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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9:54:32

프랑수아즈 아르디

<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랑수아즈 아르디
Françoise Hardy
파일:Francoise-Hardy-My-life-has-become-a-nightmare-Arts.jpgwidth1200typejpeg-1024x607.jpg
본명 프랑수아즈 마들렌 아르디
Françoise Madeleine Hardy
출생 1944년 1월 17일 ([age(1944-01-17)]세)
일드프랑스 파리
장르 프렌치 팝, 샹송, 예예, 바로크 팝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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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태생의 지성파 싱어송라이터, 모델, 배우, 작가. 현대 프렌치팝의 뿌리 중 하나인 예-예(Yé-yé) 장르를 샹송과 결합해서 대중에게 각인시킨 장본인이다.

20세기 프랑스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전성기였던 1960년대부터 21세기까지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 생애

파일:Francoise-Hardy-jeune-1.png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젊은 시절
파리 9구에서 출생한 그녀는 어린 시절 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여러 로큰롤 아티스트들을 접하면서 꿈을 키워왔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혼란한 프랑스 상황과 부모간의 양육권 분쟁으로 인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16살의 나이에 작사 작곡을 하고 바칼로레아를 통과해서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는 등 학업과 음악 양쪽에서 조숙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후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파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디션을 봤고, 1961년부터 아르디의 재능에 일찌감치 주목한 사운드 엔지니어 앙드레 베르노(André Bernot)에 의해 발굴되어 여러 곡들을 녹음했다. 1962년 발매한 Tous les garçons et les filles는 아르디를 본격적으로 프랑스 내에서 인기 스타로 만들어준 곡이었으며, 발매 직후 프랑스는 물론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으며 브릿팝과 로큰롤의 영향을 받은 예 예(Yé-yé) 음악뿐만 아니라 샹송 장르에서도 주목받는 뮤지션으로써 부상했다.

가수로서 60년대 초에 이미 최고의 인기를 얻은 프랑수아즈 아르디였지만, 다른 샹송 뮤지션들, 특히 여성 아이돌적인 면이 강했던 다른 예-예 여성 가수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녀의 초기 음악들은 샤를 트르네, 자크 브렐, 바르바라 등의 샹송 뮤지션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아직 나의 예술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으며,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에벌리 브라더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취향의 소유자이다. 이후에는 172cm의 훤칠한 키와 지적이며 세련된 외모가 자아내는 특유의 중성적인 매력을 살려 모델로도 활동하면서 "L'amour s'en va", "Je veux qu'il revienne", "La maison où j'ai grandi" 등의 곡을 히트시켰고, 단순한 아이돌 가수를 넘어서 프랑스 문화계를 상징하는 뮤즈이자 아이콘으로 각광을 받는다.

1968년 발매된 Comment te dire adieu 앨범에 실린 동명곡 Comment te dire adieu는 영국 가수 마거릿 화이팅이 부른 1950년대풍의 발라드곡 <It Hurts To Say Goodbye>의 연주 버전을 기반으로 세르주 갱스부르가 프랑스어 가사를 붙여준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까지도 아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발매 직후 프랑스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디오르의 TV 광고에 채용되면서 전세계적으로도 크게 히트했다.

1971년 발매한 음반인 La question은 아르디의 음악 스타일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이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음악이 아닌, 보사노바, 챔버 포크 적인 면을 더하며 더욱 작품적인 면에서 접근하려 했던 작품이며, 이러한 시도는 당시 발매 직후에도 상업적인 성과는 크게 거두지 못했으나 비평계에서 "프랑수아즈 아르디가 더욱 성숙해졌음을 알리는 앨범"이라 평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르디 본인에게도 이 음반을 "자신에게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앨범"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자신의 음악 커리어에 있어 각별한 작품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음반은 현재까지도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현재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는 동안 그녀는 동료 뮤지션이자 배우인 자크 뒤트롱과 오랜 연애를 했으며, 1973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토마 뒤트롱 역시 프랑스 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뮤지션이다. 그녀는 자크 뒤트롱과 오랫동안 동거 관계를 유지하다가 1981년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1], 1988년 자크 뒤트롱의 알코올 중독 문제와 불륜 문제로 인해 헤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법적으로는 결혼한 상태라고 하며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2010년대 인터뷰에서도 "자크 뒤트롱은 새로운 여자가 있으나, 그와 이혼을 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인터뷰하며 법적 결혼 상태를 유지할 것임을 다시 한번 말한 바 있다.

이후 21세기까지도 꾸준한 앨범 발매를 하며 음악 생활을 이어갔던 아르디지만, 후두암의 여파로 2012년 발매한 27집 정규 앨범 L'Amour fou 이후로 뮤지션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은퇴를 번복하며 2018년 28집 Personne d'autre을 발매했다.

2021년, 그녀는 암 치료 후유증으로 인해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정말 은퇴를 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전에도 건강상 문제로 은퇴를 했다가 다시 복귀한 바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재복귀를 기다리는 의견도 많으나, 그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은 확실하기 때문에 그녀가 다시 복귀할지는 미지수이다.

3. 여담



[1] 원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세금 문제 때문에 결혼했다고 한다. [2] 물론 저 시기 앨범들 중에서도 "Ma jeunesse fout le camp..." 등의 공식 제목이 있는 앨범들이 있었기는 했으나 소수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