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랑수아즈 질로 Françoise Gilo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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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11월 26일 |
프랑스 제3공화국 일드프랑스 오드센 뇌이쉬르센 | |
사망 | 2023년 6월 6일 (향년 101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직업 | 화가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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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파트너
파블로 피카소(1943년 - 1953년) 아들 클로드 피카소 딸 팔로마 피카소 배우자 조너스 소크(1970년 결혼) |
학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소르본 대학교 아카데미 줄리안 미술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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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화가.2. 생애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버지의 요구로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자국의 대학교인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다. 아들을 바랬던 아버지가 질로에게 남자아이의 옷을 입히고,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라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 일부인 서부전선이 발생하여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침공하자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카데미 줄리안 미술학교를 다녔다.그 유명한 스페인의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를 차버린 여성이었다. [1] 당시 질로는 20대, 피카소는 60대였다. 피카소는 당시 연인이었던 사진 작가인 도라 마르와 옆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질로를 발견한 피카소는 체리를 들고 다가왔고, 질로가 화가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초대했으며, 두 사람 다 화가이기도 해서 미술로 친해졌고,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피카소는 질로를 두고 "저렇게 아름답게 생긴 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피카소와 10년 넘게 함께 지내며 슬하에 딸과 아들도 두면서 삶을 보냈지만, 결국 파국을 맞았다. 피카소가 질로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지인이었던 주느비에브 라포르트와 만난 사실을 알게 된 질로는 이별을 결심하였고, 이별을 고하자 피카소는 "나 같은 남자를 떠나는 여자는 없다"며 격분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불을 붙인 담배를 질로의 뺨에 갖다 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자 질로는 피카소에게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 후에 질로가 피카소에게 한 말은 명언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후 피카소가 의도적으로 파리 유명 인물들에게 압력을 넣어 질로가 작품 활동을 못 하게 하자, 질로는 미국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고, 이후 화가로서 승승장구했다.
피카소와 헤어진 뒤인 1955년에 연인이었던 예술가 뤽 시몽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이혼 후에는 미국 세균학자이자 소아마비 백신 연구원이었던 조너스 소크와 재혼하기도 했다.
[1]
질로 외에도 올가 코를로바가 피카소의 엽색 행각에 차버리긴 했으나, 이 둘은 결혼 상태였고 피카소가 이혼을 안 해준지라 올가가 죽을때까지 결혼 상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