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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00:52

토머스 펠튼

성명 토머스 펠튼
Thomas Felton
생몰년도 미상 ~ 1381년 4월 2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펠튼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펠튼
아버지 존 펠튼
어머니 시빌
형제 하모, 에드먼드
아내 조앤 웍페어
자녀 메리, 시빌, 엘레노어, 토머스
직위 기사, 아키텐 세네샬,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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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기사.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맞섰다.

2. 생애

펠튼 가문은 노섬벌랜드의 미트퍼드 남작 윌리엄 버트램의 방계 후손으로, 데데러 노섬벌랜드에 있는 펠튼 마을의 기사로 활동했다. 아버지 존 펠튼은 기사였으며, 1315년경 밤버러 성의 보안관으로 활동했다. 그에게는 형 하모와 동생 에드먼드가 있었다. 하모는 리참의 영주였으며, 1372년과 1377년에 노퍽의 샤이어 기사를 맡았고, 1379년에 사망했다. 막내 에드먼드는 서퍽에 있는 코덴햄의 기사 로버트 제라드의 딸과 결혼해 1364년까지 생존했다.

토머스는 1346년 프랑스를 침공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지휘하는 원정대에 동행했으며, 크레시 전투, 1차 칼레 공방전에 참ㅈ여했다. 그 과정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가신이 되었고, 1355년 흑태자의 슈보시,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다. 1359~1360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동행했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에 서명하고 그 조약이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맹세한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361년 에드워드 왕자와 켄트의 조앤의 결혼에 대한 주요 증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기사로 명명되었다.

1362년 에드워드 왕자에 의해 아키텐의 세네샬(senechal: 남부 프랑스의 지방관)로 선임되었으며, 1363년 에드워드 가족의 청지기로 일했다. 1364년 에드워드 왕자를 면담하기 위해 아키텐에 찾아온 키프로스 국왕 피에르 1세를 영접했으며,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전임 국왕 페드로를 영접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페드로가 카스티야 왕위에 복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에드워드 왕자는 이 문제를 존 챈더스와 펠튼에게 문의했다. 챈더스는 반대했지만, 펠튼은 아키텐 남작과 기사들을 소집한 뒤 그들과 논의할 것을 권고했다. 에드워드는 그의 권고에 따랐고, 이후 열린 아키텐 의회에서 페드로를 돕기로 결의했다. 펠튼은 12척의 함대를 이끌고 바욘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대기 중이던 페드로를 보르도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67년 3월, 펠튼은 200명의 맨앳암즈와 궁수로 구성된 전위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왕자의 본대에 앞서 카스티야로 진군했다. 그러나 나바레테 인군의 아리녜스에서 카스티야군의 급습을 받았다. 토머스의 친척이자 푸아투의 세네샬을 맡고 있었던 윌리엄 펠튼이 전사했고, 토머스는 여러 부하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이후 1367년 4월 나헤라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에드워드 왕자는 프랑스 원수 아르눌 도드랭을 그와 교환하기로 했다.

1369년 샤를 5세가 아키텐 영지 회수를 단행하면서 백년전쟁이 재개되자, 그는 중병에 걸려서 군사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에드워드 왕자를 대신해 존 챈더스와 함께 프랑스군에 맞섰다. 그는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함께 푸아투로 파견되어 곤트의 존과 합세한 뒤 프랑스군에 포위된 투아르의 수비대를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여러 전투에 참전해 프랑스군과 혈투를 벌였고,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1369년 12월 말 챈더스가 전사한 뒤 챈더스의 영지였던 생소뵈르르비콩트 자작령을 그에게 넘겼다.

에드워드 왕자가 요양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간 후, 에드워드 3세는 1372년에 그를 로버트 웍페어와 함께 아키텐 공동 세네샬로 임명해 프랑스군에 대적하도록 했다. 이후 곤트의 존이 잉글랜드로 돌아가자, 그는 보르도의 상원 의원으로 이명되었다. 1375년 2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1376년 12월 프랑스와 휴전을 맺고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와 협상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수행했다.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할 무렵인 1377년 6월, 그는 보르도에서 프롱삭 자작 기욤 산체 4세 드 포미에와 기욤의 고해신부인 콜롱이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로 반역을 꾸민 혐의로 체포해 참수했다.

1377년 11월 1일, 펠튼은 보르도 인근에서 가스코뉴 깊숙이 침투한 장 3세 드 뷔에이의 프랑스군과 맞서다 생포되었다. 1378년, 그의 아내 조앤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프랑스 포로인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뤽상부르리니의 몸값을 남편이 석방될 때까지 치르지 말아달라고 청원했다. 1380년 4월,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는 펠튼을 석방하기 위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해 8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2명의 프랑스 포로의 몸값 중 3만 프랑을 펠튼에게 지불하는 걸 허락했다. 이리하여 겨우 석방된 펠튼은 1381년 1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고, 1381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