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8세의 나이에 플루미넨시 1군 팀에 데뷔하여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히우-상파울루 컵에서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CR 바스쿠 다 가마, CR 플라멩구, 보타포구 FR과 같은 강팀들을 누르고 3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만 18세에 불과한 라이트백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활약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고, 브라질 각지의 언론이 아우베르투를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자우마 산투스의 뒤를 이을 신동이 나타났다면서 브라질 전역에서 난리가 났다.
1963년의 대활약을 통해 브라질 언론 '아 가제타 에스포르치부'의 메인 페이지에 얼굴을 실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우베르투는 1963년 4월
팬아메리칸 게임을 위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고, 네 경기 모두에 출전하여 미국을 10-0으로 눌러버리는 등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다. 10대의 나이에 제법 큰 대회에서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
팀 동료 프로코피우, 마르시우와 함께
여튼 아우베르투는 엄청나게 주목받으며 스타덤에 올랐고, 수많은 브라질 선수 중에서도 당시 장래가 가장 기대되는 선수로 첫손에 꼽혔다. 팬아메리칸 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캄페오나투 카리오카(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고, 플루미넨시는 플라멩구와 승점 1점 차이로 2위를 기록하며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2월~3월에 열린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지난 시즌과 달리 팀 전체가 부진하며 10개 팀 중 9위를 기록했다.
1964년 5~6월에 있었던 국제대회 '타사 다스 나소잉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우베르투는 자이르지뉴와 함께 만 19세의 나이로 최연소 멤버였다. 비록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지만, 아우베르투는 새로운 시대의 브라질을 이끌 스타로 널리 인정받았다.
국가대표팀 선배 자우마 산투스와 함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여름에 개막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도 변함없는 기량을 펼쳐보이며 플루미넨시 최고의 스타로서 팀의 선전을 이끌었고, 플루미넨시는 1964년 주립 리그에서 24경기 15승 5무 4패 44득점 16실점이라는 훌륭한 기록으로 정규 시즌 공동 1위를 차지했다. 공동 1위였던 방구 AC와 승점이 같아 결승전 두 경기를 통해 우승팀을 가리게 되었는데, 아우베르투는 두 경기에서 모두 선발 출전하며 1차전에서는 1-0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에서는 3-1 승리를 이끌었다. 플루미넨시는 5년 만에 자신들의 주립 리그 타이틀을 되찾았다. 그리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20세가 갓 된 나이에 팀의 레전드가 되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965년에도 플루미넨시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어느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플루미넨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국가대표팀 발탁을 자주 받기 위해서는 좀 더 좋은 팀에서 뛰어야 했다.
앞날이 밝아 보였던 만 20세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당연히 다른 팀들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아우베르투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팀 중에는 산투스 FC도 있었다. 여느 선수들과 다름없이
펠레의 빅 팬이었던 아우베르투는 산투스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고, 시즌 도중인 4월에 산투스 FC의 이적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965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가 한창이었던
4월에 펠레가 있는 산투스로 이적해 왔다. 이 때 이적료가 200,000
크루제이루였는데, 브라질 리그 역대 최고 이적료 신기록
이었다. 그만큼 많은 기대를 받았다는 뜻이다. 위대한 팀 '산타스치쿠스'의 아킬레스건은 다름아닌 '수비'였는데,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원숙한 기량을 뽐내며 브라질 최고 수준의 라이트백으로 올라선 아우베르투는 산투스로 이적하자마자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아우베르투의 가세 하에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받던 수비력 문제까지 해결되며(1964시즌에 비해 실점 수가 20골 가까이 줄어들었다) 주립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에서는 전에 없던 부진까지 겪으며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말이 무색한 수준의 성적을 기록한다. 그 성적이 어땠느냐 하면, 무려 1차 리그 최하위. 아우베르투, 지우마르, 하무스를 비롯한 수비진은 주립 리그에서와는 달리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8경기에서 24실점이나 내주고 말았다.
명백한 브라질 최강팀이었던 산투스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내리 전국 리그 타이틀을 방어하며 어느새 타사 브라지우 5연패에 도전하고 있었다. 디펜딩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바로 4강전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파우메이라스. 또 만났다. 서로가 지긋지긋한 사이였다. 1차전에서는 산투스가 4-2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서는 1-1로 무승부가 나왔다. 1승 1무로 앞선 산투스가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의 꾸준한 강호
CR 바스쿠 다 가마였다. 1차전에서 펠레는 무득점으로 침묵했으나 코치뉴가 한 골, 도르발이 두 골, 토니뉴가 두 골을 집어넣으며 5-1로 대승을 거두었다. 산투스의 5연패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2차전이 진행되었고 펠레가 결승골을 득점했다. 2승 0무 0패 승점 4-0으로 산투스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인 5연패였다. 1959년에 개막한 이후로 산투스가 1962년 2연패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두 번 우승한 팀조차도 없었는데, 어느덧 5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브라질의 전국 단위 대회를 5연패한 팀은 1961~1965년의 산투스 FC가 유일하다. 주립 리그도 아니고 전국 리그에서 달성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1965년 시대에 기여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산투스의 '위대한 시대'를 조금이나마 함께할 수 있었다.
1965년의 산투스 팀
산투스에 이적한 아우베르투는 난생 처음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했다. 산투스는 4전 전승 10득점 3실점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한다. 그런데 다음 상대가 좀 셌다. 아니 많이 셌다. 다름아닌
CA 페냐롤.
지금까지도 우루과이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페냐롤은 60년대 남미 팀 중 우승 트로피를 산투스만큼 많이 들어올린 몇 안 되는 팀이다. 거기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전통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여 왔다. 1962년 산투스가 우승했을 때의 결승전 상대 역시 이 팀이었다. 거기에 멤버들의 면면도 산투스에 밀리지 않았다.
알베르토 스펜세르라는 괴물 센터포워드가 있었고 측면에는 후안 호야가 있었으며
페드로 로차,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라는 슈퍼 클래스의 신인들이 있었다. 3차전 연장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 끝에 페냐롤의 호세 사시아가 천금 같은 골을 터뜨렸고, 결국 페냐롤이 결승전에 진출했다. 산투스는 결승의 문턱에서 좌절하며 우승의 꿈을 또 접어야 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도전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히우-상파울루 컵은 원래 2월 즈음에 개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1966년에는 1월과 3월 사이에 개최되었다. 조기 개최된 히우-상파울루 컵에서 팀의 에이스 펠레가 부상 때문에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산투스의 나머지 동료들이 충분히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펠레의 공백을 잘 메웠다. 결국 보타포구, 바스쿠 다 가마, 코린치안스와 함께 공동 1위를 기록해 우승을 달성했다. 히우-상파울루 컵은 1966년에 마지막으로 열린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우베르투는 여름에 열리는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으나,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자신과 월드컵 우승을 함께했던 베테랑
자우마 산투스를 더 선호했으므로 월드컵 대표팀에 아우베르투를 데려가지 않았다. 토스탕 정도를 제외하면 젊은 선수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완전히 노쇠한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겪었고, 이 결과에 책임을 지고 대부분의 주전 선수들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월드컵 이후 부상당한 펠레가 빠져 고생했던 1966년의 산투스 FC
산투스 그 자체였던 펠레가 월드컵 후유증으로 인해 시즌의 절반 정도 되는 기간동안 출전하지 못하며 팀 전체가 흔들렸고, 산투스는 주립 리그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역시 월드컵 직후 열렸던 전국 대회. 주립 리그 우승에 실패한 산투스는 전국 리그 타이틀만은 방어해야 했다. 타사 브라지우에는 4강전부터 참여했다. 4강전 상대는 페르남부쿠 주 챔피언 나우치쿠였다. 산투스는 예전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진땀을 뺐다. 승부를 못 내고 경기를 3차전까지 끌고 갔다. 그래도 꾸역꾸역 승리를 거둔 산투스는 결국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미나스제라이스 주 챔피언 크루제이루였다. 크루제이루에는 10대의 나이에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도 실패를 맛보고 돌아와야 했던 또 다른 신예가 있었다. 바로
토스탕. 토스탕은 7년 늦게 태어나 활동한 펠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월드컵을 제외하면 펠레와 정말 많이 닮은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 스타일도 아주 비슷했다. 크루제이루는 토스탕 외에도 윌송 피아자[1] 등 유명한 선수들을 꽤 데리고 있었다.
토스탕에게 실점을 허용하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지우마르
1차전은 싱거웠다. 그런데 평소였다면 산투스가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서 싱거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 테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산투스는 무려 6-2로 참패를 당했다. 경기 11분만에 제카를루스가 자책골을 넣으며 흔들렸으며 곧바로 토스탕에게 한 골을 허용했고 나타우에게 추가 실점을 허용했으며 지르세우 로페스에게는 해트트릭을 허용했다. 토니뉴 게헤이루가 두 골을 만회하긴 했지만 이미 점수는 4점 차로 벌어진 상태였다. 결승 2차전은 상파울루에 있는 파카앵부에서 열렸다. 경기 23분에 펠레가 한 골을 터뜨렸고 토니뉴 게헤이루가 한 골을 추가하며 2-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루제이루에는 토스탕이 있었다. 토스탕은 64분에 만회골 한 개를 터뜨렸고, 9분이 지나 나타우가 동점골을 넣었다. 그리고 지르세우 로페스가 경기 종료 직전에 골을 득점하며 산투스를 상대로 역전승을 기록했다. 산투스는 결승전 스코어 합계 9-4로 완패했다. 이것은 큰 충격이었다.
산투스는 1965년 타사 브라지우 우승팀이었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불참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비롯하여 펠레, 지투, 지우마르, 페페 등 산투스의 스타들이 1966년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뛰지 못했다.
시즌 개막 이전, 산투스의 최전성기를 이끈 감독 룰라(루이스 알론소 페레스)가 타사 브라지우 우승을 놓친 것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되었다.
바뀐 감독 하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산투스는 정규리그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득실차는 상파울루에 밀렸으나 승점이 같았고, 1959년에 파우메이라스를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이 플레이오프는 산투스가 승리했다. 에두와 토니뉴 게헤이루가 골을 터뜨렸고 상파울루의 바바[2]가 만회골을 득점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나며 산투스가 2-1승리를 거두었고 우승을 차지했다. 아우베르투의 두 번째 상파울루 주립 리그 우승이었다.
산투스는 1966년의 타사 브라지우에서 한 끗 차이로 우승을 놓쳤고 주립 리그에서도 파우메이라스에 선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1967년의 타사 브라지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즌 개막한 전국 대회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이었다. 리그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전국대회였던 이 대회는 3월에 개최되어 6월에 끝나는 상반기 리그였다. 산투스는 이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차 리그 8개 팀 중 4위를 기록하며 바로 탈락하고 말았다.
1966년에 타사 브라지우에서 준우승한 산투스는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조건을 충족했지만 산투스 구단이 국내 리그 집중을 위해 참가를 거부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두 번째 대륙대회 출전은 또 불발되었다.
1967년을 마지막으로, 산투스와 수많은 영광을 함께한 위대한 캡틴 지투가 은퇴를 선언했다. 산투스의 황금세대 멤버들도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8년 주립 리그에서는 22승 1무 3패를 기록하며 가히 압도적인 승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산투스의 승점은 45점, 2위 코린치안스의 승점은 34점이었다.
산투스는 1967년의 주립 리그 우승 덕분에 전반기의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후반기의 타사 브라지우 참가 자격을 얻었다.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에서는 자신들의 발목을 자주 붙잡았던 지역 라이벌 파우메이라스가 최종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분 좋게 우승을 달성했다.
그런데 산투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다. 전국 단위의 리그에서 우승하며 3년 만에 얻게 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기회였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1970년 월드컵 남아메리카 예선을 위해 브라질 팀들의 리베르타도레스 참가를 막은 것이다. 산투스는 원래 타사 브라지우에도 참가해야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나서 곧바로 타사 브라지우 출전을 거부했다. 이는 타사 브라지우의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파우메이라스도 마찬가지였다. 파우메이라스 역시 타사 브라지우 출전을 거부했다.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라는 상파울루의 양대산맥이 빠져버리자 전국 리그 우승의 문턱에서 항상 물만 먹었던 히우지자네이루 챔피언 보타포구 FR의 숨통이 트였고, 보타포구는 1968년 타사 브라지우에서
자이르지뉴와
제르송 등의 선수를 주축으로 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전국 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전달해 준 컵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펠레
이 경기는 1968년 11월 10일에 진행되었던 경기인데, 공식 기록에는 없는 대회이다. 멤버 구성을 보았을 때, 아마 연마다 주립 리그 올스타팀끼리 슈퍼컵 개념의 대회가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관했다.
영상 링크. 마라카낭에서 열린 이 경기에는 아우베르투도 참여했으며 펠레가 상파울루 팀 대표로 주장 완장을 찼다. 그리고 아우베르투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상대 공격수들을 틀어막았고, 결국 히우지자네이루 클럽 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사진 오른쪽을 보면 이 경기에서 히우지자네이루 클럽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던
제르송도 보인다.
역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자격을 충족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에 복귀하던 시점에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다. 이 대회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했던 팀을 모두 초청하여 열렸다. 참가 팀은
레알 마드리드 CF(1960),
CA 페냐롤(1961, 1966),
산투스 FC(1962, 196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64, 1965),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1967)였다. 그야말로 60년대 최강팀들의 총집합이었다. 먼저 남미 팀끼리 최강자를 가렸다. 1968년 11월 19일에 열린 라싱 클루브와의 경기에서 펠레가 선제 결승골을 득점하며 2-0승리를 기록했다. 아우베르투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3승 0무 1패라는 좋은 성적을 이끌었고, 페냐롤을 1점 차로 따돌리며 산투스를 남미 대표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럽 최강자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가 출전 취소를 선언하며 자동으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결승전에 올라오게 되었다.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결승전은 1969년 6월 24일에 열렸다. 인테르의 홈인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인테르는 자친토 파케티가 결장했지만
산드로 마촐라,
마리오 코르소, 자이르, 안젤로 도멘기니,
타르치시오 부르그니치 등 쟁쟁한 스타들이 선발 출전했다. 산투스는 펠레를 필두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클루두아우두, 히우두[3], 에두 등이 선발 출전했다. 경기는 역시 팽팽했다. 경기 57분, 산투스의 토니뉴 게헤이루가 골을 터뜨렸다. 이 득점이 그대로 유지되며 산투스가 1-0승리를 거두었고, 1960년대를 대표하는 팀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물론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산투스가 무조건 1960년대 세계 최고의 팀인 것은 아니다.
전국 리그 우승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축구협회의 결단에 의해 196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산투스는 그 한풀이라도 하듯 주립 리그에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펠레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산투스는 막강했다. 주립 리그 1차 리그 26경기에서 60골을 때려박으며 공격축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고, 1차 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진출한 결승 리그에서는 파우메이라스, 상파울루, 코린치안스를 상대로 3경기 6득점 1실점을 기록하며 2승 1무로 승점 5점을 쌓아올려 우승을 차지했다.
주립 리그 3연패 기념으로 펠레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그러나 디펜딩 챔피언 산투스는 전국 리그에서는 영 맥을 추지 못했다.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1차 리그에서 5승 5무 6패를 기록했고, 8개 팀 중 5위라는 평범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1969년의 산투스 팀
선술했듯 브라질 축구협회가 월드컵 예선에 집중하기 위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펠레를 포함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대거 속해 있는 산투스의 대륙 대회 참가를 막았고, 그래서 아우베르투는 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하지 못했다.
1969년에도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고 산투스는 이번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럽 팀들이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아메리카 최강자전의 결과로 당해 챔피언이 결정되게 되었다. 산투스는 12월 11일 페냐롤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챙겼다. 그러나 나머지 경기에서 전패했고, 1승 4패로 4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번 우승팀은 CA페냐롤이었다.
원래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1~2월에 시즌을 개최했지만, 1970년에는 월드컵이 있었기에 월드컵 준비를 위해 주립 리그를 하반기로 옮겨 개최했다. 월드컵 결승전이 끝난 후 6일이 지난 6월 27일에야 개막전이 열렸다.
1970년부터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열렸다. 1970년 상반기에는 상파울루의 빅 5(산투스, 파우메이라스, 코린치안스, 상파울루, 포르투게자)를 제외한 팀들끼리 리그를 진행했다. 그리고 하반기에는 전반기 리그 1, 2, 3위 팀, 4, 5, 6위 팀 중 플레이오프를 거쳐 선발된 두 팀과 상반기 리그에서 제외되었던 '빅 5'가 함께 리그를 진행했다. 산투스는 8승 5무 5패를 기록하며 최종 4위를 기록했다. 주립 리그 타이틀은 제르송이 뛰고 있던
상파울루 FC가 가져갔다.
산투스는 1969년 주립 리그 우승을 통해 전국 리그 진출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산투스는 전체적으로 지친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1차 리그 16경기에서 5승 6무 5패를 기록했고, 브라질 최강의 주립 리그 챔피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8개 팀 중 5위라는 성적을 받아들고 짐을 싸야 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참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며 참가하지 못했다. 사실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해 197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브라질 클럽을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산투스가 만약 참가 조건을 충족했더라도 참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우베르투는 계속해서 산투스의 캡틴이었으며, 함께 월드컵에서 우승한 펠레, 클루두아우두, 에두와 함께 좋은 활약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1971년 2월에 주립 리그가 개막했고, 산투스는 신나게 실력 발휘를 했다. 그러나 펠레가 축구 황제답지 못한 득점력 하락세를 보이며 팀 전체가 어수선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월에는 캡틴 아우베르투가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하락세를 보이며 팀의 코치 몇 명과 함께 보타포구로 임대 이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산투스는 4위라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1971년 주립 리그를 마감했다.
1971년 4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보타포구에 임대 이적하였다. 정든 산투스에서 잠시 떠난 아우베르투는 3개월동안 보타포구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총 22경기에 뛰며
자이르지뉴, 파울루 세자르 카주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 결승전
이 시즌 6월 27일에 열린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 결승전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판정으로 인해 보타포구가 플루미넨세에게 패하는 일이 있었다. 여튼 좋은 활약을 펼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보타포구로부터 임대 이적이 아닌 '영구 이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6월 말에 곧장 산투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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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포구에서도 주장직을 수행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여담으로, 아우베르투는 보타포구 FR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다가 나중에는 감독으로도 부임하여 1993 콘메볼 컵에서 보타포구를 우승시키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결국 보타포구 전 홈구장이자 명예의 전당인 General Severiano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6월 27일에 주립 리그 시즌이 끝나고, 아우베르투는 산투스에 복귀하였다. 보타포구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보타포구의 주립 리그 준우승을 이끌고 돌아온 카피타는 8월에 시작된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4]에서 공식 복귀전을 치르며 간만에 산투스의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두 경기만에 또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아우베르투는 1972년 3월 상파울루 주립 리그가 시작할 즈음에 산투스로 돌아와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전국 리그에서 20경기 2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팀은 최종 8위에 그치는 등 부진했다. 주립 리그에서도 별다른 점은 없었다. 산투스는 주립 리그 3위에 그치며 우승에 실패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1970년대의 산투스 FC. 내리 3~4위를 기록하며 주립 리그 우승을 3연속으로 놓친 그들에게서 세계를 호령하던 60년대의 포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73년은 정말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승컵이 필요했다.
즐겁게 훈련 중인 산투스 선수단
산투스는 세 명의 월드컵 영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번 주립 리그에서도 빅 파이브를 제외한 팀들끼리 먼저 예선을 진행했다. 예선 결과 6팀이 선발되었고, 그 팀들은 '빅 5'와 함께 본선 1차, 2차 리그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다. 미리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던 산투스는 본선 첫 번째 리그 11경기에서 23득점 5실점을 기록했고, 8승 3무 0패로 무패우승을 달성하며 결승전 진출 자격을 일찌감치 얻어 놓았다. 산투스는 본선 두 번째 리그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1차 리그에서 8위를 기록했던 포르투게자가 치고 올라오며 1위를 차지했고 코린치안스, 주벤투스, 과라니가 산투스보다 높은 순위에 오르며 5위에 그쳤다. 결국 첫 번째 리그 우승팀인 산투스, 두 번째 리그 우승팀인 포르투게자의 결승전으로 승부를 가르게 되었다.
1973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결승전
경기는 드라마틱했다. 0-0스코어가 이어지며 엄청난 접전이 이어졌다. 연장전까지 진행되었음에도 승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승부차기로 승자를 정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해프닝이 있었다. 양 팀의 첫 번째 키커들이 실축했고, 산투스의 두 번째 키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킥을 성공시켰다. 산투스의 골키퍼 아구스팅 세하스는 포르투게자의 두 번째 키커 칼레가리의 슈팅을 또 막아냈다. 산투스의 세 번째 키커 에두가 킥을 성공시켰고, 포르투게자의 비우시뉴의 슈팅이 골대를 강타했다. 스코어 3:1. 산투스가 우세하지만 5번째 키커까지 찬다면 아직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심 아르만도 마르케스가 경기 종료 휘슬을 불었고, 포르투게자 선수들은 이미 진 줄 알고 상심한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판정에 항의한 선수가 없었다. 산투스 선수들은 환호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주심은 포르투게자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아예 빠져나가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미 우승 셀레브레이션까지 다 한 상황. 다시 불러와서 승부차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심의 실수 때문에 정말 애매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브라질 축구협회는 다음날인 8월 27일에 두 팀의 공동 우승을 선언했다. 이로써 포르투게자는 큰 이득을 봤다.
주립 리그 우승 직후 기뻐하는 펠레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전국 리그에서도 28경기 6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산투스는 40팀 중 최종 5위에 오르며 선전했다. 아우베르투는 펠레와 함께 다시 한 번 월드컵 스타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플루미넨시는
히벨리누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지속적으로 보강했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복귀했을 때 즈음에는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 최강급 팀이 되어 있었다. 아우베르투는 주립 리그가 종료될 즈음에 합류하여 플루미넨시의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에 기여하였다. 또한 팀 전력 보강의 일환으로 재영입된 것이었기에 곧바로 라이트백 주전 자리에 눌러앉았다. 아우베르투는 전국 리그에서 18경기에 뛰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플루미넨시는 전국 리그에서 3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플루미넨시는 아우베르투 덕에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산투스 FC는 사실상 마지막으로 남은 스타플레이어였던 아우베르투가 빠지며 이름값 있는 스타들을 거의 다 잃고 25위로 떨어지며 큰 하락세를 보였다.
플루미넨시는 2월 프리시즌에 열린 '
비냐 델 마르 토너먼트'에 초청되어 지역 연고 팀 유니온 에스파뇰라, 에베르톤을 제치고 우승을 거두었다.
1976년의 플루미넨시 팀
서서히 폼을 끌어올리던 아우베르투는 1976년에 다시 리그 정상급 수비수로 자리매김했다. 아우베르투는 1976년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 매우 많은 경기를 소화해내며 플루미넨시의 우승을 이끌었다. 1차 리그 3위를 차지하는 등 리그 전반기 성적은 미진했으나, 후반기에 미친 듯한 활약으로 1위를 차지해내며 최고의 실적을 뽑아낸 것이다. 공격 작업의 중심이 히벨리누였다면 수비의 중핵은 아우베르투였다. 아우베르투는 팀의 주장으로서 기분 좋게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정상 자리에 세 번째로 오른 기쁨을 만끽했다.
플루미넨시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종료 이후 6월에 열린
파리 인터네셔널 컵에 초청되었다. 총 네 팀이 참가했는데, 호스트인 파리 생제르맹 FC와 유럽 올스타 팀, 브라질 올림픽 팀과 플루미넨시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아우베르투가 이끄는 플루미넨시는 4강전에서 파리 생제르맹 FC를 2-0으로 꺾었고, 결승전에서는
빌렘 판하네험 등의 스타들이 대거 포진한 유럽 올스타팀과의 경기에서 3-1로 승리를 거두며 트로피를 차지했다.
트로피를 플루미넨시 홈구장으로 가져온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플루미넨시는 전국 리그에서도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54팀 중 4위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아우베르투는 19경기에 출전하여 한 골을 기록했다. 팀에 네 개가 넘는 트로피를 안겨주고 전설이 된 아우베르투는 계약기간 종료 이후 다소 특이한 행보를 보였는데, 같은 주립 리그에 속한 CR 플라멩구와 계약을 맺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1977년 초에 CR 플라멩구에 합류했다. 당시 플라멩구에는 남미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지쿠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향후 10년 정도 브라질을 이끌 레프트백
주니오르도 훌륭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1977년의 플라멩구 팀
아우베르투는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여 주장 완장을 차고 브라질의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활약하여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립 리그 종료 직후
펠레가
뉴욕 코스모스의 수비진을 이끌 새로운 선수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추천하였고, 뉴욕 코스모스 측은 플라멩구 측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 대한 영입 의사를 밝혔다. 구단에서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미 이룰 것을 다 이룬 아우베르투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월드컵 대표팀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하반기에 열릴 예정이었던 전국 리그에서도 뛰지 못했다.
1978년 월드컵에 출전할 기회를 포기하며 미국의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그의 영원한 동료
펠레와 재회하였다. 시즌이 반 이상 지난 상태였지만 아우베르투는 곧장 주전 자리에 올랐고, 등번호 25번을 달고 좋은 활약을 펼쳤다. 1977년 사커볼(NASL 결승전)에 출전한 아우베르투는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조르조 키날리아 등과 함께 좋은 활약을 펼치며 뉴욕 코스모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펠레를 축하해 주는 프란츠 베켄바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무하마드 알리
리고 10월 1일에 진행되었던 펠레의 고별전에도 참가하였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펠레의 친구로서 그의 은퇴를 축하해주는 한편, 눈물을 흘리는 펠레를 위로해 주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등번호를 바꾼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이후 5번으로 번호를 바꾼 뒤 뉴욕 코스모스에서 계속해서 활약하며 두 번의 NASL우승에 추가적으로 기여했고, 1981년에는 캘리포니아 서프로 한 시즌동안 임대를 떠났다가 1982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왔다.
참고로 이 시기의 NASL은 나름 훌륭한 리그였으며 그 리그의 최강팀이었던 뉴욕 코스모스는 유럽 A급 팀들과 맞붙어도 충분히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팀이었다. AC 밀란과 1982년 6월에 진행했던 친선 경기에서 뉴욕 코스모스가 승리를 거둔 바
있다.
1982년에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뉴욕 코스모스의 사커볼 우승을 이끌었다. 다섯 시즌의 미국 생활동안 사커볼 우승만 네 번이나 차지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다. 1982 시즌 NASL 종료 이후 어느덧 38세가 된 아우베르투는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고,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뉴욕 코스모스와 CR 플라멩구가 고별전을 준비했다. 고별전은
NASL 사커볼 결승전이 끝난 후 10일 지난 시점인 9월 28일에 열렸다. 아우베르투는 전반에는 뉴욕 코스모스의 유니폼을 입었고 후반전에는 CR 플라멩구의 유니폼을 입으며 양 팀 팬들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1]
당시 크루제이루의 주장이었으며,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주전 센터백 중 한 명으로 뛴 선수이다.
[2]
1958년 월드컵, 1962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국가대표 센터 포워드 바바와는 다른 인물이다.
[3]
참고로 앞에 소개한 산투스의 4인방은 모두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적이 있다. 물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클루두아우두는 당시에는 아직 골을 기록하지 않은 상태였다.
[4]
1971년에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