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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펩 과르디올라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현역 선수 시절 외국인 용병 4인방과 바스크 4인방 등 외인들로 구성된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에서 팀 내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 출신 주전과 주장으로 활약하며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른 노쇠화와 잦은 부상으로 30세의 이른 나이에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그 후 세리에 A와 중동의 여러 클럽을 전전했으나 부진과 부상이 겹치며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고 그 직후부터 지도자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2. 클럽
2.1. FC 바르셀로나 (1991~2001)
파일:external/www.mancity.com/a%20pep%20dream%20team%20barca.jpg |
1992년 유러피언컵 결승전 |
바르셀로나 선수 시절 |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비록 원 클럽 맨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이자 바르셀로나 성골 중의 성골이다. 카탈루냐 출생으로, 외국인과 바스크 선수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팀에서 주전 중에서 사실상 유일한 카탈루냐 출신 선수였다.
바르셀로나의 유스 팀에서 성장했고, 바르셀로나 B팀에서 활동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A팀의 감독은 팀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는 주젭 유이스 누녜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바르셀로나에 부임한지 1년 만에 베스트 11을 모두 물갈이할 정도로 완전히 갈아엎었지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초기 2년여 동안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크루이프가 기존 멤버들을 전부 내보내면서 카탈루냐 출신의 레전드를 포함한 기존 선수들은 전부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성적이 나오지 않자 크루이프를 향한 바르사 팬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팀의 주전 전원이 외국인과 바스크인으로 채워지자 카탈루냐 팬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불만을 가라앉히고 바르셀로나 팀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카탈루냐 순혈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를 길러내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과제였고 이때 크루이프에게 간택된 이가 바로 과르디올라였다.
기예르모 아모르가 장기 부상을 당하자 크루이프는 B팀에 있던 과르디올라를 곧바로 1군에 콜업하여 1990년 12월 16일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요한 크루이프는 조교처럼 활용하던 로날드 쿠만에게 펩한테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치라고 지시하였고, 펩은 쿠만을 통해 오늘날 티키타카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식 축구를 익혔다. (크루이프는 자신이 추구하던 축구를 항상 네덜란드식 축구라고 불렀고, 이를 바르셀로나의 핵심 철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이전까지 미헬스 감독 시절을 제외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런 축구를 구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군 데뷔 이후 곧바로 1군에서 자리잡진 못했고, 첫 등장한 데뷔 시즌에는 1군에서 총 4경기 출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1군에서 기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로 데뷔 2년차를 맞이한 1991-92 시즌부터였는데, 1991-92 시즌에도 바르셀로나 B에서 9경기를 출장하는 등 한동안 1, 2군을 왔다갔다했다. 다만 유러피언컵에서는 핵심 주전으로서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하였다. 특히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도 선발로 나와 연장전까지 총 113분을 뛰었고 팀은 우승을 달성하였다.[1] 이렇게 1군에 승격했던 그 시즌에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후 바르셀로나는 감독 크루이프와 외국인 스타플레이어들 간의 갈등으로 1993-94 시즌 후반 팀 케미가 박살나 버렸다. 바르셀로나는 1993-94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지만 라우드럽과 크루이프의 갈등이 최악으로 치달았고 라우드럽이 관중석에 앉아 있는 가운데 진행된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는 AC 밀란에 0:4로 참패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차 타이 기록이다. 이 경기에서도 과르디올라는 선발 출전했으나 팀 전체가 AC 밀란의 빗장수비에 잠식당하며 대패하고 말았다.
1994-95 시즌 크루이프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불화로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쿠만,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주요 멤버들이 전부 자의반 타의반으로 타팀으로 이적했다. 바스크 4인방 역시 전성기가 지나 차례로 팀을 떠났다. 이렇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과르디올라를 제외하고 모든 핵심 선수들이 떠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고, 1996년에는 크루이프 감독마저 경질되었다.
그 와중에도 펩은 바르사의 마지막 버팀목으로서 꿋꿋이 팀을 지키며 바르셀로나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바르셀로나는 2시즌간 암흑기를 거친 후 1996년 크루이프를 경질하고 바비 롭슨 감독을 새로 부임하면서 다시 호나우두, 엔리케,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등을 차례로 영입하며 팀을 재편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물갈이 되었고, 1기 드림팀 시절부터 남아있던 선수는 펩이 거의 유일했던 덕분에 선수 시절부터 바르셀로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지금 역시도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함께 바르사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에 펩이 감독으로서 쌓은 후덜덜한 업적까지 생각하면 리오넬 메시,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FC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역대 최고 레전드 3인방으로 꼽을 수 있을듯.
펩의 전성기 시절에는 팀내 주전 중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사실 당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에는 미카엘 라우드루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등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스페인 국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호세 마리 바케로,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바스크 4인방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다. 과르디올라는 이런 숱한 스타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비교적 조용하고 수더분한 타입의 선수였지만,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언제나 펩이었다. 뛰어난 축구 실력과 순혈 출신에 미남형 얼굴, 신사적인 플레이 등의 모습으로 팬들의 사랑의 받으며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중축으로 활약했다. 이후 크루이프의 드림팀이 1994년 불화로 완전히 와해된 후 잠시 암흑기를 거쳐 90년대 후반 다시 재정비하고 부활했지만, 그때 팀을 이끌었던 선수는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등 외인들이었다.
펩은 10시즌간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후 2001년 세리에A 브레시아로 이적하게 된다. 펩의 현역 시절 동안 바르셀로나는 무려 여섯 번의 프리메라리가 우승,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한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두었다.
2.2. 세리에 A (2001~2003)
바르셀로나 이후 펩의 선수 시절은 상당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외지의 클럽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 카타르 시절을 제외하면 몸 담은 팀마다 적은 출장시간을 기록하며 어느샌가 점점 잊혀지게 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약물 복용 혐의로 고발되어 출장금지를 당하고, 펩 본인이 이에 대해 극구 결백을 호소하며 소송전을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간 끝에 선수 생활 은퇴 후 감독이 되어서야 무혐의를 받아냈다.펩은 FC 바르셀로나에서 10시즌(1991~2001)을 뛰고 떠나게 된다. 이때 당시 펩의 나이는 고작 만 30세의 한참 창창한 나이였지만 부상 등의 문제로 전성기 시절에 비해 노쇠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바르사 코칭 스태프 내에서도 세대교체를 모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2000-01시즌이 끝나고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알렸고 이에 펩과 그의 에이전트는 이적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후의 행보는 꽤나 파란만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펩이 마주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2000-01시즌이 끝나고 바르셀로나 수뇌부에서 더 이상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알렸고, 과르디올라는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적하겠다고 발표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세일즈했다. 하지만 당시 기사에 따르면 펩의 고질적인 유리몸 때문인지 그에게 주전자리를 보장하며 영입의사를 타진한 빅클럽은 없었고, 오히려 과르디올라 본인이 아스날 FC 입단을 희망하며 아르센 벵거를 직접 찾아가는 등 여러 구단에 자신의 영입을 타진하며 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뉴캐슬도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을 역임했던 바비 롭슨 감독과의 인연으로 뉴캐슬 입단에도 어느 정도 가까웠지만, 뉴캐슬 측은 펩에게 주전 미드필더 자리를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
결국 빅클럽과 연결되고 있다는 보도와는 달리 실제로 이적한 팀은 전년도에 세리에 B에서 A로 승격한 만년 2~3부 리그 팀인 브레시아 칼초였다. 브레시아 칼초는 팀 역사의 대부분을 세리에 B 혹은 C에 머물던 팀이었으나, 펩을 영입하기 직전 시즌에 세리에 A로 승격하며 리빙 레전드 로베르토 바조를 깜짝 영입해서 화제를 모은 팀이었다. 당시 바조는 해외 몇몇 빅클럽의 이적 제안을 받았지만 한일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세리에A에서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브레시아 칼초에 입단했었다. 바조의 원맨쇼로 브레시아 칼초는 1군에 승격하자마자 중위권으로 도약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바조 영입 효과를 톡톡히 본 브레시아는 이듬해 30대가 된 펩을 영입하여 중윈을 보강하려 했다.
하지만 펩은 브레시아에서 실질적으로 3개월 밖에 뛰지 못하고 다른 클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2001년 11월 소변에서 금지약물인 난드롤론(스테로이드)가 검출되며 약물 복용으로 기소되어 4개월간 출전 금지를 당했다. 11월 21일 피아첸차전을 마치고 도핑 테스트에서 처음으로 약물이 적발되었는데, 직후 과르디올라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영양제를 섭취하긴했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결코 없다"며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29일 라치오전을 마치고 다시 실시한 도핑테스트에서 같은 약물이 또 검출되면서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 펩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결백함을 호소했다. 결국 그 때문에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아 2002년 상반기에 출장하지 못하며 이적할 때까지 반시즌을 통으로 쉬게 되었다.
이후에도 펩은 거듭 강력하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법정 다툼까지 이어갔고 바르셀로나 B팀 감독이 된 후에도 항소했지만, 항소심에서도 그의 약물 복용 혐의가 인정되었다. 그러다가 펩이 바르셀로나 A팀 감독이 된 후에야 무죄 처리되었다. 이탈리아 법원이 뒤늦게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과르디올라가 결백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법정에서 반도핑기구의 디렉터는 샘플자체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즉 약물을 하지 않았지만 오진이 나올 가능성)은 1/1000~1/10000 사이에 불과하며, 펩은 네번의 검사에서 모두 양성이 나왔으므로 확정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도핑 테스트에서 오진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무결하게 확신할 수 없으며, 펩의 샘플에서 검출된 호르몬은 극소량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펩의 약물 복용을 그대로 입증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그에 대한 근거로 # 9나노그램 미만의 호르몬은 체내에서도 자체적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고, 당시 펩의 약물 샘플에서 검출된 난드롤론은 2나노그램이었기 때문에 펩의 몸에서 자체적으로 생성된 난드롤론이 검출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2002년 여름 펩은 다시 세리에 내에서 AS 로마로 이적하여 또 한 시즌만 뛰고 이적했다. 로마는 2000-01 우승, 2001-02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펩이 온 2002-03 시즌에 8위로 추락하게 된다. 그는 로마에서 2002-03 한 시즌을 뛰었는데, 사실 로마에서 펩은 완전히 벤치 멤버였다. 리그는 펩은 단 4회만 출장하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있듯 그의 로마 생활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로마는 노쇠화가 진행된 펩을 포기했고, 결국 몇 달을 다시 브레시아에서 뛰게 된다. 브레시아도 10위로 리그를 마감한다.
여담으로 AS 로마에 관해서 펩이 남긴 재미있는 인터뷰가 있다. 2014-15 챔피언스리그에서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이 AS 로마와 조별 리그에서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AS 로마와의 조별 예선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과르디올라는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를 언급하며, "나와 현역 시절을 함께 했던 토티가 여전히 경기를 뛴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다. 내일 경기에서 그는 그라운드에, 나는 벤치에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AS 로마의 선수였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라는 나름의 자학성 멘트를 남겼다.
2.3. 중동, 멕시코 (2003~2006)
세리에A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펩이 이적한 곳은 주요 축구 선수들의 은퇴지인 중동 리그이다. 펩이 중동으로 이적했을 때의 나이는 의외로 만 32세에 불과했다.그가 이적한 곳은 카타르의 알 아흘리였다. 이번에도 첼시를 비롯해 맨시티 이적설이 떴었지만 펩의 행선지는 카타르였다.[2][3]
카타르 알 아흘리로 이적하고 나서 그 곳에서 2003-04, 2004-05 두 시즌을 뛰었다. 카타르에서 그는 세리에 A에서와는 달리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알 아흘리에서 첫 시즌인 2003-04 시즌, 팀은 리그 10팀 중 4위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4-05 시즌 10팀 중 8위로 추락했다. 성적
알 아흘리에 있을 때, 펩은 거듭 강력하게 결백함을 주장했지만 세리에 시절 약물 복용 혐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이탈리아 법원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는다. 2005년 약물 복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보류되었고, 2007년 B팀 감독으로서 항소한 후에는 혐의만 남은 채 징역형은 말소된다. 그리고 2009년에서야 그의 약물 복용이 무혐의로 처리된다. 기욤 발라그가 쓴 펩 과르디올라 전기에 따르면 인간은 9나노그램 이하의 약물을 체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펩에게서 검출된 난드롤론은 2나노그램 이하였기 때문에 이 연구 결과에 따라 무죄가 확정되었다.
카타르 알 아흘리에서 두번째 시즌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펩은 멕시코로 이적했다. 멕시코로 이적했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가 이적한 팀은 멕시코에서 지금은 2부 리그 팀인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였다. 2006시즌,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더구나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많이 출장하지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이적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은퇴하였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Axocopan의 학교에 다니며 지도자 공부를 하기도 했고, 이 때 라볼피아나로 유명해진 리카르도 라 볼페 감독을 만나게 되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3. 국가대표
바르셀로나 레전드라는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경력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국가대표로 47경기에 나섰으니 아주 적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선수 경력 최전성기 시절에도 유리몸으로 인해 A매치 출전 기록이 들쭉날쭉했다. 게다가 막상 메이저 대회 때는 잔부상 등의 이유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경우가 많았다. 펩이 메이저 대회에 출전한 것은 1994 월드컵, 유로 2000이 두 대회 뿐이었고 나머지 대회 때는 부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 등의 이유로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월드컵에는 통산 2경기(144분) 출장하였으며, 유로에서는 통산 4경기에 출장했다.유로 1992때는 바르셀로나의 신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엔트리 후보로 뽑힐 정도로 기대를 모았으나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지 않았고 U-23 대표팀에 머물렀다.
유로가 끝난 직후인 1992년 10월 북아일랜드전에서 처음 A매치에 데뷔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 대표팀 엔트리에 선발되었다. 재밌는건 주로 최전방 공격수들이 부여받는 백넘버 9번을 달고 출전했다. 이때 스페인은 조별예선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 볼리비아, 대한민국과 같은 조가 되었다. 조별 예선 중 독일전과 볼리비아전 2경기에 선발 출장하였으며, 아쉽게도 한국과의 경기에선 출전하지 않고 벤치에서 휴식을 취했다. 볼리비아전에서는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서 선취골을 득점했다. 유튜브에 피파 공식 채널이 올린 영상도 남아있다. 미국 해설진이 펩의 본명인 '조세프' 과르디올라라고 부른다. 누가 보면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니라 스트라이커인줄 착각할 듯... 등번호 9번을 달고 출전한 미국 월드컵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되었다.
유로 1996에서는 부상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다.
유로 2000은 펩 과르디올라의 통산 국가대표 커리어 가운데 가장 돋보인 활약을 했던 메이저대회였다. 조별리그 2경기, 8강전을 모두 풀타임으로 뛰었고, 빌드업의 구심점이 되어 중원을 지켰다. 아쉽게도 스페인은 8강전에서 프랑스한테 1:2로 패했다.[4]
2001년에도 친선전에서 대표팀에 자주 승선했으나, 31세에 맞이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으며,[5] 이후에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대표팀을 은퇴하게 되었다.
일부 국내 문서에는 과르디올라가 스페인 국가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로 2000에서 스페인의 주장은 페르난도 이에로였다. 위키피디아의 역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리스트에도 과르디올라의 이름은 없다. 과르디올라가 현역이던 시절 스페인 국대 주장은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레알 마드리드), 호세 마리 바케로(바르셀로나), 안도니 수비사레타(바르셀로나), 페르난도 이에로(레알 마드리드), 라울(레알 마드리드)로 이어진다. 이중에서 바케로와 수비사레타는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 드림팀 멤버였다. 하지만 이들은 바스크 출신이었고,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는 과르디올라보다 레전드 대접을 못받고 있는 듯하다. 같은 시대 외국인 용병으로 대활약했던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도 마찬가지.
카탈루냐 독립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 답게,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동했는데, 1995년에 처음 데뷔하여 2005년까지 통산 7경기에 출장했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 전에는 U-23 대표팀 시절 자국에서 개최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여기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은 전승으로 결승에 올라 결승전에서 폴란드를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1]
쿠만이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터뜨리는걸 바로 옆에서 목격한 이가 과르디올라였다. 팀 동료들과 함께 세레머니를 펼치며 쿠만이 득점한 것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 나서 교체되었다.
[2]
맨시티는 이 당시 펩에게 입단 테스트까지 제의했었고 맨시티 홈경기에서도 관전하는 모습도 보이는 등 영입이 가까워보였지만 펩 본인이 도무지 선수로서 뛸 몸 상태가 아니었기에 당시
스튜어트 피어스 감독은 결국 오퍼를 취소했다.
[3]
나중에 맨시티에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돌아온 펩에게 이 때 맨시티에 선수로서 합류할 수 있었지만 피어스의 결정으로 인해 무산된 과거에 대해 앙심이 있냐는 질문에 본인도 선수 말년에 몸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때
스튜어트 피어스 감독의 결정을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언급했다.
[4]
대회가 끝난 후 펩은 유로 토너먼트 베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5]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도 과르디올라를 뽑고자 생각했지만 약물파동으로 출전이 정지된 상황이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