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20:04:11

하이메 3세

파일:하이메 3세.jpg
이름 마요르카의 하이메 3세
Jaime III de Mallorca
출생 1315년 4월 5일
시칠리아 왕국 카타니아
사망 1349년 10월 25일 (향년 35세)
아라곤 왕국 류치마요르
아버지 마요르카의 페르난도
어머니 사브란의 이사벨
아내 아라곤의 콘스탄사, 발라라구트의 욜란다
자녀 하이메 4세, 이사벨, 에스클라문다
직위 마요르카 국왕, 후쓸리용 백작, 세르다뉴 백작, 몽펠리에 영주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마요르카 왕국의 국왕.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에게 축출된 뒤 잃어버린 왕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2. 생애

1315년 4월 5일 시칠리아 왕국의 항구 도시 카타니아에서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2세의 둘째 아들 페르난도와 앙수이 영주 이스나르의 딸이자 아카이아 공작 주장자인 사브란의 이사벨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며칠 만에 사망했고, 아버지 페르난도는 아내의 권한으로 아카이아 공국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면서 아들을 하이메 2세의 왕비이자 자기 어머니인 푸아의 에스클라몽드가 머물던 페르피냥으로 보내서 에스클라몽드가 아이를 양육하도록 했다. 1316년 7월 5일, 아버지 페르난도는 마놀라다 전투에서 아카이아 공작 루이 드 부르고뉴에게 참패해 전사했다. 이후 마요르카 국왕 산초 1세는 본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하이메 3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324년 산초가 사망한 후, 하이메 3세가 9살의 나이에 마요르카 국왕이 되었다. 이후 섭정으로 누굴 세울지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산초 1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인 펠리페는 수도사였기에 왕국을 이끌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고, 아라곤 국왕으로서 마요르카 왕국의 주권자를 자처하던 차이메 2세는 자신이 하이메 3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므로 섭정을 맡겠다고 주장했다. 하이메 2세의 아내 에스클라몽드의 가문인 푸아 가문은 이에 반발해 자신들이 섭정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1325년에 합의가 이뤄졌다. 섭정은 펠리페가 맡되, 하이메 3세는 아라곤 국왕 차이메 2세의 손녀이며 당시 3살이었던 콘스탄사와 약혼하기로 했다. 차이메 2세는 펠리페의 섭정을 인정하는 대가로 산초 1세가 샤르데냐 원정을 떠났을 때 아라곤 왕국이 군대를 원조해주면서 치른 비용을 지불하도록 했다. 마요르카 왕국의 재정은 이 때문에 빚더미에 짓눌렸다.

1331년, 당시 16살이었던 하이메 3세는 몽펠리에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335년애 성인으로 인정받고 친정을 실시했으며, 1336년 9월 24일 페르피냥에서 콘스탄사와 결혼했고, 1337년 궁정 체계를 규정한 팔라틴 법률을 공포했다. 1339년, 백년전쟁을 한창 치르던 필리프 6세는 하이메 3세의 아들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문을 듣고, 프랑스 왕국에 속한 몽펠리에의 영주가 잉글랜드 편을 들 것을 우려해 하이메 3세에게 몽펠리에 영주로서 경의를 다시 표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하라고 요구했다. 하이메 3세는 이에 대해 경의의 합법성이 의심된다며 교황청에게 문의하겠다고 답했다. 또한 그는 몽펠리에에서 마상창시합을 조직했는데, 이는 전시에 마상창시합을 금지한 필리프 6세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었다. 한편, 하이메 3세는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에 대한 경의 의식을 2번이나 연기하다가 1339년 그로부터 많은 양보를 받아낸 뒤에야 경의를 표했고, 아라곤 국왕의 지시에 불순종하곤 했다. 이렇듯 그는 마요르카 왕국의 주권자로 군림하는 프랑스와 마요르카로부터 독립하려 했고, 장차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을 기회를 노렸다.

1341년, 필리프 6세는 아들 장 왕자에게 마요르카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영지룰 점령할 군대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하이메 3세는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에게 "프랑스 왕국이 아라곤을 공격할 지도 모르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페로 4세는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논의하고 싶으니 바르셀로나로 출두하라고 명령했지만, 하이메 3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배상할 테니 침략하지 말아달라고 청했고,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1343년, 좀처럼 출두하지 않은 하이메 3세에게 반감을 품은 페로 4세는 자신이 하이메에 대한 군주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하이메 3세가 주조한 마요르카 금화가 후쓸리용(Roussillon), 세르다냐(Cerdagne)에 유통되는 것은 아라곤 국왕의 주화 독점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도시에서 마요르카 금화가 유통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아라곤 국왕이 허용한 관행이었기에 이는 억지였지만, 페로 4세는 이참에 마요르카 왕국이 독자적으로 주화를 생산하고 프랑스 왕국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부터 무역 특혜를 받는 등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상황을 근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6세가 개입해 마린 왕조와의 전쟁이 한창인데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싸우지 말라며, 바르셀로나에서 교황 특사가 주관한 바르셀로나 회의에 하이메 3세가 출두하라고 권고했다. 하이메 3세가 이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향하자, 페로 4세는 일부러 "하이메 왕이 페로 왕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하이메 3세는 페로가 이 소문을 빌미삼아 마요르카를 침공하려 들 것을 우려해 섬으로 돌아가 방어에 전념했다. 1343년 2월, 페로 4세는 교황 특사가 주관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 하이메 3세를 불충한 가신으로 단죄하며 그의 왕국과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선포했다. 1343년 5월, 알헤시라스를 봉쇄하던 아라곤 함대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마요르카에 상륙한 뒤 뒤이은 산타 폰사 전투에서 하이메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에 발레아레스 제도 전역이 아라곤 왕국에 복종했고, 페로 4세는 섬의 특권을 확인했다. 하이메 3세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고 교황 클레멘스 6세도 중재를 시도했지만, 페로 4세는 후쏠리용과 세르다냐를 마저 공략하기로 하고 듣지 않았다. 1344년 두 도시가 함락되자, 하이메 3세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마요르카는 아라곤 왕국의 직할지가 되었다.

하이메 3세는 퐁펠리에에 머물면서 마요르카 왕국을 되찾을 기회를 노렸다. 1349년 4월 18일, 그는 아비뇽에서 필리프 6세와 접견한 뒤 120,000 크라운을 받고 퐁펠리에 영지를 필리프 6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후 함대와 군대를 몽펠리에를 판 돈으로 모집한 뒤 마요르카 왕국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1349년 10월 25일 루치마요르 전투에서 페로 4세가 이끄는 아라곤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의 아들 하이메 4세는 생포된 뒤 바르셀로나로 끌려가 1362년까지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탈옥한 후 마요르카 왕국을 되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