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술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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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제국 술탄 토그릴 2세 طغرل الثان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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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토그릴 빈 무함마드 빈 말리크샤 طُغرِل بن محمد بن ملکشا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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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09년 | |||
사망 | 1134년 10월 | |||
재위 | 셀주크 제국 술탄 | |||
1132년 ~ 113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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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부모 | 아버지 무함마드 타파르 | ||
배우자 | 무미나 카툰 | |||
자녀 | 알프 아르슬란 | |||
말리크샤 | ||||
무함마드 | ||||
아르슬란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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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술탄. 형제 및 조카들과 함께 술탄을 놓고 경쟁했으나 도중에 병사했다.2. 생애
1109년 셀주크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의 아들로 출생했다. 1110년 또는 1111년에 아버지로부터 사베, 콰즈빈, 아브카르, 잔잔, 다이람 등 이란 서부의 지발 일대의 아타베그로 선임했다. 여기에 간자 시와 인근 지역도 그의 통치권에 속했다. 1118년 무함마드 타파르가 사망하자, 타파르의 장남 마흐무드 2세가 술탄으로 선임되었다. 마흐무드 2세는 그를 대신해 다른 이를 아타베그로 선임하고 수도로 소환하려 했지만, 그는 이에 반발한 가신들에 의해 술탄으로 추대되었다. 마흐무드는 아누시르반 빈 칼리드를 파견해 토그릴의 추종자들에게 30,000 디나르를 선물로 주면서 달래봤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아란을 장악했다.이와 동시에, 마흐무드 2세의 형제인 아흐마드 산자르가 호라산에서 봉기해 마흐무드 2세에 대항했다. 1119년 8월 사베 시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접전에서, 산자르는 전투 코끼리의 맹활약에 힘입어 승리했다. 마흐무드는 처음에 이스파한으로 도주했다가 산자르에게 포위되자 협상을 요청했다. 산자르는 어머니 사피야 카툰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가 술탄으로서의 칭호를 유지하고 제국의 서쪽 절반을 계속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그 대신에, 마흐무드는 레이에 있는 산자르에게 가서 충성을 서약하고, 앞으로 주조한 동전에 "가장 위대한 칭호"라는 타이틀을 가진 산자르의 이름을 새겨야 했다. 또한 레이와 카스피해 일대를 상실했다. 이때 토그릴도 지발 지방의 절반과 길란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산자르는 여기에 더해 무함마드 타파르의 또다른 아들인 파르스에게 이스파한, 후제스탄 등지의 절반을 수여했다.
한편, 조지아 왕국의 다비트 4세는 셀주크 제국이 거듭된 내란으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그동안 바치던 조공을 끊고 주변 지역을 공략했다. 1121년 트빌리시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은 그와 마흐무드 2세, 간지의 에미르 마르딘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이에 응해 간지와 연합하여 트빌리시 구원 작전에 착수했지만, 디드고리 전투에서 다비트 4세에게 완패했고 트비릴시는 1122년에 항복했다. 다비트 4세는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그곳을 조지아 왕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1125년, 토그릴은 베두인 부족장 두바이스와 연합해 술탄 마흐무드와 대적했으나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지원을 받은 마흐무드에게 참패한 뒤 산자르에게 망명했다. 1131년 마흐무드 2세가 사망하고 아들 다우드가 마흐무드 2세 가신들의 추대로 술탄에 즉위하자, 산자르는 자신의 허락 없이 술탄을 세운 것에 분개해 토그릴을 술탄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1132년 산자르에 의해 레이에 이송된 토그릴은 그 해 5월 레이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으로 옹립되었다.
1132년 5월, 산자르의 군대는 술탄을 자칭하다가 자신들을 피해 아제르바이잔으로 후퇴하는 기야스 앗 딘 마수드를 추격해 디네베르에서 따라잡았다. 토그릴은 우측 부대를 지휘해 승리에 일조했다. 산자르는 마수드가 토그릴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조건하에 사면하고 아자르바이잔 총독에 선임했다. 그러나 산자르가 반란 진압을 위해 호라산으로 돌아가자, 마수드는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토그릴에게 반기를 들었고, 다우드도 마수드에게 가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토그릴 2세에게 패배한 뒤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는 두 사람을 받아준 뒤 1133년 1월 바그다드 아미르들의 지지를 받던 마수드를 술탄으로 책봉했다. 이후 다우드와 마수드는 칼리파의 군대를 등에 업고 북상해 그 해 5월 토그릴 2세를 격파하고 하마단에 입성했다. 토그릴은 처음에 쿰으로 갔다가 다시 이스파한으로 갔으나 시민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파르스에게 망명했으나, 파르스가 자신의 군대를 회유하는 것을 두려워해 레이로 돌아갔다. 그는 이 실패의 책임을 재상 아불 카심에게 떠넘기고 처형했다. 그 후 마수드가 레이로 쳐들어와 그를 다시 격파했고, 토그릴은 산자르에게 망명한 뒤 이란 중부에 웅거했다.
1134년 마수드가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한 것에 격분한 알 무스타르시드, 다우드와 연합해 마수드의 영역에 속한 모술을 공격했지만 마수드가 구원병을 파견하자 철수했다. 이후 페르시아 기병 2,000명을 모집한 그는 1134년 6월 서진해 마수드를 상대로 카즈빈 평야에서 격파하고 하마단에 입성했다. 마수드는 바그다드로 피신했지만 자신을 배신했던 마수드를 불신한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는 10월 초엽 마수드를 바그다드에서 추방했다.
이리하여 권력을 확고히 하는 듯 했으나, 마수드가 추방된 지 불과 9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하마단에 묻혔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평소 복용하던 약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사후 마수드가 재빨리 하마단으로 가서 술탄에 복위해 세력을 재건했다.
토그릴은 생전에 무미나 카툰과의 사이에서 알프 아르슬란, 말리크 샤, 무함마드, 아르슬란샤를 낳았다. 무마나 카툰은 남편이 사망한 뒤 마수드의 마수를 피해 자식들을 데리고 아란과 아제르바이잔에서 세력을 구축한 일디귀즈 왕조의 창시자 일디귀즈에게 의탁했고, 나중에 그와 결혼했다. 일디귀즈는 1161년 7월 토그릴의 아들 아르슬란샤를 셀주크 제국의 술탄에 선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