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디시야 전투 Battle of al-Qadisiya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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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전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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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서기 636년 11월 16일 ~ 19일 | |
장소 | 알 까디시야 인근 | |
원인 | 이슬람 팽창 | |
교전국 | 사산조 페르시아 | 이슬람 제국 |
지휘관 |
로스탐 파로흐자드† 바흐만† 호르무잔 갈레누스† 미흐란 라지 피루즈 호스로 나히라간 |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 알 무탄나 이븐 하리타 하심 이븐 우트바 알 카카 아심 이븐 아므르 알 타미미 압둘라흐 이븐 알 무팀 아므루 빈 마디 야크리브 |
병력 |
30,000 ~ 200,000명 코끼리 33마리 |
30,000 ~ 40,000명 |
피해 | 22,000명 | 8,500명 |
결과 | 이슬람 제국의 대승 | |
영향 |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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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36년 11월 16일~19일, 알 까디시야 근교에서 벌어진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이끄는 정통 칼리파 휘하의 이슬람 군대와 로스탐 파로흐자드(Rostam Farrokhzād)가 이끄는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결전. 이 전투에서 패배한 사산 왕조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얼마 후 수도인 크테시폰과 이라크 일대를 무슬림들에게 내주게 된다.2. 전투 배경
2.1. 사산 왕조의 몰락
사산 왕조는 호스로 2세가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그렇게 유리하게 끌고 나가다가 결국은 대역전패를 당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호스로 2세 사후 여러 장군들과 왕족들이 샤한샤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로마와는 휴전을 했지만, 한때 사산 왕조를 역관광시킨 구국의 황제 이라클리오스 역시 아라비아 남부에서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의 기세에 밀리며 야르무크 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영토를 상실하는 등 위기에 몰려 있었다.631년, 여전히 혼란스러운 사산 왕조에서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아제르바이잔의 왕위를 노리고 여제인 아자르미도흐트에게 청혼했다. 여제는 청혼을 거절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를 암살해 버렸는데, 이에 파루크 호르미즈드의 아들이자 호라산 총독이었던 로스탐 파로흐자드가 쳐들어와 여제를 몰아냈다. 로스탐은 곧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632년 사산 왕조의 마지막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의 즉위를 도왔다. 야즈드게르드 3세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므로, 실제 권력을 차지한 것은 로스탐과 그의 형제 후라잔드, 그리고 그의 반대파였던 피루즈 호스로였다.
2.2. 이슬람의 이라크 침공
633년, 칼리파 아부 바크르가 보낸 이슬람의 전설적인 명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원정군이 아라비아 사막과 접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휩쓸며 페르시아군을 연파했다. 사산 왕조는 그때까지도 궁정의 권력 암투가 정리되지 않았던 데다 혼란기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지방 장악력 역시 현저히 약해졌으므로 할리드의 뛰어난 전술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보다 안정된 상황에 있던 동로마가 자신들의 시리아 속주를 지키기 위해 대군을 모아 진군해 오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동시에 공략하려던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를 시리아로 소환했다.할리드가 시리아로 간 이후 남은 병력을 지휘하게 된 무탄나 이븐 하리타는 병력이 너무 적어졌다고 판단하여 점령지들을 버리고 아라비아 사막에 접해 있는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634년, 아부 바크르의 뒤를 이어 3대 칼리파가 된 우마르 이븐 알 하티브가 보낸 아부 우바이드의 지원군과 합세한 이슬람군은 메소포타미아 재정복을 재개했지만, 이번에는 바흐만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아부 우바이드는 전투 중 전투 코끼리에 밟혀 죽었다. 이를 다리 전투(battle of the bridge)라고 한다.
그러나 무탄나는 패잔병들을 수습해 무사히 철수했고, 바흐만은 로스탐의 반대파인 피루즈가 일으킨 반란 진압을 돕기 위해 추격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무탄나는 아라비아 사막 일대의 아랍 부족들을 다시 규합하여 메소포타미아 공격을 재개했고, 몇 차례의 승전을 거두며 분위기를 다시 바꾸어 놓았다.
635년, 이슬람 세력의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라클리오스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맹을 맺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동 작전 같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636년 8월, 이라클리오스의 동로마군은 야르무크 전투에서 궤멸당했다. 이로써 동로마의 위협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복지를 얻은 이슬람 군대는 더욱 강력해졌다. 칼리파 우마르는 가용 병력을 전부 끌어모으고, 꾸라이쉬 부족 출신이며 선지자 무함마드와 가까운 사이였던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메소포타미아로 보냈다.
3. 양측의 전력
3.1. 이슬람 군대
이슬람군은 대략 2만이나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였다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이슬람군은 처음에 무탄나[1]가 이끌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원정군, 메디나에서 출발한 사아드의 지원군과 중간에 사아드에게 합류한 아랍 부족민 군사들, 그리고 야르무크 전투 이후 시리아 전선에서 동로마의 위협이 크게 약해지면서 메소포타미아로 넘어온 군사들로 구성되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면 전선을 상대하던 칼리파 우마르가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가용 병력을 모두 끌어모으다 보니 훈련이 덜 된 부족 전사들이나 신병들의 비율이 늘긴 했으나, 로마와 페르시아를 상대로 숱한 전투를 겪은 베테랑 군사들도 많았다.[2]정통 칼리파 시대의 이슬람 군대는 크게 창병과 궁병, 기병으로 나눌 수 있다. 기병은 대부분 경기병으로 마갑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창과 칼, 방패로 무장했다. 궁기병은 없었다. 이슬람 군대 하면 대부분 경보병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오히려 보병이 체인메일 등으로 기병보다 중무장한 편이었으며, 긴 창과 큰 나무 방패를 주로 사용했지만 칼 역시 단병기로 애용되었다.[3]
3.2. 페르시아 군대
페르시아군의 경우 4만 명, 6만 명, 10만 명, 12만 명에서 20만 명까지 설이 매우 많은 데다 소스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슬람 군대에 비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어찌됐든 페르시아군의 수가 이슬람군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 전체 군사력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보자면 훨씬 적었다. 물론 제국이 워낙 넓다 보니 이라크 말고도 방어해야 할 다른 땅이 많다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 사산 왕조가 혼란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많은 페르시아 귀족들이 로스탐을 돕지 않고 자기 땅에 할거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으며, 로스탐 입장에서도 그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와의 오랜 전쟁은 물론 내부의 권력 투쟁을 겪고, 이슬람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해 병력자원의 고갈이 극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땅덩이 덕택에(...) 이슬람군에 비해 우월한 전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페르시아 군대는 크게 보병, 경기병, 중기병, 코끼리 부대로 나눌 수 있다. 보병은 이전 시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파르티아와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끌어모은 징집병이었으므로 빈약한 장비를 갖춘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궁병이 많았으므로 사격전은 기대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고르간(이후의 타바리스탄)이나 데일람 등지에서 온 중장보병들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보조 전력이었으며, 제국 중심지의 페르시아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때 아르메니아 분견대도 페르시아군에 가세했다고 하는데, 로스탐의 원래 거점이 아제르바이잔으로 아르메니아와 상당히 가까운 데다 그가 일전에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은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나누어지며, 경기병은 대다수가 궁기병이었다. 그러나 사산 왕조의 경무장 궁기병들은 대부분 다른 유목민들로 구성되었으므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시아군의 실제 주력은 늘 그렇듯이 중기병, 즉 카타프락토이였다. 중기병들은 대부분 귀족으로, 찰갑과 사슬갑옷, 혹은 그 둘이 혼합된 형태의 갑옷을 입고 말도 마갑을 입혀서 중무장했으며, 창과 활, 도끼, 칼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등자나 카우치드 랜스 방식이 널리 도입되기 전이므로 중세 기사들과 같은 충격력을 내기는 어려웠다.[4]전투 코끼리 역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대 페르시아 군대 중에서도 사산 왕조만 가지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5]
4. 전투 경과
4.1. 양군의 배치
636년 7월에 까디시야에 도착한 이슬람군은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주변을 약탈하며 사산 왕조와 교섭을 시도했다. 총사령관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지만 군사 경험은 별로 없었으므로 실제 작전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부족 장군들의 조언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칼리파 우마르도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략적인 지령을 내렸다. 게다가 정작 까디시야 전투 당시에는 몸져 누워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지휘관이라기보다는 군대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양측의 교섭은 여러 달을 끌었으나 성과는 거의 없었다.[6] 시리아 전선이 충분히 안정됐다고 판단한 칼리파는 교섭 중단을 명했고, 11월이 되어 양군은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군이 강 건너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로스탐은 먼저 도하를 시도했고, 큰 피해 없이 강을 건너 병력을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양측 모두 군대를 서로 마주보는 4개의 분견대로 나누었으며, 보병을 기병 앞에 배치했다.
4.2. 첫째 날
당시 관습대로 양측의 대표 전사들이 나와 1대 1 대결을 펼치는 일기토가 일종의 이벤트전(?)으로 먼저 치러졌다. 여러 차례의 대결이 벌어진 후 로스탐이 좌익을 전진시켜 이슬람군의 우익을 공격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페르시아 좌익은 통상의 전술대로 우선 화살을 잔뜩 쏟아부은 뒤, 코끼리 부대를 내보냈다. 이슬람군의 우익 기병대가 코끼리 부대를 막기 위해 나섰지만 페르시아 카타프락토이에게 저지당해 물러났고, 우익의 보병대도 후퇴했다. 이에 중앙의 보병과 기병 일부가 우익을 돕기 위해 출격했고, 보병대가 코끼리를 상대하는 동안 기병대가 페르시아 기병대를 협공하여 페르시아 좌익의 공세는 실패했다.
이에 로스탐은 좌익이 재정비하는 동안 우익과 중앙을 전진시켜 다시 공세에 나섰다. 코끼리와 중기병대의 협공에 기병대가 패퇴했으나, 코끼리 부대를 맞이한 궁병대가 코끼리 위에 탄 조련사와 궁병을 쏘고, 보병은 코끼리 옆에 접근하여 안장을 고정하는 뱃대끈을 잘라 상교를 떨어뜨리는 식으로 공격했다. 이에 코끼리 부대가 궤주할 것을 우려한 페르시아군은 코끼리를 보병대 뒤로 물렸고, 이 틈을 타 이슬람군이 역공에 나섰다. 특히 이슬람 기병대는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하여 히트 앤 런 전술을 사용했고, 저녁때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로스탐이 직접 전열에 나서 전투를 독려하여 첫째 날의 전투는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끝났다.
4.3. 둘째 날
둘째 날에는 사아드의 친척인 하심 이븐 우트바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하심과 그 선봉장을 맡은 까까 이븐 아므르(qa'qa ibn amr)는 수천에 불과한 병력을 잘게 쪼개어 순차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지원군이 끝도 없이 몰려오는 것 같은 효과를 연출했다.[7]첫째 날 코끼리 부대가 입은 피해가 다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둘째날의 전투는 코끼리 없이 진행되었고, 이슬람 군대는 이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용맹한 투사로 유명한 까까는 몸져 누운 사아드 대신 실질적인 장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격전지에 달려들어 다리 전투의 승자이자 페르시아군 좌익을 지휘하고 있던 바흐만을 죽였으며, 낙타 부대를 조직해 페르시아 기병들을 패퇴시키기도 했다.[8] 기병대의 혼란과 패주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약한 페르시아 보병대가 맹공에 노출되며 위기가 찾아왔다. 까까는 이 틈을 노려 직속 정예부대를 이끌고 보병 전열을 돌파하여 로스탐을 잡고자 했으나, 로스탐이 다시 한번 전열에 나서 반격을 지휘하면서 페르시아군은 위기를 벗어났다. 이날 역시 뚜렷한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저녁이 되어 전투가 끝났다.
4.4. 셋째 날
페르시아군의 코끼리 부대가 어느 정도 피해를 복구하여 다시 전장에 투입되었다. 코끼리 부대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페르시아군은 총공격을 개시했고, 이스람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점차 뒤로 밀려났다. 이 와중에 이스람군의 전열에 틈이 생겼고, 로스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병대를 투입하여 사아드가 있는 지휘부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곧 이슬람 군대가 지휘관을 보호하기 위해 재집결하였으므로 실패하였다.사아드는 코끼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눈과 코 등 코끼리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노리라고 지시하였고, 격렬한 전투 끝에 코끼리 부대는 완전히 패주하였다. 역사상 혼란에 빠진 전투 코끼리들은 항상 팀킬의 귀재들이었고, 이번에도 패주하면서 페르시아군의 전열을 완전히 헤집어놓고 혼란에 빠뜨렸다. 이슬람 군대는 그 틈을 노려 반격을 개시했으나, 로스탐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군대는 반격을 버텨냈다. 사흘간의 전투로 짜증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양측 군대는 해가 진 뒤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전투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이슬람 기록에서는 이 날을 라일랏 알 하릴, 즉 "웅성거리는 소음의 밤"이라고 한다.[9]
4.5. 넷째 날
하루 낮과 밤을 내내 싸운 양측의 군대는 지칠 대로 지쳐 도저히 더 싸울 수 없는 지경이 된 새벽녘에서야 전투를 그만두고 휴식을 취했다. 그때까지도 승패를 가리지 못한 것이다.이때 까까가 "이제 조금만 더 싸우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좌익을 이끌고 공세를 재개했다. 이에 아침부터 또다시 격전이 시작되었으며, 페르시아군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페르시아군 쪽으로 강력한 모래바람이 불었고, 이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더욱 불리해졌으며 이슬람 기록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찬탄하고 있다. 까까는 마침내 페르시아 전열을 돌파하여 로스탐의 지휘부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로스탐은 전사했다.
혼란스러운 격전의 와중이라 로스탐이 전사한 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페르시아군은 전투에 정신이 팔려 총사령관이 전사한 줄도 미처 모르고 반격을 시도해 이슬람 군대를 다시 몰아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이슬람군은 다시 총공격을 개시했고, 총사령관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페르시아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대열을 유지하며 퇴각하고, 일부는 공황상태에 빠져 패주하고, 일부는 악에 받혀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았다. 그 결사항전한 장군들 중에는 좌익을 지휘하던 갈레누스도 있는데, 그가 강의 유일한 다리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패잔병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고대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군은 패주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이슬람군과 함께 왔던 아랍인 여성들이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페르시아군 부상병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0]
5. 경과 및 의의
까디시야 전투의 패전으로 사산 왕조는 이슬람 팽창을 막을 군대가 없어졌다. 이듬해인 637년 3월, 2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되었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도주했다. 후제스탄 (현대 이란의 이라크 접경지역)까지 점령한 이슬람 군대는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에 퍼진 전염병 때문에 진격을 멈췄다. 642년, 아수리스탄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은 니하완드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에 칼리파는 이라크를 넘어 페르시아 정복을 개시하였다. 결국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시해되면서 사산 왕조는 400여 년의 역사를 마감하였고, 페르시아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다.까디시야 전투에서 패하고 이라크를 잃은 후에도 사산 왕조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러 차례 대군을 모아 이슬람군에 맞서 싸웠지만, 까디시야 전투만큼 팽팽하게 맞선 전투는 거의 없었다. 결국 까디시야 전투야말로 사산 왕조의 몰락과 쇠퇴를 가속화시킨 가장 결정적인 전투이다.
1989년에 완공한 바그다드의 개선문인 "승리의 손". 정식 이름이 카디시야의 검(the Swords of Qādisiyyah)이다. 한때 철거 계획이 있었으나 취소되고 지금도 남아 있다.
6. 여담
전설에 의하면, 카디시야 전투 직전 아랍 군대에서 페르시아 군대한테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예전에는 우리가 그대들한테 무얼 얻고자 하면, 무릎을 꿇고 그대들의 손에 입을 맞추어야 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비굴하게 굴지 않을 것이오. 이제 우리가 찾는 것은 천국의 안식이기 때문이오."
카디시야 전투 이전까지 아랍인들은 오랫동안 페르시아를 두려워하였다. 원래 아랍인들은 여러 개의 부족들로 나뉘어 서로 치열한 내전을 오랫동안 겪고 있던 데다가, 페르시아한테 호되게 박살난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6세기 무렵에 들어서 페르시아가 심각한 흑사병 창궐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든데다, 무엇보다 동로마와 무리한 소모전으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거기에 제위 쟁탈전까지 겹치면서 내분이 극단적으로 치닫자[11]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과감하게 공세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1]
무탄나는 까디시야 전투 얼마 전에 죽었다.
[2]
사실 6세기 무렵부터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군대에 많은 수의 아랍인들이 용병으로 복무했다. 그 과정에서 아랍인들은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고, 덤으로 두 나라 군대의 전술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면서 7세기에 들어서자, 마침내 동로마와 페르시아에 맞설 자신감을 갖고 두 초강대국들을 연이어 패배시키기에 이르렀다.
[3]
이슬람 제국은 중동 제국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중장보병 전력이 막강한 국가였다. 이들 중보병이 모루가 되고 경무장한 경기병이 우회기동으로 망치 역할을 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이 이슬람 제국의 주 전술이었다.
[4]
그러나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을 보면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이 로마군 중보병 2명을 꿰뚫은 정도의 위력을 보였다했기에 카우치드 랜스나 등자 없이도 상당한 충격력을 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5]
페르시아 문화권 전체로 넘어가면
가즈나 왕조나
티무르 제국이 코끼리를 적극적으로 운용한 예가 있으나, 이들의 중심지는 트란스옥시아나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가까웠다.
[6]
이 부분도 양측의 사료가 엇갈리는데, 페르시아측 사료에서는 로스탐이 이슬람군한테 돈을 주어 페르시아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주장한 반면 이슬람측 사료에서는 로스탐한테 "1. 페르시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공격하지 않겠다 2. 개종이 싫으면 종교세(지즈야)를 내라 3. 1과 2 모두 거부한다면 전쟁을 하자"라는 3가지 사항을 전달했고 로스탐이 3을 선택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7]
훗날의
거란족이나
몽골족도 전쟁이 벌어질 때에 이런 식으로 지원군을 일부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보냈는데, 그러면 말들의 꼬리에 땅의 흙이 끌려 먼지가 일어나서 멀리 떨어진 적들로 하여금 마치 엄청난 수의 지원군이 계속 몰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8]
이때 낙타를 이상한 괴물처럼 변장시켜서 페르시아 기병들의 말을 놀라게 했다고도 한다. 말이 낙타의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낙타 기병들이 말 탄 기병들을 혼란시키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훈련으로 극복될 수 있으며 페르시아인들은 낙타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아닐 것이다.
[9]
이런 별칭이 붙은 데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말이나 낙타 같은 짐승들의 울음소리라는 설, 밤새 싸운 병사들이 어둠 속에서 부상을 입어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에서 나왔다는 설, 어둠 속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 자기 부족 이름이나 부대 이름을 반복해 외쳤기 때문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10]
출처: 이슬람제국의 탄생/ 톰 홀랜드 저/ 이순호 역/ 책과함께/ 2015년 4월
[11]
카디시야 전투 무렵, 페르시아의 내분이 얼마나 심했느냐 하면 총사령관인 루스탐에 반대하는 페르시아 귀족들이 루스탐을 망하게 하려고 일부러 군대를 보내지 않고 그대로 방관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