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토스 왕에 대한 내용은 미트리다테스 5세(폰토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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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37대 샤한샤 𐭌𐭄𐭓𐭃𐭕 | 미트리다테스 5세 |
||
제호 | 한국어 | 미트리다테스 5세 |
파르티아어 | 𐭌𐭄𐭓𐭃𐭕 | |
영어 | Mithridates V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140년 | |
재위 기간 | 129년 ~ 1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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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37대 샤한샤.로마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인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며, 오스로에스 1세의 몰락 이후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해 볼로가세스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2. 생애
오스로에스 1세의 형제 또는 친척으로 추정된다. 116년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이 파르티아로 쳐들어와서 바빌론, 크테시폰, 셀레우키아 등을 공략하고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렀다.(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사막 지역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트라야누스는 당초 파르티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삼으려 했지만, 저항이 워낙 극심했기에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샤한샤로 옹립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후방이 위험해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고, 오스로에스 1세는 이 틈을 타 117년 크테시폰에 돌아와서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축출했다.129년 파르티아의 동방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볼로가세스 3세가 쳐들어와 크테시폰을 공략했고, 오스로에스 1세는 사망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5세가 엑타바나에서 자신의 동전을 주조하며 반기를 들었다. 140년 이후 그의 동전이 더 이상 주조되지 않은 걸 볼 때 이 즈음에 볼로가세스 3세에게 폐위되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의 아들 볼로가세스 4세가 볼로가세스 3세 사후 샤한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