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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5 14:42:01

펩 과르디올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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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2.1. FC 바르셀로나 (1991~2001)2.2. 세리에 A (2001~2003)2.3. 중동, 멕시코 (2003~2006)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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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펩 과르디올라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현역 선수 시절 외국인 용병 4인방과 바스크 4인방 등 외인들로 구성된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에서 팀 내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 출신 주전과 주장으로 활약하며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른 노쇠화와 잦은 부상으로 30세의 이른 나이에 바르셀로나를 떠난 이후 세리에 A와 중동의 여러 클럽을 전전했으나 부진과 부상, 약물복용 징계가 겹치며 상당히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2. 클럽

2.1. FC 바르셀로나 (1991~2001)

주요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비록 원 클럽 맨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이자 바르셀로나 성골 중의 성골이다. 카탈루냐 출생으로, 외국인과 바스크 선수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팀에서 주전 중에서 사실상 유일한 카탈루냐 출신 선수였다.

바르셀로나의 유스 팀에서 성장했고, 바르셀로나 B팀에서 활동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A팀의 감독은 팀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는 주젭 유이스 누녜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바르셀로나에 부임한지 1년 만에 베스트 11을 모두 물갈이할 정도로 완전히 갈아엎었지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초기 2년여 동안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크루이프가 기존 멤버들을 전부 내보내면서 카탈루냐 출신의 레전드를 포함한 기존 선수들은 전부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성적이 나오지 않자 크루이프를 향한 바르사 팬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팀의 주전 전원이 외국인과 바스크인으로 채워지자 카탈루냐 팬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불만을 가라앉히고 바르셀로나 팀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전 중에 한 명이라도 카탈루냐 순혈 출신의 선수를 기용해야만 했고 이때 크루이프에게 간택된 이가 바로 과르디올라였다.

기예르모 아모르가 장기 부상을 당하자 크루이프는 B팀에 있던 과르디올라를 1군에 콜업되어 1990년 12월 16일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요한 크루이프는 조교처럼 활용하던 로날드 쿠만에게 펩한테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치라고 지시하였고, 펩은 쿠만을 통해 오늘날 티키타카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식 축구를 익혔다. (크루이프는 자신이 추구하던 축구를 항상 네덜란드식 축구라고 불렀고, 바르셀로나 축구라 부른 적이 없었다. 미헬스 감독 시절을 제외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런 축구를 구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 1군 데뷔 이후 곧바로 1군에서 자리잡진 못했고, 해당시즌 1군에서 총 4경기 출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1군에서 기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1-92 시즌부터였는데, 1991-92 시즌에도 바르셀로나 B에서 9경기를 출장하는 등 한동안 1,2군을 왔다갔다했다. 다만 유러피언컵에서는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하였다. 특히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도 선발로 나와 113분을 뛰고 교체되었지만 팀은 우승을 달성하였다. 이렇게 1군에 승격했던 그 시즌에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크루이프와 외국인 스타 플레이어들 간의 갈등으로 1993-94 시즌 후반 팀 케미가 박살나 버렸다. 바르셀로나는 1993-94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지만 라우드럽과 크루이프의 갈등이 최악으로 치달았고 라우드럽이 관람석에 앉아 있는 가운데 진행된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는 AC 밀란에 0:4로 참패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차 타이 기록이다. 이 경기에서 과르디올라는 참담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이며 AC 밀란 공격진에게 농락당했다.

1994-95 시즌 크루이프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불화로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쿠만,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주요 멤버들이 전부 자의반 타의반으로 타팀으로 이적했다. 바스크 4인방 역시 전성기가 지나 차례로 팀을 떠났다. 이렇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과르디올라를 제외하고 모두 떠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고, 1996년에는 크루이프 감독마저 경질되었다.

바르셀로나는 2시즌간 암흑기를 거친 후 1996년 크루이프를 경질하고 바비 롭슨 감독을 새로 부임하면서 다시 호나우두, 엔리케,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등을 차례로 영입하며 팀을 재편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물갈이 되었고, 1기 드림팀 시절부터 남아있던 선수는 펩이 거의 유일했던 덕분에 주장을 맡기도 했다.

크루이프의 지도 하에 바르셀로나의 황금기에서 활약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라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포지션이기도 했고, 90년대 바르셀로나에 워낙 기라성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많았기에 해외의 많은 문서를 찾아봐도 과르디올라의 현역 시절의 활약에 대한 문서는 의외로 없으며, 대부분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호나우두, 피구 등 팀내 스타들의 활약상을 이야기할 때 그 팀메이트 중 한 사람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함께 클럽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힌다.

팀내 주전 중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사실 당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에는 미카엘 라우드루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등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스페인 국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호세 마리 바케로,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바스크 4인방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다. 과르디올라는 이런 숱한 스타플레이들에 비하면 그라운드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언제나 펩이었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이 1994년 불화로 완전히 와해된 후 잠시 암흑기를 거쳐 90년대 후반 다시 재정비하고 부활했지만, 그때도 팀을 이끌었던 선수는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등 외인들이었다.

10시즌간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후 2001년 세리에A 브레시아로 이적한다. 펩이 활동하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여섯 번 라리가 우승,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한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두었다.

2.2. 세리에 A (2001~2003)

바르셀로나 이후 펩의 선수 시절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외지의 클럽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 카타르 시절을 제외하면 몸 담은 팀마다 벤치를 달구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고, 이탈리아에서 도핑에 적발되어 약물 복용으로 출장금지를 당하고 이에 대한 소송전을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갔다.

펩은 FC 바르셀로나에서 10시즌(1991~2001)만을 뛰고 이적한다. 이때 펩의 나이는 고작 30세의 한참 젊은 나이였지만 일찍 노쇠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게다가 잔부상도 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2000-01시즌이 끝나고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알렸고 이에 펩과 그의 에이전트는 이적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후의 행보는 의혹 투성이다. 당시 기사를 보면 위에 적혀 있는 어느 구단에서도 과르디올라를 영입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2000-01시즌이 끝나고 바르셀로나 수뇌부에서 더 이상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알렸고, 과르디올라는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적하겠다고 발표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세일즈했다. 하지만 당시 기사에 따르면 그에게 접근한 빅클럽은 없었고, 오히려 과르디올라 본인이 여러 구단에 자신의 영입을 타진하며 영업을 했다. 그 중에는 뉴캐슬도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을 역임했던 바비 롭슨 감독과의 인연을 이용하여 뉴캐슬에 입단을 적극적으로 타진했지만, 뉴캐슬 측은 현재 미드필더 자리에 펩의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단칼에 정중히 거절했다. #

결국 빅클럽과 연결되고 있다는 언플과 달리 실제로 이적한 팀은 전년도에 세리에 B에서 A로 승격한 만년 2~3부 리그 팀인 브레시아 칼초였다. 브레시아 칼초는 팀 역사의 대부분을 세리에 B 혹은 C에 머물던 팀이었으나, 펩을 영입하기 직전 시즌에 세리에 A로 승격하며 노장 로베르토 바조를 깜짝 영입해서 화제를 모은 팀이었다. 당시 바조는 해외 몇몇 빅클럽의 이적 제안을 받았지만 한일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세리에A에서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브레시아 칼초에 입단했었다. 바조의 원맨쇼로 브레시아 칼초는 1군에 승격하자마자 중위권으로 도약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바조 영입 효과를 톡톡히 본 브레시아는 이듬해 펩을 영입하여 후방을 보강하려 했다.

하지만 펩은 브레시아에서 실질적으로 3개월 밖에 뛰지 못하고 먹튀로 전락했다. 그는 2001년 11월 소변에서 금지약물인 난드롤론(스테로이드)가 검출되며 약물 복용으로 기소되어 4개월간 출전 금지를 당했다. 11월 21일 피아첸차전을 마치고 도핑 테스트에서 처음으로 약물이 적발되었는데, 직후 과르디올라는 "영양제를 섭취하긴했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없다"며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29일 라치오전을 마치고 다시 도핑에서 같은 약물이 검출되면서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 출전 금지 처분으로 2002년 상반기에 출장하지 못하며 이적할 때까지 반시즌을 통으로 쉬게 되었다.

이후 펩은 바르셀로나 B팀 감독이 된 후 항소했지만, 항소에서도 그의 약물 복용 혐의가 인정되었다. 그러다가 펩이 바르셀로나 A팀 감독이 된 후에야 무죄 처리되었다. 법원이 뒤늦게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과르디올라의 결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르디올라가 결백할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선수 시절의 약물 복용 문제가, 상식적으로 너무나 긴 시간인 무려 7년 6개월이 지나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어서야 무혐의 처리되었기 때문에 많은 의혹이 있다. 반도핑기구의 디렉터는 샘플자체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즉 약물을 하지 않았지만 오진이 나올 가능성)은 1/1000~1/10000 사이에 불과하며, 펩은 네번의 검사에서 모두 양성이 나왔으므로 확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도핑 테스트에서 오진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무결하게 확신할 수 없으며, 때문에 펩의 약물 복용을 완전무결하게 입증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아래에도 나오듯 9나노그램 미만의 약물은 체내에서도 자체적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당시 펩의 약물 샘플에서 검출된 난드롤론은 2나노그램이었기 때문에 펩의 몸에서 검출된 난드롤론이 자체 생성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2002년 여름 펩은 다시 세리에 내에서 AS 로마로 이적하여 또 한 시즌만 뛰고 이적했다. 로마는 2000-01 우승, 2001-02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펩이 온 2002-03 시즌에 8위로 추락하게 된다. 그는 로마에서 2002-03 한 시즌을 뛰었는데, 사실 로마에서 펩은 완전히 벤치 멤버였다. 리그는 펩은 단 4회만 출장하게 된다. 로마 올드팬들이 최악의 영입에 펩을 꼽기도 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그의 로마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는 아예 펩을 포기했고, 결국 몇 달을 다시 브레시아에서 뛰게 된다. 브레시아도 10위로 리그를 마감한다.

펩과 AS 로마에 관한 재미 있는 인터뷰가 있다. 2014-15 챔피언스리그에서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이 AS 로마와 조별 리그에서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AS 로마와의 조별 예선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과르디올라는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를 언급하며, "나와 현역 시절을 함께 했던 토티가 여전히 경기를 뛴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내일 경기에서 그는 그라운드에, 나는 벤치에 있을 것이다. 내가 AS 로마의 선수였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라는 나름의 자학성 멘트를 남겼다.

2.3. 중동, 멕시코 (2003~2006)

세리에A 팬들의 비난을 뒤로 하고 펩이 이적한 곳은 축구 선수들의 은퇴지인 중동 리그이다. 펩이 중동으로 이적했을 때의 나이는 의외로 32세에 불과했다.

그가 이적한 곳은 카타르의 알 아흘리였다. 이번에도 세리에를 떠났을 때 맨유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카타르 리그에 있을 때 맨유, 맨시티, 첼시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 리그에 머무른다[1][2]는 물론 펩 팬들의 언플이다. 실제로 정식으로 오퍼한 팀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펩이 위의 오퍼를 거절하고 카타르로 간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카타르 알 아흘리로 이적하고 나서 그 곳에서 2003-04, 2004-05 두 시즌을 뛰었다. 카타르에서 그는 세리에에서와는 달리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알 아흘리에서 첫 시즌인 2003-04 시즌, 팀은 리그 10팀 중 4위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4-05 시즌 10팀 중 8위로 추락했다. 성적

알 아흘리에 있을 때, 펩은 약물 복용 혐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징역 7개월을 선고받는다. 2005년 약물 복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보류되었고, 2007년 B팀 감독으로서 항소한 후에는 혐의만 남은 채 징역형은 말소된다. 그리고 2009년에서야 그의 약물 복용이 무혐의로 처리된다. 기욤 발라그가 쓴 펩 과르디올라 전기에 따르면 인간은 9나노그램 이하의 약물을 체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펩에게서 검출된 난드롤론은 2나노그램 이하였기 때문에 이 연구 결과에 따라 무죄가 확정되었다.

카타르 알 아흘리에서 두번째 시즌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펩은 멕시코로 이적했다. 멕시코로 이적했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가 이적한 팀은 멕시코에서 지금은 2부 리그 팀인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였다. 2006시즌,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더구나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많이 출장하지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이적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은퇴하였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Axocopan의 학교에 다니며 지도자 공부를 하기도 했다.

3. 국가대표

바르셀로나 레전드라는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경력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국가대표로 47경기에 나섰으니 아주 적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나선 경기의 대부분은 전력 테스트 성격의 친선전 혹은 지역 예선 경기였다. 막상 메이저 대회 때는 대부분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주전으로 메이저 대회에 출전한 것은 유로 2000이 유일했고 그외에 1994 월드컵에서 교체 멤버로 활약한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대회 때는 대표팀에 전혀 선발되지 못했다. 월드컵에는 통산 2경기(144분) 출장하였으며, 유로에서는 통산 4경기에 출장했다.

유로 1992 때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지 않았고 U-23 대표에 머물렀다.

유로가 끝난 직후인 1992년 10월 북아일랜드전에서 처음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 대표팀 엔트리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93-94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보인 실망스러운 경기력 때문인지 94 월드컵에서 과르디올라는 주전으로 기용되지 못했고 교체 멤버로 조별 예선에서 기용되었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토너먼트에서는 출장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조별예선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 볼리비아, 한국과 같은 조가 되었다. 조별 예선 중 독일전과 볼리비아전 2경기에 출장하였으며, 모두 교체 아웃되었다. 볼리비아전에서는 선취골을 넣기도 했으나 후반 23분 조기 교체되었다. 토너먼트로 올라가고 나서는 한번도 투입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되었다.

유로 1996에서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다.

유로 2000은 펩 과르디올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뛴 메이저 대회였다. 조별리그 2경기, 8강전을 풀타임으로 뛰었다. 스페인은 8강전에서 프랑스한테 1:2로 패했다.[3]

2001년에도 친선전에서 대표팀에 자주 승선했으나, 31세에 맞이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으며,[4] 이후에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대표팀을 은퇴하게 되었다.

일부 국내 문서에는 과르디올라가 스페인 국가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초에 과르디올라가 메이저 대회에 주전으로 나선 적이 유로 2000 밖에 없었거니와 유로 2000에서도 주장은 페르난도 이에로였다. 위키피디아의 역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리스트에도 과르디올라의 이름은 없다. 과르디올라가 현역이던 시절 스페인 국대 주장은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레알 마드리드), 호세 마리 바케로(바르셀로나), 안도니 수비사레타(바르셀로나), 페르난도 이에로(레알 마드리드), 라울(레알 마드리드)로 이어진다. 이중에서 바케로와 수비사레타는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 드림팀 멤버였다. 이들이 오랫동안 스페인 국대에서 주장을 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르셀로나에서도 과르디올라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바스크 출신이었고,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는 과르디올라보다 레전드 대접을 못받고 있다. 같은 시대 외국인 용병으로 대활약했던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도 마찬가지.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동했는데, 1995년에 처음 데뷔하여 2005년까지 통산 7경기에 출장했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 전에는 U-23 대표팀 시절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자국에서 개최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은 전승으로 결승에 올라 결승전에서 폴란드를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1] 맨시티는 이 당시 펩에게 입단 테스트까지 제의했었고 맨시티 홈경기에서도 관전하는 모습도 보이는 등 영입이 가까워보였지만 펩 본인이 도무지 선수로서 뛸 몸 상태가 아니였기에 당시 스튜어트 피어스 감독은 결국 오퍼를 취소했다. [2] 나중에 맨시티에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돌아온 펩에게 이 때의 앙심이 있냐는 질문에 본인도 몸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피어스 감독의 결정을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3] 대회가 끝난 후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된다. [4]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도 과르디올라를 뽑고자 생각했지만 약물파동으로 출전이 정지된 상황이라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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