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이 나오코
河合 奈保子 | Naoko Kawai |
|
|
|
<colbgcolor=#B0E0E6> 본명 | [ruby(金原, ruby=かねはら)] [ruby(奈保子, ruby=なほこ)] (카네하라 나호코, Nahoko Kanehara)[1][2] |
출생 | 1963년 7월 24일 ([age(1963-07-24)]세) |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現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노에구) |
|
국적 | 일본 |
신체 | 159cm, 48kg, O형 |
가족 |
아버지 카와이 오사후미 어머니 카와이 세츠코 여동생 카와이 유카리(1966년생)[3] |
배우자 | 카네하라 타카야스(1996.02.06 결혼 ~ 현재) |
자녀 |
아들 카네하라 호타이(1997년생) 딸 카네하라 카호(1998년생) |
학력 |
오사카 시립 코하마 초등학교 (졸업) 시립 스미요시 중학교 (졸업) 오사카 여자학원 (전학)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 (졸업) |
직업 | 前 가수, 배우 |
활동 기간 | 1980년 ~ 1996년 |
서명 |
[clearfix]
1. 개요
|
미소가 산뜻한 카나리아 걸 ほほえみさわやか カナリー・ガール ― 캐치프레이즈
|
일본의 전직 아이돌, 가수, 배우, 작곡가이며 현재는 전업주부로 전향해 호주에 거주하고 있다.
애칭은 ‘나오나오(なおなお)’
2. 활동
1979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오코는 라디오의 스위치를 켜 놓은 상태로 2학기의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사이죠 히데키의 이름을 걸고 "히데키의 동생을 찾는 오디션" 광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그 때 책상을 나란히 놓고 공부하던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여동생인 유카리가 "언니 신청해봐" 라고 말하며 나오코의 얼굴을 바라봤다고 한다.여동생의 건넨 그 말에 문득 마음이 움직여, 오디션의 마감일에 안리의 <オリビアを聴きながら (올리비아를 들으면서> 라는 곡을 불러 데모 테이프를 보내 응모를 하게 되며 결승 진출 나오코가 부른 버전 원곡 가수인 안리와 함께 부른 버전, 1980년 도쿄에서 이루어진 결승 대회에서 이시노 마코의 <春ラ!ラ!ラ!>를 불러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나오코가 부른 버전 원곡 가수 이시노 마코 앞에서 부른 버전
1980년 6월 1일, < 大きな森の小さなお家 (큰 숲의 작은 집)>라는 곡으로 아이돌 데뷔를 이뤘다. 당시 데뷔 동기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80년대의 전설적인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다.[4]
마츠다 세이코와는 데뷔 동기로서 방송에서 자주 엮이거나 공연을 같이 했고, 실제로 서로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1985년 이루어진 마츠다 세이코의 결혼식 축사도 나오코가 담당했다.
대표곡은 < スマイル・フォー・ミー>(1981), <영 보이(ヤング・ボーイ, 1980)>, < 싸우지 말아요 (けんかをやめて)> 등.
초기에는 전형적인 80년대 아이돌스러운 귀엽고 밝은 곡을 노래하다가 1984년부터 앨범 제작에 관여하거나 직접 작곡, 작사를 하는 등 타고난 가창력 뿐만이 아닌, 단순히 아이돌을 벗어나 음악적인 면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이 시기 일본에 진출한 데이비드 포스터 사단이 처음으로 협업한 일본 아티스트가 바로 나오코였을 정도.
하지만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던 곡은 1985년의 < 데뷔~Fly Me To Love~ (デビュー ~Fly me to love~, 1985)>가 유일한데, 역대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곡은 1983년 6월 1일에 발매된 싱글 <에스컬레이션(エスカレーション)>으로 총 34만 9천장이 팔렸다.
NHK 홍백가합전에는 1981년( 제32회)~1986년( 제37회)까지 총 6회 출장했다. 80년대 여성 아이돌 누적 음반 판매량은 422만 장 1천장으로 4위.[5]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꾸준히 롱런했던 편에 속했다.
3. 은퇴
1990년대에 들어서도 스스로 작곡을 도맡으며 아티스트로서 왕성히 음악 활동을 해나가던 도중, 1996년에 헤어 아티스트인 카네하라 타카야스(金原 宜保)[6]와 결혼. 이듬해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연예계를 은퇴하였다.4. 기타 연예 활동
|
나중에는 그래도 보험 회사 CF나 라이온 샴푸 CF 같은 것도 찍긴 했는데, 앞서 전술한 위 두 회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뭐 히타치나 하우스 식품 공업이 구린 회사는 아니지만...[9][10]
연예계 은퇴 이후엔 쭉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06년, 아이튠즈 스토어에 자작 피아노 앨범인 "nahoko 音" 를 발표하여 오래간만에 활동을 보였다. 2008년에는 싱어송라이터 타케우치 마리야의 블로그에 함께 만난 근황이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https://mariya30th.exblog.jp/9109988/
2010년, 한 일본 은행 회사의 CF 삽입곡으로, 오사카 지역 방송에 송출된 CF 하단에 자막으로 카와이 나오코의 저작권 표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극장판 애니메이션 " 루팡 3세 바빌론의 황금전설"에서 성우로 참여한 적이 있다. 배역은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노파인 "로제타"의 정체 역할로 실제 애니메이션에서 그 정체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카와이 나오코는 해당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인 "MANHATTAN JOKE"와 삽입곡 "SONG OF BABYLON"을 부르기도 하였다.
2018년, 같은 기획사 소속이었고 카와이 자신이 연예계에 데뷔할 계기를 열어준 사이죠 히데키가 63세로 사망하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히데키 씨에게 그저 너무나도 커다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라고 오랜만에 공개 메시지를 보냈다.
5. 여담
-
출생 시 2.4Kg의 미숙아로 태어나 그 영향으로 시력이 엄청나게 나쁘다. 고도 근시로 시력은 양쪽 모두 0.04. 시력 때문에 1981년 10월 5일 NHK 프로그램 "렛츠고 영" 무대 리허설 도중 4미터 아래의 구멍으로 추락해 (구멍을 못 보고 그냥 지나감) 요추 골절상을 입어 2달 정도 입원 한 경력이 있다. 원래부터 안경을 잘 착용하지 않았으나[11], 그 사건 이후로 정규 무대를 제외하고는 꼭 안경을 착용하였다고 한다.
<nopad>
- 위 사건 이후 나오코를 걱정한 어머니와 여동생이 도쿄로 상경하기도 했다고.[12]
- 프로듀서가 인터뷰에서 말하길 나쁜 시력 탓에 인사한 사람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기에 판별이 되지 않아 웃어넘기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문에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어서 잠시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인사도 못하는 거만한 여자라는 평판이 나왔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 사건으로 계속 안경을 착용하기 전에는 스케줄 현장에 들어선 후 누군가 오면 사무실 직원이 바짝 붙어 귓가에 "○○씨가 왔으니 인사해 주세요"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 해삼과 벌레를 굉장히 싫어한다고 한다. 어찌나 싫어했던 지, 자그마한 것은 귀여워서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편인데 벌레 만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도 했으며 또한 해삼은 지구 상의 생물이 아닌 것 같다고, 해삼은 음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 1985년 홍백에서는 바로 앞 무대였던 가수 킷카와 코지가 괴상한 퍼포먼스[13]를 해대는 바람에, 곡 시작 후렴을 통째로 부르지 못하는 큰 해프닝이 있었다. 카와이의 뒤에서 폼폼을 들고 준비하고 있던 백댄서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티나지 않게 타이밍을 본 후 백댄서들에게 신호를 주고 곧 노래를 이어갔다.[14] 당시 영상을 보면 카와이뿐 아니라 무대 뒤쪽에 앉아있는 다른 출연자들 모두 표정이 굳어있다. 나중에 킷카와 코지가 직접 정식으로 사과했을 때, '이미 지난 일'이라며 흔쾌히 받아주었다고.
- 카와이 나오코의 싱글에는 두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15] 이 두 노래가 정규 앨범으로 합쳐져 나올 때 두 노래의 가사는 같지만 악센트나 음악 인트로 같은 것이 새롭게 바뀌어 수록된다. 그러니까 노래를 다시 불러 수록하고 있는 것. 만약 싱글과 정규앨범을 둘 다 산 사람들은 이 노래를 번갈아 듣는 것도 재미라고.
-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나오코의 아버지께서 나오코를 매우 예뻐했는데 한 일화로 "어린 시절 저는 잠을 잘 못 자는 아이였는데, 매일 밤 늦게까지 깨어있던 저를 재우기 위해, 아버지는 매일 밤 드라이브에 데려가 주셨다고 해요. 저는 기분이 좋든 나쁘든 조수석에 태워지면 늘 싱글벙글했고. 집 주위를 차로 빙글빙글 돌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화목한 가정 덕에, 후술하겠지만 나오코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해 미담이 많았다.
- 유치원 시절까지 아버지의 전근 때문에 자주 이사를 했다고 한다. (약 6번) 유치원도 3번 정도 바꿨는데, 그래서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에는 계속 전학 가고 싶지 않으니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기로 약속해달라 했었다고. 결국 아버지께서 나오코를 위해 여러 노력을 하여 아이돌 활동을 위해 고등학교를 전학 간 것을 제외하면 초중고 모두 전학 없이 졸업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많은 희생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감사하고 보답하지 못해 부족한 마음으로 가득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 아이들을 좋아해 초등학교 시절의 꿈은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유치원 교사(보모)였다.
- 초등학교 1학년부터 피아노를 배워 연주를 잘한다.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며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친한 후배 가수 나카모리 아키나의 세컨드 러브 무대에 직접 코러스와 피아노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 오디션 프로그램 ' 스타 탄생!'에 지원했지만, 서류 전형에서 불합격했다고 한다.
- 데뷔 전 윗니에 왼쪽 오른쪽 모두 덧니가 있었지만, 방송 첫 출연 전에 나오코 기준 왼쪽의 이는 교정하였고, 25살 때 홍콩 진출 초기에 성룡의 조언으로 오른쪽 이도 교정하였다. 두 교정 모두 단시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정기를 부착한 것이 아닌 라미네이트 방식으로 교정한 걸로 보인다.
-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아이돌 후배인 오카다 유키코가 나오코의 열렬한 팬이였다.[16] 더 톱텐에 나오코와 출연했을 당시 직접 그린 나오코의 초상화를 나오코에게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영상유키코의 사후 발매된 자서전 이름이 카와이 나오코의 곡 이름일 정도.[17]
|
- 당시 아이돌 중 눈에 띄는 글래머 몸매의 소유자로, 방송에서도 종종 수영복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특히 1982년 만 20세에 발매된 그녀의 중고 사진집은 30년을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중고 시장에서 4만 엔(40만 원가량) 정도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2016년에는 전성기 시절 모습이 담긴 수영복 화보집 '月刊平凡GOLDEN BEST!! vol.1'이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새롭게 발매되었다. 동시에 나온 후카다 쿄코의 사진집보다 훨씬 잘 팔렸다고 한다.
- 하지만 나오코 본인은 완벽한 몸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 "날씬한 세이코가 부럽다" 라고 말하기도 했고, 데뷔 직후 주간 소년 챔피언(週刊少年チャンピオン)이라는 잡지의 1980년 44호 315페이지의 인터뷰에서 "뚱뚱해서 수영복을 입는 건 창피해요" 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데뷔 당시부터 나오코의 사진 촬영을 맡았었던 사진가인 쿠로사카 료지(黒坂了司)의 말로는 "수영복 촬영을 싫어하거나 가슴에 신경을 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고 말했는데, 나오코의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
글래머한 몸매는 당시 나오코에겐 큰 콤플렉스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남자애가 놀린 기억이 좋지 않게 남았고, 계속해서 몸매로 남자들에게 관심을 받은 탓에 남자가 무서워지기도 했다고. 겸손이 아닌 진심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당시 80년대 일본에서는 방송에서도 여자 아이돌에게 "가슴이 커진 것 같다"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시대였음에도, 나오코를 배려하여 소속사 스태프들에게 '나오코 앞에서 가슴이 크다는 화제는 절대 꺼내지 말아 달라'라고 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가슴의 무게에 의한 어깨 결림이 정말 잦아, 대기실에서는 근시로 인한 눈의 피로 + 어깨의 피로로 인해 관자놀이와 어깨를 자주 마사지했다고 한다.
|
- 1998년생인 장녀 카호가 2013년 kaho라는 예명으로 갑작스러운 가수 데뷔를 하였는데, 어릴 적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어 12세 때부터 작사 작곡을 하던 데모 테이프를 소니 뮤직에 전달하여 데뷔가 결정되었다. 수십 년간 미디어에 나오지 않은 카와이 나오코의 딸이라는 점과 해외에서 음악을 공부한 어린 소녀라는 이미지로 화제가 되어 과거 어머니가 유명한 가수였던 우타다 히카루 노선으로 나갈 생각으로 보였으나 2014년, 1년 만에 소니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지금은 학업을 중시하고 싶다"라는 생각이라고. 때문에 현재는 완전한 은퇴 상태이다.
- 킷카와 코지 사건으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대인배이기도 했다. 은퇴하기 전까지 스캔들 하나 없었으며, 천사[18]같은 성격으로 예의도 엄청 발랐다고 한다.
- 친한 사이인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한 적이 있다. 세이코는 무척 바쁜 스케줄 때문에 포기했지만 나오코는 1988년 4월 28일에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참고로 17일간의 단기 집중 코스로 들었으며 아침에 제일 먼저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6시간 정도 받았다고 한다.
6. 싱글 디스코그래피
<rowcolor=#FFFFFF>발매일 | 제목 | 순위 |
1980.06 |
<colbgcolor=#F0F8FF><colcolor=#1f2023>
큰 숲의 작은 집 (大きな森の小さなお家) |
36위 |
1980.08 |
영 보이 (ヤング・ボーイ) |
13위 |
1980.12 |
사랑하고 있어요 (愛してます) |
14위 |
1981.03 |
17세 (17才) |
11위 |
1981.06 |
Smile for me (スマイル・フォー・ミー) |
4위 |
1981.09 |
문 라이트 키스 (ムーンライト・キッス) |
11위 |
1981.12 |
러브레터 (ラブレター) |
11위 |
1982.03 |
사랑을 주세요 (愛をください) |
7위 |
1982.06 |
여름의 여주인공 (夏のヒロイン) |
7위 |
1982.09 |
싸우지 말아요 (けんかをやめて) |
5위 |
1982.12 | Invitation | 8위 |
1983.03 |
스트로우 터치의 사랑 (ストロー・タッチの恋) |
9위 |
1983.06 |
에스컬레이션 (エスカレーション) |
3위 |
1983.09 |
UN밸런스 (UNバランス) |
4위 |
1983.12 |
물음표 (疑問符) |
4위 |
1984.03 |
미풍의 멜로디 (微風のメロディー) |
7위 |
1984.06 |
컨트롤 (コントロール) |
7위 |
1984.09 |
입술의 프라이버시 (唇のプライバシー) |
4위 |
1984.12 |
북쪽 역의 Solitude (北駅のソリチュード) |
6위 |
1985.03 |
젤러스 트레인 (ジェラス・トレイン) |
6위 |
1985.06 |
데뷔 ~Fly me to love~ (デビュー ~Fly Me To Love~) |
1위 |
1985.10 |
라벤더 립스 (ラヴェンダー・リップス) |
5위 |
1985.12 |
THROUGH THE WINDOW ~달에 내리는 눈~ (THROUGH THE WINDOW〜月に降る雪〜) |
7위 |
1986.04 |
눈물의 할리우드 (涙のハリウッド) |
7위 |
1986.07 |
찰나의 여름 (刹那の夏) |
10위 |
1986.11 |
하프 문 세레나데 (ハーフムーン・セレナーデ) |
6위 |
1987.03 |
추억의 코니즈 아일랜드 (想い出のコニーズ・アイランド) |
|
1987.07 |
열여섯 번의 밤 이야기 (十六夜物語) |
10위 |
1988.03 |
슬픈 사람 (悲しい人) |
21위 |
1988.07 | Harbour Light Memories | 18위 |
1989.11 |
슬픔의 애니버서리 (悲しみのアニバァサリー) |
74위 |
1990.04 |
미・래 (美・来) |
74위 |
1990.09 |
잠들고, 잠들고, 잠들고 (眠る、眠る、眠る) |
97위 |
1992.06 | Golden sunshine day | |
1993.10 |
인게이지 (エンゲージ) |
|
1994.03 |
꿈의 흔적에서 (夢の跡から) |
60위 |
[1]
결혼 전 본명은 카와이 나호코.
[2]
가수 데뷔 후 어감상의 문제로 카와이 나오코로 데뷔하였다. 한자는 동일.
[3]
스타의 가족들이 나와 노래를 하는 방송에 나오코도 출연한 적이 있다.
# 가족 모두 출연했으며, 여동생인 유카리가 노래를 시작하자 대단한 노래 실력에 심사위원이 놀란 표정을 짓기도 했다.
[4]
또 다른 사람으로는 '
카시와바라 요시에' 정도가 있다. 참고로 카시와바라 요시에와 카와이 나오코는 데뷔일이 1980년 6월 1일로 똑같다. 게다가 같은 오사카 출신으로 그 때문인지 나오코가 요시에보다 나이는 두 살 정도 많았지만, 마치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1982년 1월 14일 방영된
더 베스트 텐에서는 서로에게 평소 애칭으로 부른다는 나오나오 (나오코), 요시요시 (요시에)라는 애칭을 쓰며 오사카벤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추에이션이 있다.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 두 인물이다.
[5]
80년대 부동의 원투탑인
마츠다 세이코(1210만 장),
나카모리 아키나(1046만 장)와 인간계 선두주자인
코이즈미 쿄코(566만 장) 다음이다.
[6]
우타다 히카루의 전성기 앨범 자켓의 헤어를 담당.
[7]
카와이 나오코의 소속사인
컬럼비아 레코드의 당시 대주주가 히타치 제작소였다.
[8]
나오코의 연예계 데뷔 계기가 되었던 사이죠 히데키 여동생 콘테스트의 스폰서가 하우스 식품 공업, 나오코 데뷔 전 하우스 식품의 전속 모델이 사이죠 히데키였다.
[9]
동기인 마츠다 세이코는 당시 "천하의 소니" 의 전속 모델이었다. 뭐 애초에 소속 음반사가 소니 뮤직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10]
그냥 단순한 소니 VS 히타치의 벨류 문제가 아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히타치에서 나온 세탁기, 청소기, 전자레인지 등의 백색 생활 가전에만 광고 모델로 기용되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참고로 마츠다 세이코가 소니에서 찍은 CF는 워크맨, MSX 호환 기종, 베타맥스 등의 초 특급 하이테크 제품 (당시에...) 이였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대중적인 제품들의 CF에서 활약한 셈이니 그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어필할 기회가 많았을지도?
[11]
소속사의 방침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12]
완전한 이사는 아니고 당시 일찍 복귀하기 위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음에도 코르셋을 차고 활동했던 나오코를 완벽히 회복할 때까지 돕기 위해 올라온 걸로 추정된다.
[13]
붉은 옷을 입고(남자 가수는 백팀이다) 등장해 샴페인을 뿌려대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곡이 끝난 뒤에도 무대에 남아 자기 기타에 불을 붙이고 박살을 냈다. 자기 말로는
지미 헨드릭스의 퍼포먼스 재현...이라지만 사실 따로 사정이 있었다.
[14]
카와이 나오코 다음 무대였던 시부가키대도 무대에 뿌려져있던 샴페인 때문에 춤을 추다가 미끄러졌지만 시부가키대 멤버인 후카와 토시카즈와 킷카와 코지가 절친한 사이라 그냥 넘어갔고 후일 미끄러진 것은 사전에 예정된 퍼포먼스라고 후카와가 밝혔다. 당시에 불렀던 곡인 スシ食いねェ!(초밥을 먹네!)가 개그 송이였기 때문. 킷카와 코지는 잠시 NHK 출연정지 처분을 당했고 4~5년 뒤에 POP JAM에 출연하면서 출연정지가 풀린다. 84년에 모니카라는 데뷔곡으로 대히트를 쳤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한동안 욕도 먹고 해당 행위로 본인도 화상을 입었다(…).몇 년 뒤에 소속사에서 독립하고 호테이 토모야스와 결성한 유닛 COMPLEX로 전성기적 인기를 회복한다.
[15]
초기 아이돌 시절 노래만
[16]
생전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같은 아이돌로서 존경하는 인물은 세이코, 좋아하는 사람은 나오코라고 언급 했을 정도.
[17]
단, 사후에 출판되었으므로 본인이 직접 지은 제목은 아니지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생전에 고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 이름을 붙인 것인지까지는 불명.
[18]
후배들에게 천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반대로 후배들에게 똥 군기를 잡았다는 코이즈미 쿄코는 "악마" 라는 불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