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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7:35:19

파트리크 베르게르

체코의 前 축구 선수
파일:Berger_Profile.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파트리크 베르게르
Patrik Berger
출생 1973년 11월 10일 ([age(1973-11-10)]세)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프라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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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5cm, 80kg
직업 축구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 은퇴)
소속 선수 스파르타 프라하 (1989~1991 / 유스)
슬라비아 프라하 (1991~199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5~1996)
리버풀 FC (1996~2003)
포츠머스 (2003~2005)
아스톤 빌라 (2005~2008)
스토크 시티 (2006~2007 / 임대)
스파르타 프라하 (2008~2010)
국가대표 2경기 ( 체코슬로바키아 / 1993)
42경기 18골( 체코 / 1994~2001)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클럽 경력4. 국가대표 경력5. 수상 내역
5.1. 선수
5.1.1. 클럽5.1.2. 대표팀5.1.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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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Berger_liverpool.jpg

체코의 前 축구선수. UEFA 유로 1996에서 조국의 준우승을 함께 한 주역이었으나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일찍 전성기를 마감한 비운의 선수이다.

2. 플레이 스타일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나 때때로 윙어로도 출전한 베르게르는 폭발적인 돌파 이후 왼발로 때리는 파괴적인 중거리 슛이 전매 특허였으며, 리버풀의 팀 동료였던 스티븐 제라드는 자신이 본 왼발 스트라이커 중 단연 최고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3. 클럽 경력

1989년, 그는 로컬팀인 스파르타 프라하의 유소년팀에 입단했으나 정작 프로 데뷔는 2년뒤 라이벌 구단인 슬라비아 프라하에서 뛰었을 때였다. 베르게르는 1군 멤버로 자리 잡은 뒤 자국 리그에서 4년동안 90경기 25골을 기록하며 체코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거듭났다.

3.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체코 리그에서 한창 활약 중이던 1995년,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지휘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50만 파운드에 이적했다. 그의 데뷔전은 8월에 열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DFL 슈퍼컵 경기였으며. 팀은 1:0으로 묀헨을 꺾고 타이틀을 따냈다. 시즌 동안 히츠펠트 감독은 본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보다는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6번 자리에서 더 많은 경기를 뛰었다. 리그 27경기동안 14번의 교체 출전하여 4골을 기록,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하면서 2연속 마이스터샬레 획득에 기여했다.

시즌이 끝난 뒤 치러진 UEFA 유로 1996에서 발군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이끌자 여러 팀들의 관심을 받았고, 특히 리버풀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적극적이었다. 결국 그는 포보르스키를 선택한 맨유 대신 리버풀의 계약 제안을 수락했고, 그 해 8월 이적을 완료했다.

3.2. 리버풀 FC

리버풀로 이적한 베르게르는 1996년 9월 7일, 사우스햄튼과의 프리미어리그경기에서 교체 출전으로 처음으로 안필드 무대를 밟았다.

레스터 시티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그는 스탄 콜리모어 대신 하프타임에 교체 출전하며 멀티골을 넣으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면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첼시를 5:1로 격파한 홈경기에서도 멀티골을 성공시켰으며, 뒤를 이어 핀란드의 밀리코스켄과의 UEFA컵 위너스컵 경기에서 골을 추가하며 4경기동안 5골을 기록했다. 그는 첫 달 동안 적응기간 따위 필요없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팬들과 선수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고, 1996년 10월에 리그 9월 이 달의 선수에 선정되며 순조롭게 적응했다.

괜찮았던 첫 시즌과 달리 두번째 시즌은 다소 적은 기회를 받았다. 1997년 10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강하게 자신을 어필했지만 로이 에반스 감독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입지는 여전했다. 이에 불만이 가득찬 베르게르는 1998년 3월,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교체 출전을 거부하기까지 이르었고 감독은 경기 후 그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시즌 종료 후 판매한다고 밝혀 둘의 사이는 더욱 파국으로 치달았다.

5월에는 같은 국적의 감독인 즈데넥 제만이 이끄는 AS 로마나 포르투갈의 SL 벤피카가 유력한 행선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에 무색하게 에반스가 떠나고 제라르 울리에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분위기는 180도로 바뀌었고, 이는 베르게르가 안필드를 떠나지 않고 잔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울리에의 지휘하에 베르게르는 정기적인 출전으로 리그 32경기 7골을 기록, 선수로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다음 시즌에는 리그 9골을 넣으며 어느덧 리버풀의 필수불가결한 선수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2000년 11월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입은 부상으로 2000-01 시즌 대부분의 경기를 출전할 수 없었고, 미국에서 무릎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2001년 3월까지 재활에 몰두한 베르게르는 이후 회복되어 UEFA 컵 FA컵 결승전에서 활약했으며, 리버풀은 두 경기 모두 이기며 트로피를 차지한다. 특히 아스날과의 FA컵 결승전에서 마이클 오언의 결정적인 득점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200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채리티 실드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2001년 8월 다시 한번 부상을 겪어 무릎 수술을 받았고, UEFA 슈퍼컵에서 제외되었다. 2001년과 2003년 사이에 반복되는 부상으로 유리몸화가 되어버린 베르게르는 점점 1군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시즌 동안 그는 벤치만 달구며 2002-03 시즌 동안 4번 출전에 그치고 말았고, 결국 시즌이 끝난 뒤 계약이 만료되는 시기에 리버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3.3. 포츠머스 FC

계약이 만료된 베르게르는 해리 레드냅이 이끄는 승격팀 포츠머스로 이적했다. 레드냅 감독은 그의 영입에 상당히 만족해하며 기대감을 드러냈고, 베르게르도 이에 보답하듯 빌라와의 개막전에서 팀의 2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2003년 10월 13일, 친정팀 리버풀과의 경기에서는 전반 4분 우측에서 올라온 얼리 크로스를 박스 안에서 침착하게 마무리하며 귀중한 3점을 가져가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 달 후에는 리즈와의 맞대결에서 팀의 첫 번째 골과 네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6:1 대승을 이끌었다. 박싱 데이에 치러진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는 환상적인 프리킥 두 방으로 2:0 승리를 견인했다. 특히 첫 번째 득점은 32m 거리의 프리킥 골이었다. 그의 환상적인 킥력을 볼 수 있는 대목. 그러나 이듬해 2월에 다시 한번 무릎이 또 말썽을 일으키며 수술을 받게 되면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베르게르는 2004-05 시즌이 시작된 뒤 8월 21일, 찰턴 애슬레틱을 상대로 후반 8분에 발리슛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으나 팀은 후반 종료 3분을 남겨두고 데이비드 언스워스의 자책골로 1:2로 패했다.

20일 뒤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25야드(23m) 거리에서 쏘아올린 환상적인 중거리슛으로 팀의 3:1로 승리에 기여했다. 2004년 10월 2일, 노리치 시티와의 8라운드에서 25야드 프리킥으로 다시 한번 득점을 기록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리그 골이었다.

그러나 베르게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2005년 연초부터 4월까지 12경기 중 단 1승만을 거두며 어려운 시즌을 보내고 있었고, 이에 따라 2005년 4월 7일, 알랭 페랭이 포츠머스의 새 감독으로 임명된 후 팀을 잘 추스리는데 성공하며 16위로 시즌을 마쳤다.

베르게르는 다가오는 여름에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팀이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스톤 빌라와 2년 계약을 채결했다. 그는 데이비드 오리어리 감독의 존재가 빌라를 선택한 주된 이유라고 언급했다.

3.4. 아스톤 빌라 FC 그리고 스토크 시티로의 임대생활

애석하게도 빌라에서의 커리어는 썩 좋지 못했다. 이는 베르게르의 고질적인 부상이 주된 이유였고, 이적하고도 초반에는 부상으로 인해 경기 출전을 하지 못했다. 결국 첫번째 시즌에는 9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두번째 시즌이 시작되기 전 마틴 오닐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 뒤 경기 결장이 잦아졌다.

2006년 11월, 그는 2007년 1월 4일까지 EFL 챔피언십 스토크 시티에 임대로 보내졌다. 이후 리저브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주간의 벌금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스토크에 있는 동안 그는 7경기 출전에 그쳤는데 단 한 경기의 선발 출전에 나머지 6경기는 교체로 출전했다.

스토크에서 돌아온 후 그는 오닐에게 건강상태에 대해 칭찬을 받았고, 2007년 4월 7일, 그는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로 1골 1어시를 기록하여 팀의 승리를 이끌며 오래간만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선발로 경기에 나선 그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37라운드에서 다시 한번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볼튼과의 최종전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5월 28일, 리그 막바지 괜찮은 활약으로 팀과 1년 연장계약을 채결했다.

베르게르는 2007-08 시즌을 앞두고 프리시즌에서 또 다시 부상을 당하며 2007년 10월까지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이후 부상 당한 부위가 또 재발하며 다시 상당수의 경기에 제외되었다. 2008년 5월 6일, 에이전트 B 베르게르는 주장 가레스 배리에게 자신이 뛰었던 리버풀로의 이적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기도 했다.[1] 고질적인 부상으로 3시즌간 28경기밖에 뛰지 못한 베르게르는 팀에서 쓸쓸히 방출되었다.

3.5. 고국으로 리턴

어느덧 만 34살의 노장이 된 베르게르는 14년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황혼기를 맞이하기 위해 자국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자신의 유스팀이었던 스파르타 프라하와 2년 계약을 맺고 이적을 완료했다. 그는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2008년 11월, SK 클라드노와의 리그경기에서 해트트릭을 작렬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이후 팀은 2위로 시즌을 마치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진출 자격을 확보했다. 베르게르는 리그 6골로 팀내 최다 득점자였다. 6골이..??

2009-10 시즌에는 초반 2경기 활약 후 잊을만 하면 터지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받게 되면서 전반기를 날렸고 2010년 1월 6일, 회복에 실패한 베르게르는 은퇴를 선언했다.

3.6. 깜짝 복귀?

2010년 8월, 체코 6부리그에 소속된 아마추어 클럽 돌니 사브리에 입단하며 활약했다.

4. 국가대표 경력

이미 유소년 시절부터 다양한 연령대 대표팀을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년간 연령대 대표팀에서 49경기 6골을 기록하며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또한 1990 UEFA U-16 챔피언십 결승전 유고슬라비아와의 맞대결에서 득점에 성공시키며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1993년 3월 23일, 키프로스와의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A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듬해 9월 6일, 몰타와의 유로예선에서 본인의 A대표팀 첫 골을 기록했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는 UEFA 유로 1996에서의 활약이었다. 그는 본선 전 경기를 모두 출전했으며,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는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팀은 1:2로 무릎을 꿇으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대회가 끝난 후 1997년부터 1998년까지 그는 대표팀 감독과의 갈등으로 한동안 대표팀에서 제외된다. 그는 17개월간 대표팀 경기를 결장했고 이후 후임자로 요제프 호바네츠 감독이 임명되고 나서야 대표팀에 복귀했다. 그는 1998년 10월 14일, 에스토니아와의 유로 예선전에서 프리킥으로 2골을 터뜨리며 화려한 복귀를 알렸다. 이후 UEFA 유로 2000 본선에도 참가했지만 1,2차전은 결장했고, 3차전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대회 첫 출전을 했다.

2002년 3월, 다소 이른 나이였던 28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겪고 있는 중에 A매치까지 소화하기에는 무리였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5. 수상 내역

5.1. 선수

5.1.1. 클럽

5.1.2. 대표팀

5.1.3. 개인



[1] 물론 감독인 오닐의 거절로 무산됐으며, 도리어 팀 분위기를 해쳤다는 이유로 주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1년뒤 맨시티로 이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