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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흐마메드 알리야조프


파일:낫과 망치.svg 타흐마메드 알리야조프 파일:낫과 망치.svg
Tahmam Aliýazow
<colbgcolor=#cd1000> 출생 1946년 3월 13일
소련 투르크멘 SSR 다쇼구즈
학력 카라쿰 고등학교(1962~1965)
소비에트군관학교 (1966~1969)
배우자, 후손 알리아 제누(1970~)
슬하2녀, 1남
사망 2003년 11월 3일
시리아 다마스쿠스
최종계급 소련군 대좌
체첸군 중사
참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82년 우크라이나 반란 사태
8월 쿠데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1차 체첸 전쟁
2차 체첸 전쟁

1. 개요2. 일생
2.1. 스탈린 시대 (1946~1953)2.2. 흐루쇼프 시대 (1953~1964)2.3. 브레즈네프 시기 (1964~1982)2.4. 안드로포프 ~ 체르넨코 시기 ~ 고르바초프 시기2.5. 소련 해체2.6. 체첸 전쟁2.7. 시리아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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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이다. 소련의 충성을 굳게 다짐했던 장교였으나, 1990년부터 고르바초프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약 10년간 반란군으로 활동하였다.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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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임관식.

2.1. 스탈린 시대 (1946~1953)

1946년 3월 13일, 소련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다쇼구즈에서 평범한 부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의 거주 정책으로 세워진 신식 아파트에서 태어난지라 괜찮은 유년시기를 보내었다고 한다.

어머니 마야 쿨리예바는 직업이 가정도우미 였으며 아버지는 타흐마메드 카르바치드(Tahmamed Karwasid, 1915~) 러시아 제국시기의 군인 집안으로 태어나 당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소련에서 로마노프 황제의 급진적인 가문 대우로 괜찮은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대우는 그가 7살이던 1922년 볼셰비키애 의해 루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대우정책은 끊길지라도 투르크메니스탄의 광활한 농지에서 밀 사업을 하며 안정적인 생활은 이끌어 나갈수 있었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배신으로 일어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26살의 나이에 소련군 일병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1945년 경 전역하여 고향인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알리야조프는 차남으로, 형제는 큰형 1명, 누나 1명이 있었는데 큰형 타흐마메드 노무샤예프(1939~1942)와는 밝은 성격으로 사이가 좋았으나 누나 타흐마메드 알리샤와는 삐뚤어진 성격으로 알리야조프가 거리를 뒀고, 시간이 지나 알리샤와는 소련의 매춘부가 된다.

2.2. 흐루쇼프 시대 (1953~1964)

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기록은 서적 누락으로 인해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기록은 2012년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리 체호프(Юрий Чехов, 1972~)에 의해 밝혀졌다. 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카스피해와 맞닿아 있는 발칸 주에 위치한 카라쿰 고등학교에서 10대의 마지막을 보내었고 종종 취미로 카스피해 해변에서 친구들과 수영이나 운동을 즐기거나,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그 당시 소련은 브레즈네프의 흐루쇼프 축출로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 물갈이가 일어났었던 시기이다.

2.3. 브레즈네프 시기 (1964~1982)

196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련의 군사 대학교 소련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당시 소련의 기준에서는 그는 무슬림에, 소수민족이었지만 뛰어난 학벌로 소련군관학교에 입학할수 있었다. 입학 뒤 소비에트 학사학위 소정의 선발시험을 거쳐 사관후보생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소비에트 육군학생군사학교에 입교하여 약 20주간의 의 군사교육을 러시아 SFSR에서 이수한 뒤 소좌 계급을 수료받아 그의 소련군 생활은 시작된다.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자 1985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사찰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여담으로 1983년 당시 산악 지대와 협곡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에서 소련군들이 게릴라 전을 펼칠때 이슬람권 전역에서 무자헤딘들이 소련군들에 대항하고자 그가 사찰중이던 판지시르 협곡으로 몰려들어 그도 RPG-7 공격에 죽을 뻔 했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앞에있던 BMP-2로 목숨을 건졌다. 잠시 소련에 있던 1982년에는 우크라이나 나치 무장집단이 우크라이나 SSR Bong-ha 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소비에트 차량화523소총사단, 소비에트차량화518소총사단 부대에 돌격 명령을 내려 무장집단들을 격파하였다. #

그러다 1982년 11월 10일, 약 18년간 소련을 통치하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세상을 떠났는데, 알리야조프는 그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로 달려가 ‘오늘 소련은 심장을 잃었다’ 라고 회고하였을 정도로 브레주네프 서기장에 대한 존경심은 극에 달했을 정도였다.

2.4. 안드로포프 ~ 체르넨코 시기 ~ 고르바초프 시기

1986년 체르노빌 폭발 사고가 일어나 우크라이나 SSR 국토 서부의 대부분이 방사능으로 뒤덮이자 소련군 지휘부와 함께 우크라이나 인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고 사고 수습 병력을 파견하였다.
우크라이나 인민들이여, 안심하십시오. 안전합니다.
1986.4.26
알리야조프는 무슬림 민족주의자 사상을 가졌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계였기에 우크라이나를 아낌없이 대하려 노력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혹은 그 외의 어떠한 형태이든,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내재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동구권의 몰락의 중심에는 공산권의 핵심인 소련마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균형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려는 개혁 개방에 대한 급진적인 정책으로 위기감을 느끼자 그는 보수파들과 고르바초프 정부에 대항했다. 이 때 부터 알리야조프는 반란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1991년 발트 3국과 조지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와 남오세티야에서 민족간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폭력으로 눌러서라도 연방 체제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1990년 6월 12일에는 러시아 공화국에서 주권 국가 선언을 통해 러시아 공화국에서 소련의 법률을 정지시켰다.

1991년 8월 21일, 크렘린 정부에 대한 쿠데타가 실패하고 별장과의 통신이 재개되자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그들의 해산을 명령했다. 소련 검찰총장은 쿠데타에 대한 진상 조사에 착수하며 알리야조프와 주변 측근들은 해임되었다.

2.5. 소련 해체

1991년 겨울 소련이 해체되었음에도 소련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의 성향은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지만 옐친 행정부에 대항하는데 적절하다 판단하여 1992년 러시아 연방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옐친 행정부의 경제개혁 실패에 분노했고, 그 결과 공산당 및 좌익계열 정당과 민족주의 계열 극우정당이 대거 약진하게 되었으며 그틈을 타 적극적인 선거활동을 벌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관료 내 옐친의 개혁에 반감을 품은 인사로 활동한 민주화 투사로서의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최고회의가 비협조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거부하자, 옐친은 점차 행정명령 등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한다고 판단한 최고회의는 부통령이었던 알렉산드르 루츠코이와 손잡아 옐친을 탄핵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물론 이대로 가다가는 당장 정치적인 파국이 몰아닥칠 걸 직감한 러시아 정부에서는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대선, 총선의 조기선거에 대한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선거 결과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대선과 총선의 미실시로 결론났으며 옐친이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이 10월 혁명과 같은 무력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을 완벽히 제압하여 러시아 공산주의 집권시도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2차 쿠데타도 실패하고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를 완전히 떠나 다게스탄 공화국 무슬림 거주지로 이전했다.

2.6. 체첸 전쟁

독립을 선언한 혼란과 분열로 빠져들어가던 체첸의 두다예프 정부에서 강력한 비체첸인 차별 정책을 펼쳤는데, 당시 내전 위기가 치닫던 1994년 초에 러시아 옐친 행정부를 타파하기 위한 목적과 강한 그의 무슬림 민족주의의 야심으로 체첸군에 가담했다. 불과 15년전에는 소련군 편에 서 무자헤딘을 격퇴하였지만, 1994년에는 무자헤딘과 무슬림 세력과 손잡아 러시아에 대항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이 1999년에 러시아 연방의 다게스탄 공화국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연방 정부는 3년뒤 체첸을 공격해 수복하기로 결정했다. 제1차 체첸 전쟁과는 달리 러시아 측에서도 철저한 대비를 했고, 반대로 체첸 측은 내부 분열로 인해 상당히 허약해져 있었다.

결국 1999년과 2000년 사이에 있던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점령 작전으로 인해 체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뒤로는 남부 산악 지대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체첸군의 반인륜적 행위 및 테러로 인해 이들을 옹호하던 체첸 민족주의자들 및 서방권도 점차 등을 돌렸고, 하나둘 러시아군에 의해 소탕되었고 체첸군을 5년간 알리야조프도 반국가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러시아 연방 법원 재판의 족쇄에서 풀려났다.

2.7. 시리아에서 사망

망명지에서 여러 번 알리야조프에 대한 암살이나 테러 음모가 있었으나, 알리야조프 여러번 죽을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았다.

러시아 캅카스를 떠나며 중동 지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무도 모를것만 같았던 10평짜리 주택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모면했지만, 결국 2003년 3월 13일, 러시아 안보부에서 보낸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자 엘살도 바그다드가 쏜 [AEK-919K에 피격되어 다마스쿠스의 한 거리에서 숨졌다.

엘살도는 이라크인으로 FSB에 포섭되어 트로츠키 암살의 특명을 받아 그의 집주소, 신상정보들을 알아내었다. 피격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군중들이 경찰에 신고하였으나, 암살자 엘살도는 재빠르게 도망가 미수사건으로 종결되었다. 그 당시 열악하였던 감시카메라 시스템에서도 건질게 없으니 말이다. 피습이후 알리야조프는 복부에 총상을 입고 얼마간 의식이 있었으나 곧 혼수상태에 빠졌고,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사경을 해메다 피격 하루 후, 총상으로 인해 잠시 발작하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