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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3:13:02

투메드

1. 개요2. 역사

1. 개요

파일:6투멘 지도.png
6투멘 지도
북원시기 몽골의 6투멘 중 하나이다. 사서에서는 토묵특(土默特) 등의 이름으로 기록된다.

2. 역사

15세기 후반 다얀 칸 다이온타슨다이 칸 사후 혼란스웠던 몽골을 다시 안정시키고, 투멘[1]을 새로 조직한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6투멘으로 투메드 투멘도 이 때 만들어졌다. 투메드는 다얀칸 시기에 12개의 오톡[2]이 있었다.

투메드의 전성기를 이끈 것은 알탄 칸이었다. 알탄 칸은 투메드 12개의 오톡 중에서 4개의 오톡을 받았다.[3] 알탄 칸은 그의 형 군빌리크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부각했다. 나중에는 아예 지농을 넘어선 몽골 우익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다. 알탄 칸은 오랜기간 중단된 교역을 명나라에 줄기차게 요구했다. 명나라에서 계속해서 이를 거부하자 명나라 변경을 자주 공격하였다.

당시 명나라에서 여러 복잡한 이유로 몽골 땅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몽골 땅에 정착촌을 만들었는데, 몽골에서 이를 바이싱이라 불렀다.[4] 이러한 바이싱들은 투메드 영역 곳곳에 세워졌다. 바이싱 중에서 큰 것들은 예케 바이싱이라 불렸다. 알탄 칸은 자신이 거주하는 예케 바이싱에 성을 하나 세웠으니, 바로 후흐호트였다. 한족들은 바이싱을 통해 투메드에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도움을 주었고, 이는 투메드가 다른 투멘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가지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50년 알탄 칸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포위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명나라 내에서도 몽골에 교역을 허용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가정제를 이어 황제가 된 융경제는 몽골에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무역을 허락해주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와 몽골이 접하는 지역에 시장을 설치했는데 그중에서 알탄칸의 본거지와 가까운 대동에만 10개가 넘는 시장이 세워졌다. 알탄 칸은 이에 대한 대가로 명나라에 대한 약탈을 중지한다. 마침내 요동지역과 하서회랑 지역을 제외한 명나라 북변 지역에 평화가 찾아왔다.

1534년 이브라힘[5]을 쫓아내고, 1559년 부르카이까지 쫓아낸 알탄 칸은 아이다비스 다얀 노얀을 송산[6] 지역에, 빙투를 후흐노르에 남기고 돌아간다. 송산과 후흐노르 사이는 비록 명나라 땅이었지만, 오초령(烏鞘嶺)이라는 좁은 협곡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몽골은 후흐노르를 거쳐 제 집 드나들듯이 티베트 지역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명나라는 1598년 송산 일대를 점령하고[7] 장성을 지어서 몽골이 명나라 땅을 거쳐 티베트로 갈 수 없도록 하였다. 후흐노르는 빙투 사후에 콜로치가 지키고 있다가 할하에서 내려온 튀멩켄 촉투 홍타이지가 차지한다.

알탄 칸이 죽은 이후로 그의 순의왕 자리를 두고 투메드 내에서 갈등이 여러차례 벌어진다. 2대 순의왕 셍게뒤렝, 3대 순의왕 추르커, 4대 순의왕 보쇽투 모두 알탄 칸의 아내였던 삼낭자와 순의왕의 자리를 두고 갈등했다.[8] 명나라는 두 부족 사이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알탄칸의 자손을 순의왕에 삼낭자는 충순부인에 봉하였다. 1611년 보쇽투는 투메드 유력자로부터 순의왕으로 추대되었고, 삼낭자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인정한 후 1년 뒤 1612년에 사망한다. 하지만 보쇽투가 제어할 수 있는 부족은 많지 않았다. 단지 후흐호트와 그 주위 부족들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보쇽투는 동쪽에서 몽골을 통합하기 위해 진격해온 링단 칸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간다. 이후 투메드는 차하르에 복속된다.


[1] 칭기즈칸 시기 사람 수를 단위로 만들었던 행정조직. 한국, 중국에서는 만호라고 불렀다. [2] 투멘 밑의 조직단위였다. 다얀 칸 시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밍간(천호)를 대체했다. [3] 위구진, 바유트, 우르트, 옹기라트 [4] 중국어로 백성이란 뜻을 가진 바이싱을 그대로 몽골어로 음차한 것이다. [5] 에센 타이시의 손자로, 에센 타이시 사후 혼란했던 몽골초원에서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보유했었다. 다얀 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후흐노르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티베트인과 샤릭위구르를 앞세워 명나라 서녕을 자주 공격했다. [6] 오늘날 중국 톈주 티베트족 자치현 일대 [7] 대략 전라도 정도 크기의 땅이다 [8] 삼낭자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순의왕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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