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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6대 샤한샤 𐭐𐭓𐭇𐭕 | 프라아테스 2세 |
||
제호 | 한국어 | 프라아테스 2세 |
파르티아어 | 𐭐𐭓𐭇𐭕 | |
영어 | Phraates 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127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32년 ~ 기원전 1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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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6대 샤한샤.안티오코스 7세의 침공으로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가 간신히 격파했으나, 뒤이은 사카족의 침략에 맞서던 중 전사했다.
2. 생애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던 미트리다테스 1세와 리누(Ri-'nu)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13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리누가 섭정을 맡았다. 기원전 131년 3월,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7세가 미트리다테스 1세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파르티아와 3차례 맞붙어 모두 승리했고, 유프라테스 강 일대를 평정한 뒤 바빌론을 탈환했다. 당시 파르티아는 북부 영토를 수시로 습격해오는 유목민족을 막느라 주력군을 그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안티오코스 7세의 공세에 전력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파르티아 군주 프라아테스 2세는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7세가 제시한 조건[1]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 기원전 130년, 안티오코스 7세는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티그리스 강을 건너 제국의 옛 수도 수사를 탈환하고, 뒤이어 메디아 일대를 평정했다.
프라아테스 2세는 북부 영토를 습격해오는 유목민족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반격할 기회를 노렸다. 데메트리오스 2세를 석방시켜 안티오코스 7세에 대항해 내전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한편, 적군이 파르티아 심장부에서 겨울 동안 주둔하면서 민중과 갈등을 빛는 걸 지켜봤다. 기원전 129년 2월 또는 3월, 파르티아 주민들이 봉기하여 마을에 주둔한 셀레우코스 장병들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티코오스 7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소규모 기병대만 이끌고 달려갔다. 프라아테스 2세는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그가 병사들을 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엑바타나의 좁은 계곡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얼마 후 병사들을 구출한 뒤 숙영지에 귀환하던 안티오코스 7세는 매복공격을 받았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친구들은 일단 후퇴하여 목숨을 보전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와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는 격렬하게 싸우다가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목숨을 끊었다고 기술했다. 이리하여 무너져가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회생시킬 명군이 될 수 있었던 안티오코스 7세는 허망하게 죽었다.
안티오코스 7세의 일행 중에는 데메트리오스 2세의 자녀들도 있었다. 프라아테스 2세는 이중 데메트리오스 2세의 딸 라오디케와 결혼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을 침공할 준비를 했으나, 동방 전선에서 사카족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파괴한 뒤 기원전 127년 파르티아로 쳐들어왔다. 프라아테스 2세는 히메로스를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한 후 동부 전선으로 달려가서 사카족과 교전했다. 이때 포로로 잡았던 셀레우코스 군인들을 보병으로 기용했는데, 이들이 왕을 위해 싸우길 거부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는 전장에서 죽었다. 사후 삼촌이었던 아르타바노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