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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19:37:04

파울 폰 베르너

파일:Paul_von_Werner.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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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출신 후사르 기병대 지휘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엔 오스트리아군에서 활동했고 7년 전쟁 시기엔 프로이센 후사르 기병대를 지휘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베르너는 1707년 12월 11일 헝가리의 되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 파울 베르너로, 에스테르하지 후사르 연대의 감찰관이었다. 1724년, 베르너는 16살의 나이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고 1731년에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 휘하의 후사르 부대의 기수가 되었다. 1733년 중위가 된 베르너는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 이탈리아의 비톤토 전투에 참가했다가 스페인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포로 교환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귀환했다. 이후 그는 1735년 대위가 되었고 1737년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이 발발하자 여기에 가담해 바냐루카 전투를 치렀고 1739년엔 그로츠카 전투에 참여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4월 10일, 베르너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첫번째 전투인 몰비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맞섰다. 이때 그의 후사르 부대가 전장에서 이탈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사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장군에게 지휘권을 이양한 뒤 전장에서 벗어나다가 후사르들에게 추격당해 죽을 뻔하긴 했지만, 이 후사르들이 베르너의 직속 부대원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1742년 5월 17일, 베르너는 코투지츠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를 막지 못했고, 바움가르텐 근교에서 슐렌부르크 연대를 급격했고 글렌페나우 근방에서 말라초스키 대령을 붙잡았으며 류부스에서 반데머 연대를 습격하는 등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습격전을 여러 차례 구사했다. 1744년, 베르너와 그의 연대는 라인강 방면 오스트리아군의 선봉대에서 복무했고 1745년 9월 30일 조르 전투에 참가했으며 1746년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도 참가했으며 1747년 7월 2일 라우펠트 전투에도 참가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베르너는 자신이 전쟁 기간 동안 숱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아직도 대위 계급에 머무른 것에 분노해 1750년 오스트리아군을 떠났다. 그 후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 소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프로이센군에 입대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유능한 후사르 지휘관을 얻게 된 것에 매우 기뻐하며 그를 중령으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베크마르 후사르 부대의 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756년 8월 20일, 베르너는 슐레지엔의 프리츠위츠와 포야나우를 상속받은 안나 마리아 도로테아 폰 시몬츠키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에서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성인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한 한명(아우구스트 알브레히트 요제프 루트비히) 뿐이었다. 이후 슈베린 원수의 군대가 보헤미아로 진군하는 동안, 베르너는 먼저 보헤미아로 침입해 오스트리아군을 여러차례 급습했다. 1757년 2월 베크메르 후사르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그는 휘하 부대의 명칭을 자신의 이름을 딴 베르너 후사르로 변경했다. 그 후 베르너는 프라하 전투 콜린 전투에서 활약했고 상부 루사티아 지방으로 가서 슐레지엔 수비대를 이끌고 있던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의 군대와 합세했다.

1757년 11월 22일, 베르너는 한스 요아힘 폰 치텐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맹활약해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패잔병들을 대거 살육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758 봄, 베르너는 프로이센군의 모라비아 침공 작전에 참가했고 7월에 프로이센군이 철수할 때 후위대를 지휘했다. 그해 9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르너를 소장으로 승진시키고 무공 훈장을 수여했다. 베르너는 대왕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나이세 요새 구원 작전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코젤 요새를 포위한 오스트리아군을 급습해 포위망을 해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759년 봄에는 슐레지엔으로 쳐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가까스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760년, 베르너는 분견대를 이끌어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습격 작전을 지휘했고 8월에는 에르처조그 요제프 드래곤 부대를 공격해 거의 전멸시켰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승리에 기뻐하며 그에게 2천 탈러의 포상금을 하사했다. 그해 8월, 베르너는 러시아군에게 포위된 콜베르크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아 베르너 후사르 3개 대대와 150명의 드래곤들을 이끌고 출발해 9월 18일 콜베르크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러시아군을 공격해 9월 19일 러시아군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게 했다. 베르너는 적군이 폴란드로 물러날 때까지 바짝 추격했다가 1760년 말 포메른으로 돌아가서 스웨덴군을 페네강 너머로 몰아냈다.

1761년 2월 20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중장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연간 2천 탈러의 연금을 수여하고 민덴의 교회 서기관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베르너는 1761년 전역에서 동프로이센을 침략한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다가 9월 12일 트라테우 인근에서 러시아군에게 요격당해 말이 총을 맞는 바람에 낙마한 뒤 생포되었다. 이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끌려가 그곳에서 1762년까지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1762년 1월 새 차르가 된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과의 모든 전쟁을 아무 조건 없이 종식시키고 베르너를 불러서 러시아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베르너는 그동안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입은 은혜를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며 거부했고, 표트르 3세는 할 수 없이 베르너를 프로이센으로 돌려보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게 특별 기병 군단을 주었고, 베르너는 상부 슐레지엔에서 모라비아로 진군했다.

1762년 8월 16일, 베르너는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휘하에서 라이헨바흐 전투에 참가해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는 앞에서 돌격을 감행해 오스트리아군 3,500명을 죽이고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이후 베르너는 슐레지엔 국경을 따라 배치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복무했다.

2.4. 이후의 경력

1763년 전쟁이 끝난 후, 베르너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절대적으로 신임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1767년 10월 나우가르텐의 대장이란 칭호를 받았고 1778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 참가하여 베르너 후사르 부대를 이끌고 테츠젠 마을 근처에 있는 오스트리아 기병 분견대를 격파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과 프로이센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생을 편히 보내던 그는 1785년 1월24일 비트첸 영지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