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오도로 페르난데스의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39 코파 아메리카 MVP |
테오도로 페르난데스 |
이름 |
테오도로 오스왈도 "롤로" 페르난데스 메이산 (Teodoro Oswaldo "Lolo" Fernández Meyzán) |
생년월일 | 1913년 5월 20일 |
사망년월일 | 1996년 9월 17일 (향년 83세) |
국적 | 페루 |
출신지 | 카녜테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80cm | 72kg |
소속팀 | 우니베르시타리오 데 데포르테스 (1930-1953) |
국가대표 | 32경기 / 24골 (1935-1947) |
[clearfix]
1. 개요
페루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어린 시절
롤로[2]는 1913년 5월 20일, 카녜테(Cañete)의 우알카라 아시엔다(Hualcará Hacienda)에서 8명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페르난데스 시스네로스(Tomás Fernández Cisneros)는 농지 관리자였고 어머니 라이문다 메이산(Raymunda Meyzán)은 주부였다.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즐겼던 롤로였지만 당시의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축구공을 구하기 어려워서 즉석에서 공을 만들어 축구를 즐기곤했다. 하지만 아버지 토마스는 롤로를 포함한 그의 형제들이 축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가 계속 축구를 하지 못하게 하도록 결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축구 시합을 하다가 부상을 입었을 때 당신의 반대는 더 커졌었죠. 아버지는 신발을 숨김으로써 축구를 포기하게 하려 하셨지만 우리는 줄곧 신발 없이 도망쳤고 신발 없이 축구를 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메이산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메이산
카녜테에서 공부하던 때에 롤로는 자신의 친구들과 우라칸 데우알카라(Huracán de Hualcará)라는 클럽을 만들어 뛰기도 했다. 롤로는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카녜테에서 공부했지만 16살 무렵에 리마에서 형 아르투로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0년 3월, 롤로는 형 아르투로가 소속된 우니베르시타리오에 입단하게 되었고 리저브를 거쳐 1군 스쿼드에까지 포함되기 시작했다. 1931년 11월 29일에 칠레의 데포르테스 마가야네스(Deportes Magallanes)와의 경기에서 첫 선을 보인 롤로는 1932년 6월 26일에 있었던 스포르티보 우니온(Sportivo Unión)과의 경기에서 공식 데뷔전을 가졌다.같은 해 7월 10일의 시르콜로 스포르티보 이탈리아노(Circolo Sportivo Italiano)와의 경기에서 8:0 대승을 거둘 때 그는 6골을 기록했다. 롤로는 9경기에서 11골을 넣으며 커리어에서 첫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34년의 페루 리그에는 1군팀의 승점에 리저브 팀 승점의 일부를 더하는 시스템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논란에도 우니베르시타리오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것이 롤로의 커리어와 우니베르시타리오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이었다.
1935년에는 우니베르시타리오를 포함한 단 5개 팀만이 리그에 참가했는데 스포르트 보이스를 제외한 나머지 4개의 팀은 단 2경기만 치렀다. 우니베르시타리오는 3위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1936년에는 올림픽으로 인해 리그가 열리지 않았다.
1941년 시즌은 8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홈 앤 어웨이로 팀당 총 15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12라운드까지 치른 상황에서 칠레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의해 리그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고 우승팀은 우니베르시타리오였다.
1946년 시즌은 팀들끼리 3차례 대결하게 되어 경기 수가 더 늘어났고 롤로가 이끄는 우니베르시타리오는 연속 우승이라는 기쁨을 맛보았다.
1940년대 후반부터 롤로는 계속된 부상으로 출전 횟수가 줄어갔지만 몸관리를 하면서 더 많은 출전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1953년 8월 30일에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전통의 라이벌 알리안사 리마. 원래 롤로는 이 경기의 선발이 아니었고 선발로 나간 스트라이커의 부상으로 대신 들어간 경기였음에도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4대2 승리를 이끌며 유종의 미를 장식했다.
20년 전의 열정으로 떠납니다. 다리는 예전같지 않지만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롤로의 은퇴사
롤로의 은퇴사
1953년 10월 14일, 3만여 명의 팬들이 모인 가운데 롤로의 은퇴식이 열렸다. 그날 2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고 두 번째 경기에서 롤로는 장내 아나운서가 작별을 발표한 후 6분간 피치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그의 우니베르시타리오의 크림색 셔츠를 마누엘 아르세에게 건넸다.
그가 넣은 156골은 우니베르시타리오 팀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이다.
2.2.2. 국가대표
롤로의 국가대표 데뷔 무대는 자국에서 열린 193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이었다. 페루의 첫 경기였던 1월 13일의 우루과이전이 롤로의 데뷔전이었지만 페루는 우루과이에 0대1로 패했다. 뒤이은 아르헨티나전에서 롤로는 국가대표팀에서의 마수걸이 골을 기록했지만 이 골 하나로 팀의 1대4 패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1년 후 올림픽에서 페루는 핀란드를 맞아 7대3 대승을 거뒀다. 이 경기에서 5골을 넣은 롤로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페루의 다음 상대는 오스트리아. 0대2로 끌려가던 페루는 마지막 15분 동안 동점을 기록했지만 경기장에 있던 페루 팬들이 경기장을 침범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연장전에도 페루는 2골을 더 추가해 승리를 거뒀으나 오스트리아는 FIFA에 항의하며 무관중 재대결을 요청했고 이에 페루 정부는 국가대표 전원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승자는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이 올림픽에서 롤로는 6골을 넣었다.
1937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롤로는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상대로 각각 1골씩을 기록했다. 하지만 페루는 1승1무3패로 칠레에 골득실에서 뒤진 최하위를 기록했다.
1939년 대회는 롤로와 페루 축구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대회이다. 롤로는 4경기에서 7골을 몰아치며 득점왕에 올랐고 페루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역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1940년대에 롤로는 페루 팀 소속으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세 번 더 참가했다. 그 중 첫 번째는 1941년 칠레에서 열린 대회로 그는 4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었다. 두 번째는 1942년 우루과이 대회에서 3경기에서 2골을 득점했다. 롤로의 마지막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은 1947년 에콰도르에서 열린 대회였으며 3경기를 치렀지만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다.
롤로는 페루 대표팀에서 32경기 출전, 24득점의 기록을 남겼다.
2.3. 은퇴 이후
롤로는 축구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친정팀 우니베르시타리오로부터 매달 연금을 받았고 팀에서는 또한 그가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모금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롤로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스포츠 악세서리 매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스포츠 주간지에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1970년대에는 대학교에서 일부 실습을 지도하기도 했고 1983년 8월 30일에는 에스타디오 롤로 페르난데스에서 그의 은퇴를 기념하는 친선 경기가 열렸다. 하지만 그는 건강 문제로 같은 해에 미국으로 수술을 하러 갔고 1989년 이후에는 계속 입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족, 친지 외에도 많은 축구팬, 특히 친정팀의 팬들이 병문안을 왔다고 한다.
롤로는 1996년 9월 17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관에는 팀의 깃발이 덮여 있었다. 그의 관은 롤로 페르난데스 경기장을 한 바퀴 돈 후 도보로 알폰소 우가르테(Alfonso Ugarte)가로 옮겨졌다. 지금 롤로는 루린(Lurín)의 파르케 델 루케르도(Parque del Recuerdo)지구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강력한 슈팅 능력이 장기였던 센터 포워드였다.4. 사생활
롤로는 엘비라(Elvira)와 1937년에 결혼, 슬하에 아들 테오도로 주니어와 딸 마리나를 두었다.그의 동료들은 그를 친절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5. 뒷이야기
- 그의 형 아르투로 페르난데스도 축구 선수였고 월드컵과 아예 인연이 없었던 롤로와 다르게 페루 대표팀 소속으로 초대 월드컵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다만 실제로 경기 출전은 하지 못했다.
- 롤로가 1939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득점왕에 오를 때 기록인 4경기 7골은 다비드 아레야노의 기록과 같으며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역사상 경기당 득점에서 최고의 기록이다.
- 롤로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통산 24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페루 대표팀 역사상 최다 코파 아메리카 출전 기록이다. 또한 그가 기록한 15골 역시 페루 선수들 중 코파 아메리카 최다골 기록이자 역대 득점 랭킹 3위의 기록이다.
-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롤로는 우니베르시타리오, 알리안사 리마, 아틀레티코 차콜로, 칠레의 콜로-콜로 선수들을 모아 만든 연합팀의 일원으로 유럽 투어에 참가했다. 총 39경기를 치렀으며 상대팀 중에는 FC 바르셀로나, 셀틱 FC, FC 바이에른 뮌헨 등이 껴있었다. 롤로는 이 투어에서 팀내 최다득점자였다.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3]
- 페루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6회: 1934, 1939, 1941, 1945, 1946, 1949
- 페루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3회: 1932, 1933, 1940
6.1.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1회: 1939
6.1.3. 개인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회: 193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회: 1939
- 페루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7회: 1932, 1933, 1934, 1939, 1940, 1942, 1945
분류
- 1913년 출생
- 1930년 데뷔
- 1953년 은퇴
- 1996년 사망
- 리마 주 출신 인물
- 페루의 남자 축구 선수
- 남자 축구 공격수
- 클루브 우니베르시타리오 데 데포르테스/은퇴, 이적
- 원클럽맨/축구
- 페루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 1935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페루 참가 선수
- 1937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
- 1939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페루 참가 선수
- 1941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칠레 참가 선수
- 1942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루과이 참가 선수
- 1947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에콰도르 참가 선수
- 페루의 올림픽 참가 선수
- 1936 베를린 올림픽 참가 선수
- 페루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