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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11:06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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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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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前 축구인
파일:alberto.jpg
이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Carlos Alberto Torres
출생 1944년 7월 1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사망 2016년 10월 25일 (향년 72세)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축구 선수 ( 라이트백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플루미넨시 FC (1963~1965)
산투스 FC (1965~1975)
보타포구 FR (1971 / 임대)
포르투게자 (1972 / 임대)
플루미넨시 FC (1975~1977)
CR 플라멩구 (1977)
뉴욕 코스모스 (1977~1980)
캘리포니아 서프 (1981)
뉴욕 코스모스 (1982)
감독 CR 플라멩구 (1983~1985)
SC 코린치안스 (1985~1986)
나우치쿠 카피바리비 (1987~1988)
마이애미 샥스 (1988)
온세 칼다 스 (1989~1990)
CF 몬테레이 (1991~1992)
클럽 티후아나 (1992)
보타포구 FR (1993~1998)
케레타로 FC (1999)
우니온 마그달레나 (2000~2001)
보타포구 FR (2002~2003)
파이산두 SC (2005)
아제르바이잔 대표팀 (2005)
국가대표 53경기 8골 ( 브라질 / 1964~197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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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클럽 기록5.4. 국가대표 기록
6.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 대한 말, 말, 말7. 어록8. 여담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라이트백이다.

브라질 명문 산투스 FC에서 주장을 맡아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역시 카나리아 군단의 주장으로 참가한 1970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선 마지막 4번째 골을 터트려 조국의 월드컵 통산 3회 우승을 이끌어냈다. 또한 FIFA 100에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드림팀 세컨드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감독으로서는 보타포구 FR을 비롯한 많은 클럽에서 크고 작은 트로피들을 들어올리며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 아제르바이잔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클럽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국가대표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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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


측면 수비수로서 갖추어야 할 기량뿐만 아니라 뛰어난 공격 가담 능력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대표팀 선배 니우통 산투스, 자우마 산투스가 선보였던 공격 가담 수준을 발전시켜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 가담 능력을 보여주었고, 마치 우측면의 리베로 같은 플레이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플레이는 현대적인 풀백의 시초가 되었다고 평해진다.

가장 돋보였던 것은 후방 및 측면 플레이메이킹 능력이다. 공을 잡고 천천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오버래핑하다가 전방을 한번 바라보고는 바로 공격수를 향한 롱패스를 시도하는 것이 주특기였는데, 그 패스 실력이 매우 훌륭해 팀의 주된 공격 루트로 이용되었다. 긴 패스, 짧은 패스 가리지 않고 스피드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보낼 수 있었다. 1970 WC 잉글랜드전에서 자이르지뉴에게 준 환상적인 아웃프런트 스루패스가 대표적인 예시이다[1]. 패스를 할 타이밍을 놓치면 본인이 직접 드리블을 해 공간을 만들었다. 기술적인 능력이 매우 훌륭해 상대 선수를 쉽게 제쳤으며, 엄청난 스피드를 가진 선수였기에 순수하게 주력으로만 상대 선수를 따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기회만 생기면 경기 내내 시도했던 저돌적인 드리블은 그의 최고 장기 중 하나였다. 이러한 플레이를 뒷받침한 것은 그의 무시무시한 지구력이었다.

자주 중앙으로 침투해 강력한 슈팅을 날리기도 했으며, 이를 통한 득점도 많이 기록했다.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장면은 대표적으로 1970년 월드컵의 마지막 골 장면이 있다.[2] 침착성과 킥 능력이 매우 훌륭했고, 이러한 장점을 살려 클럽에서 세트 피스를 거의 다 본인이 전담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페널티킥 전담 키커를 담당했다.

집중력 있는 수비능력 또한 그의 장점이였는데, 상대 선수의 패스를 미리 읽어내고 차단하는 능력이 특히 돋보였다. 커버 가능한 범위로 공이 굴러오면 번개같이 뛰어가서 상대팀의 패스를 뻥 차버리거나 아군 진영에 연결해 주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대인 마킹 능력이 뛰어났고 1:1상황에서 돌파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에는 슬라이딩 태클을 하되 최대한 부드럽게 시도했다. 키도 180cm로 그 당시에는 제법 큰 편이었다.

또한 20대의 젊은 나이에 주장을 맡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리더십이 뛰어난 선수였다.

30대에 접어들고 잦은 부상으로 신체능력이 떨어진 후에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센터백으로 출전하였다. 특히 뉴욕 코스모스에서는 아예 센터백 포지션에 눌러앉았다.

4. 지도자 경력

1983년 플라멩구에서 감독직을 처음 수행한다. 그 후 다른 클럽들을 감독을 한다.

2005년 아제르바이잔 대표팀 감독을 마지막으로 축구계를 떠났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클럽 기록

연도 클럽 경기
1963~1965 플루미넨시 FC 98 9
1965~1975 산투스 FC 445 40
1975~1977 플루미넨시 FC 53 4
1977 CR 플라멩구 28 3
1977~1980 뉴욕 코스모스 80 6
1981 캘리포니아 서프 19 2
1982 뉴욕 코스모스 20 0
743 64

5.4. 국가대표 기록

<rowcolor=#373a3c>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브라질 1964 3 0
1965 1 0
1966 3 0
1968 18 5
1969 9 0
1970 14 2
1972 1 1
1976 1 0
1977 3 0
통산 53 8
무슨 대회에서 어떤 골을 넣었는지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 대한 말, 말, 말

파일:Carlos Alberto.jpg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하이디[5]와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의 형제같은 존재이자 최고의 친구였다. #
프란츠 베켄바워
그는 위대한 선수, 위대한 주장이었다.
펠레
그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서든 존재감을 발휘하는, 유일무이한 주장이었다. 그는 단순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이 든다. #
제르송
나는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동료로 둘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스턴에서 에우제비우와 함께하기도 했었네요. 하지만 뉴욕 코스모스에서는 카를루스가 가장 중요한 선수였습니다. 펠레가 왔고, 키날리아와 베켄바워가 연이어 입단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펠레와 함께했던 3년 동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펠레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우리 팀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영입해야 해. 그는 우리 팀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수 있을 거야."[6]
셰프 메싱
나는 공격에 가담하는 풀백들을 좋아하며, 그는 공격형 풀백의 완벽한 예시이다. 197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그가 터뜨린 골은 너무나도 우아했다. 나는 그가 노쇠했을 때 NASL에서 그를 상대로 뛰었는데, 그는 마치 지금의 카푸처럼 여전히 좋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
조지 베스트, 2005년에 자신의 역대 베스트 XI를 선정하며
몇몇 경기에서 그와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
디에고 마라도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의심의 여지없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이며, 산투스, 플라멩구, 플루미넨시 등 거치는 팀마다 주장이었고, 펠레, 제르송과 함께 1970년 월드컵 우승을 이끈 리더였다. #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그는 나보다 위대하며, 브라질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이다.
브라질은 '주장 중의 주장'을 잃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선수였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친구였다. 지구상의 우리는 슬프지만, 하늘에서는 이 축구 천사를 맞이하기 위한 파티를 열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와 우리의 관계는 환상적이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함께 우리는 모든 것을 조금씩 배웠다. 그는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좋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는 공격과 수비에 같은 정도로 참여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현대 축구에서 더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1970년에 그가 득점한 브라질의 네 번째 골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이처럼 컵에 키스하고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몸짓까지... 그러므로 그가 라이트백 포지션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존재 중 하나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나와 그는 모두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팀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
카푸
그는 필드 안에서는 리더십의 본보기였고, 필드 밖에서는 나를 항상 도와주던 좋은 친구였습니다. 런던에서 당신을 만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편히 잠드소서, 캡틴. 출처
호나우지뉴

7. 어록

오늘날의 선수들은 과하게 많은 돈을 받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수들이 경기에 대한 열정을 잃은 이유이다.[7] #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1966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엔트리에서 갑작스럽게 탈락했던 일에 대해 회고하며 한 말 #
브라질의 모든 사람은 나를 '주장'으로 기억한다.
월드컵 우승팀의 최연소 주장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8. 여담

파일: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라질 국대.jpg

위처럼 팀 사진을 찍을 때 대부분 윗줄 왼쪽 끝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주장이건 아니건 왼쪽 끝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펠레는 언제나 사진 기준으로 밑줄 오른쪽에서 2~3번째 자리에 앉아서 팀 사진에 찍히곤 했다.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이었지만, 피파 온라인 2에서는 센터백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센터백 치고는 작은 키와 전설 선수의 뻥튀기 스탯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본 포지션인 라이트백으로 사용하는 유저가 많았다. FC 온라인에서도 등장했으며 본 포지션인 라이트백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대부분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된다. 쓸 수 있는 팀컬러가 브라질 뿐이고, 그 브라질 팀컬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자원이 부족하며, 풀백 치고 슈팅, 패스 스탯이 높고, 풀백으로 쓰기에는 급여가 높기 때문이다.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닮았다.[8]축구 잘하는 관상

파일:GOAL_Defender.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수비수들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 이 패스를 자이르지뉴가 받아서 펠레에게 크로스를 올렸는데, 펠레가 완벽에 가까운 헤더슈팅을 했지만 고든 뱅크스가 기가 막히게 막아냈다. [2] 펠레가 아우베르투의 침투를 보고 패스를 넣었고,번개같이 달려와 득점했다. [3] B팀 [4] B팀 [5] 베켄바워의 아내 [6] 그리고 뉴욕 코스모스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정말 입단하게 되었는데, 아우베르투는 입단하자마자 NASL 2연패를 달성하더니 두 번의 우승을 추가로 선물하여 코스모스에서 보낸 6년동안 네 차례의 NASL 우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7] 실제로 중국 축구선수들의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실력에 비해 너무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이 꼽힌다. [8] 다만 측면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부스케츠보단 잘생겼다.파일: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옆모습.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