인의 동맹'을 이끌어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켈트인들은 언제나 그렇듯 자기네들끼리 반목했으며, 게다가 '타국 군대'인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자신의 땅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바(Livy 22.1.1~4), 한니발은 결국 켈트족의 땅에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니발과 켈트족의 연합전선이 제대로 구축될 리가 없으며, 당시 동원 가능했던 20만 중 10% 이상을 (전사에 붙는 보조인원을 생각하고, 그들이 모두 남성일 것이므로) 한니발이 데려간 상황에서, 게다가 그들은 대다수 모험을 즐기기 위해 한니발에게 붙은 전사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한니발이 키살피나에서 징집해간 인원이 저항역량을 '상당부분' 잠식했다고 봐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갈리아족도 모두가 하나되어 로마에 대항한 게 아니라,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같은 초강경파가 주로 대로마전선을 이끌었고, 우호적인 부족들도 많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비율은 더욱 늘어납니다.

그 외에 조금 더 전략적인 면을 따져보기로 합시다.

켈트족은 안 그래도 분열된 상태에, 위에서 보다시피 한니발에 그리 우호적인 편도 아니었고 게다가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BC212년의 상황에, 그들이 과연 한니발과 제대로 된 협동작전을 펼칠 수 있을지를 고려해봐야 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로마는 내선을 점하고 있었기에 영토 내에서 자유로이 북쪽과 남쪽으로 병력을 전개시킬 수 있습니다. (집정관 네로의 사례는 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이는 병력이 분산되어서 서로 따로 노는 카르타고와 달리 엄청난 장점으로, 실제로 로마는 유능한 지휘관을 이 전선 저 전선 들락거리며 계속 굴린 데 비해, 카르타고는 유능한 지휘관도 없었지만 설사 유능한 지휘관이 있더라 하더라도 각 전선에 고립되어서 한니발처럼 혼자 악전고투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위에서 색깔 칠하기로만 판단하지 말라고 한 말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내선을 점하고 싸운 로마와 외선을 점하고 싸운 카르타고는 애초에 병력전개의 유동성 면에서, 지휘관의 교체라는 면에서, 전쟁 시작할 때부터 사실상 모두 지고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갈리아 전선에 있는 로마 장군A를 시칠리아 전선에 투입하는 게 쉬울까요, 아니면 히스파니아 전선에 있는 카르타고 장군A를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하는 게 쉬울까요? 애초에 한니발에 '보급을 해 줄 수 있다' 또는 '없다'를 따지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게, 지도만 봐도 로마는 보급이 가능한가 여부는 별로 신경도 안 쓰고 배로, 육로로 병력을 쭉쭉 잘만 전개시킨 데 비해, 한니발에게 보급 유무에 관한 논의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보급이 로마보다 훨씬 어려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명장 능력치로 결정되는 코에이 삼국지가 아니니, 카르타고가 전쟁에 진 근본적인 이유는 영토의 효율성 면에서, 동원력 면에서, 지휘관의 능력 면에서 모두 밀렸기 때문이고, 설사 한니발이 혼자 깡패짓을 해서 좀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았다 하더라도 그가 제우스도 아닌 이상 지형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니, 스테일메이트라는 소리를 하고 싶으면 로마나 카르타고나 지형적 조건이 같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하길 바랍니다. 리비우스의 대뇌망상을 팩트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마고의 예를 드셨는데, 한니발과 별 관련이 없습니다. 마고는 가데스->발레아레스(겨울숙영)->리구리아의 경로를 택한 거지 한니발이 있는 남부이탈리아의 해역과는 다른 해로를 통해서 포강 유역으로 진입한 것이기에, 한니발에 대한 보급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Livy 25.27, Livy 26.20에 나오는 보밀카르의 타렌툼 공격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보밀카르는 시라쿠사 해역을 통해 타렌툼으로 향한 것이지 카르타고에서 직항으로 타렌툼으로 진입한 것이 아니며, 그나마도 아직 카르타고의 교두보가 시칠리아에 존재할 때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현지인들의 비협조와 보급부족으로 후퇴해버린 극히 일시성 공격을, 상시적인 보급이 가능하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더해서, 비록 bc212년에 시라쿠사가 넘어갔지만 시칠리아 전선은 그걸로 정리된 게 아닙니다. 카르타고의 세력이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몰려나는 것은 bc210년의 일로, 그 전에는 아크라가스와 같은 도시가 카르타고의 교두보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시칠리아와 상관없이 보급이 가능했는가.'라는 논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bc210년 이후 남부 이탈리아 해역에서 카르타고 함대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예가 있습니까?

또한 '스페인에서의 스키피오의 활약이 전체전황에 있어서 중대하다'가 어떻게 '카르타고가 한니발에게 보급 못한 것은 스키피오 때문이다.'로 치환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스키피오 이전에는 어떻습니까? 현실에서 한니발이 본국으로부터 받은 지원은 bc215년에 함락한 로크리를 통한 4000명 남짓의 기병대 지원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시칠리아와 상관없이 보급이 가능했다면 왜 이전에는 이렇게 소극적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카르타고측의 대전략이 졸렬할 뿐 아니라 아무데나 찔러보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딱히 시칠리아가 넘어갔다고 해서 한니발에게 더 지원을 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칠리아에 더 많은 병력을 지원하면 지원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