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พรรคไทยรักไทย태국에 존재했던 정당으로, 현재 태국인당의 전신이다.
2. 명칭
흔히 "타이락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태국인은 태국을 사랑한다", 또는 "태국을 사랑하는 태국인"을 의미한다.영어로는 태국어명을 그대로 옮겨 적으며 따로 번역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어지간한 태국 정당들이 다 그렇지만.
3. 역사
1998년 7월 14일 기업인인 탁신 시나와트라에 의해 창당되었다.탁신은 원래 기업인 출신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재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앙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곧바로 1994년 추안 릭파이 총리( 민주당 소속)에 의해 외무장관으로 등용되었다. 이듬해 부총리로 직행하는데 정치 경험도, 그렇다고 정무직공무원도 아니었던 사람이 이렇게 급부상한 것은 어쩌면 대단한 천운일지도.
이렇게 탁신은 민주당 정부에 의해 등용되었고, 당연히 민주당이 탁신 영입을 노렸지만... 탁신 본인이 거절했다. 탁신이 정치 활동을 하면서 민주당 정권 하에서 부패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민주당도 군부와 다를 바 없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탁신은 정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으며 본인의 인기에 힘업어 애국당을 창당했다. 때마침 IMF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자 민주당 정부의 지지율은 급락했고[1] 애국당은 경제 회복을 내세워 지지율을 더욱 더 불려 나갔으며 2001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어 처음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애국당은 낙후된 북부 지역 농민들의 지지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재벌을 포함한 기득권 중심이 아니라 대중 중심의 정책을 펼쳐 나갔다. 특히 북부의 농민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채무자들에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내세워 이들의 재정 문제를 대대적으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 지원금 등 당시 어려운 민생을 대폭 해결하면서 국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은 온갖 포퓰리즘의 온상이었으며 빈민층들을 지원하는 대신 기득권층을 도외시했다. 이러한 탁신의 행보는 기득권층과 군부의 반감을 제대로 사게 되었으며 심지어 방콕을 포함한 대도심 지역 주민들마저 탁신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2] 게다가 탁신의 부패상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국민들 사이에 "기득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덤.
이 때문에 2005년 총선을 장담하기는 힘들었으나 오히려 의석을 더 늘리면서 승승장구했다. 이에 기득권층의 반발이 더욱 더 심화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전방위적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년 만에 재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되레 기득권 중심의 야권이 보이콧하면서 500석 중 무려 460석을 차지했는데 40석이 공석인 관계로 사실상 500석 전체를 장악했다.
결국 불만을 품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탁신은 축출되었고 이 당도 2007년 5월 30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아 해산되었다. 덩달아 111명의 국회의원들에 대한 피선거권도 박탈되면서 애국당은 10년도 못 가 폐점하게 되었다. 일부 인사들이 자매 정당인 인민역량당으로 입당해 탁신을 계승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당연히 이를 알아챈 헌법재판소가 인민역량당까지 해산시켰다.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한 애국당이지만 그간 군부-민주당의 보수양당제의 종말을 고하며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태국의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라도 향상되는 데 기여했다. 현재도 태국인당 등으로 이어지고 탁신의 여동생인 잉럭 시나와트라가 집권하는 등 지금까지도 태국 정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사실 경제 위기가 아니어도 예상은 되어 있던 일인데 이는 민주당이 민의로 집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릭파이도 민의로 집권한 사람이 아니다.
[2]
당연히 탁신의 정책들은 저소득층과 1차 산업 종사자들이 타겟이라 고소득층이 많고 3차 산업 종사자들 중심의 도심 주민들이 지지를 보낼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