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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0:33:32

필리포 마리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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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ippo Marinetti
파일:Filippo_Tommaso_Marinetti.jpg
본명 필리포 토마소 에밀리오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
출생 1876년 12월 22일
이집트 헤디브국 알렉산드리아
사망 1944년 12월 2일 (향년 67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벨라지오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가톨릭
직업 시인, 소설가
소속 소속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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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래파의 창시자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 기반을 두었으나 이탈리아로 자주 여행을 다녔으며 양국의 언어로 저술 활동을 하였다.

2. 생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초등교육을, 파리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밀라노의 이탈리아계 프랑스 잡지사에서 문필생활을 시작했으며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피가로(Le Figaro)>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 미래주의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그는 옛 문명의 전통과 미적 기준들을 폐기하고 이제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 이어져온 (신)고전주의적 가치와 도취의 댄디즘, 졸음에 빠진 데카당스를 조롱하며, 내연기관의 폭발적인 힘과 속도, 과거에 대한 격렬한 공격과 새로운 세계로의 ‘위험한 도약’을 찬미했다.

"이 땅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미래주의를 창립한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문명의 산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전위적인 선언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과격하고 소란스럽고 선동적인 선언을 세계로 내던졌다. 우리는 고고학자, 골동품 수집가들로부터 이 땅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오늘 미래주의를 창립한다.”

마리네티는 이탈리아가 오랫동안 헌 옷 입은 장사꾼 노릇을 해왔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무덤처럼 뒤덮고 있는 박물관들로부터 풀어주려고 한다.” 여기서 박물관은 ‘전통’을 상징한다.

이 운동의 취지는 과거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모든 해방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그의 사상은 이탈리아에서 금세 받아들여져 작가 알도 팔라체스키, 코라도 고보니, 아르뎅고 소피치 등과 같은 대표적인 제자들을 배출했다.

마리네티의 선언문은 또한 미래파 화가들의 지지를 얻어, 1910년 화가들은 독자적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 자코모 발라, 지노 세베리니와 같은 화가와 조각가들도 그의 사상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그가 제창한 미래파 운동은 문단에서보다 미술계, 특히 회화나 조각 분야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910년 2월 밀라노에서의 ‘미래파 화가 선언’, 동년 4월 ‘미래파 회화의 테크닉 선언’ 등이 그것이다.

파일:F.T Marinetti in the MVSN.png
마리네티가 MVSN에 몸담던 시절의 사진.

그는 무솔리니의 열렬한 지지자로 열성적인 파시즘 당원이 되었으며 〈미래주의와 파시즘 Futurismo e Fascismo〉(1924)을 써서 파시즘은 미래주의가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일시적으로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나, 1920년대에는 대부분의 추종자를 잃었으며 무솔리니의 집권 이후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미래주의 예술을 그저 두체의 선전적인 예술에만 쓰이길 원했으며 마리네티가 원했던 예술을 통한 해방엔 관심 자체가 없었다.

두체 미래주의를 교모히 없애려했지만 마리네티는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며 미래주의를 지키려하며 때로는 그의 부하처럼 행동하면서도 미래주의를 살리려 했지만 정부의 마음과 미래주의 예술의 조화는 미래주의의 가치 그 자체를 훼손하는 것이었기에 언제나 그의 작품은 덜 급진적이였고 덜 아방가르드적이 돼 버렸고 그런 시도 중에 제2차 세계 대전등에 참여하던 마리네티는 1944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복수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