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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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F85BB,#4A4F5A>전쟁 |
교전세력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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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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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비츠 전투 ,1741년 4월 10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코투지츠 전투 ,1742년 5월 17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데팅겐 전투 ,1743년 6월 27일, |
영국- 하노버- 오스트리아 | 프랑스 | ||||
퐁트누아 전투 ,1745년 5월 11일, |
프랑스 | 영국 | ||||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1745년 6월 4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작센 | ||||
수어 전투 ,1745년 9월 30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헨넬스도르프 전투 ,1745년 11월 23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케셀스도르프 전투 ,1745년 12월 15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로쿠스 전투 ,1746년 10월 11일, |
프랑스 | 오스트리아- 영국-하노버- 네덜란드 | ||||
라우펠트 전투 ,1747년 7월 2일, |
프랑스 | 오스트리아- 영국-하노버- 네덜란드 |
수어 전투 Battle of Soor Schlacht bei So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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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F85BB,#4A4F5A><colcolor=#F9F9F9,#FFD9E5> 시기 | 1745년 9월 30일 | |
장소 |
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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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rowcolor=black> 프로이센 (공세)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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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 (수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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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지휘관 프리드리히 대왕 슈베린 백작 페르디난트 공작 (좌익) |
지휘관 카를 알렉산더 로브코비츠 |
병력 |
프로이센군: 22,500명 - 보병: 16,700명 - 기병: 5,800명 |
연합군: 40,200명 - 보병: 23,500명 - 기병: 12,700명 - 비정규군: 4,000명 |
피해 |
사상자: 3,911명 - 전사자: 856명 - 부상ㆍ실종자: 3,055명 |
사상자: 4,500명 포로: 3,000명 |
결과 | 프로이센의 승리 | |
영향 | 헨넬스도르프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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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5년 9월 30일 보헤미아와 슐레지엔 국경 근처의 조르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한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으나 끝내 승리를 거뒀다.2. 배경
1745년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프리드리히 대왕은 뒤이어 오스트리아군을 격멸하기 위해 보헤미아로 침공했다. 그러나 슈타우텐츠 요새에 공격을 감행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데다 보헤미아의 민심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걸 확인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해 9월 보헤미아에서 철수해 슐레지엔 국경 근처에 있는 부케스도르프 근처에 진을 쳤다. 대왕은 그의 종자인 프레데르도르프에게 서신을 보내 상수시 궁전 건축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일전의 패배로 인해 위축되어서 아군을 공격하지 못할 테니 군대를 잠시 떠나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그러나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카를 알렉산더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실제로 이끄는 군대가 얼마 되지 않으며, 그들이 주둔한 부르케르스도르프의 북쪽에 있는 그라너-코페 언덕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카를 알렉산더는 주력군을 이끌고 기습공격을 위해 극비리에 부르케르스도르프로 접근하면서 잔여 부대로 하여금 적의 남쪽에 전열을 펼쳐 적의 시선을 잡아끌게 했다. 9월 30일 새벽, 오스트리아군과 작센 연대는 버커스도르프 언덕에 자리를 잡고 적을 기습할 준비를 완료했다. 이리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가 전쟁을 이끈 이래 처음으로 적에게 기습을 허용할 위기에 놓였다.
3. 전투 경과
9월 30일 새벽 5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장군들과 군사 회의를 갖던 중 정찰병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이 언덕 위에 포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놀라운 소식을 조사하기 위해 서둘러 프로이센군의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각 연대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집결 명령을 내렸고 보병들은 서둘러 제 위치에 집결했고 기병대는 말에 탑승했다. 이윽고 안개가 걷힌 뒤 그라너-코페 언덕에 포진한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적의 진영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재빨리 계획을 세웠다. 그는 기병대에게 그라너-코페 언덕의 우측으로 원을 그리며 진군한 뒤 적군의 한 측면을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보병 1개 연대를 그라너-코페 언덕 방향으로 파견해 적을 언덕 정상에서 밀어내게 했고 나머지 군대는 적과 교전을 회피하며 북상하기로 했다.대왕의 명령에 따라 그라너-코페 언덕 우측으로 진격한 기병대는 곧 언덕 위의 적군에게 포격 세례를 받았으나 이를 무릅쓰고 진군한 끝에 언덕의 북쪽에 전투대형을 취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좌측으로 돌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부덴브로크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대 선두 연대는 경사로를 거슬러 올라가며 적 보병대와 격돌했다. 그 사이,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척탄병 연대는 그라너-코페 언덕 전면으로 진군해 정상에 있는 적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적의 대포 사격과 적 보병대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한 그들은 상당한 사상자를 내며 물러났다. 이에 또다른 프로이센 보병 연대가 추가 투입되어 두번째 공세를 개시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언덕을 끝까지 사수하려 들었으나 끝내 기세에서 밀려 정상에서 쫓겨났다.
한편, 부르케르스도르프 남쪽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연대는 오스트리아 우익과의 교전을 회피하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해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지원하는 걸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아예 적 우익을 향한 맹공을 퍼붓기로 작정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본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진군하다가 적이 예상밖으로 선제 공격을 가해오자 혼란에 빠졌다. 페르디난트 공작은 그런 적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을 무너뜨렸다. 우익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아군 보병대를 엄호해주지 못했고, 많은 보병들이 프로이센 좌익의 기병 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결국 한낮이 되자 전투는 끝났고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은 패주했다. 이리하여 프로이센군은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