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 الشلف
베르베르어 ⵛⵛⵍⴼ
영어, 프랑스어 Chlef
1. 개요
알제리 북부의 도시. 알제에서 서남쪽으로 130km, 오랑에서 동북쪽으로 150km, 티아레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0만명으로, 티아레와 함께 알제리 중서부의 핵심 도시이다. 시가지는 알제리에서 가장 긴 강이자 지명의 유래인 와디 츨레프 남안에 형성되어 있다. 메데아 부근의 아틀라스 산지에서 발원한 츨레프 강은 이곳을 지나 모스타가넴 인근 해안에서 바다로 합류한다. 고원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과 달리 츨레프는 불과 해발 100여 미터에 자리하였기에 다른 중동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덥다. 북쪽 4km 지점에 츨레프 국제공항이 위치한다.과거 지명은 고대 로마 시대의 카스텔룸 팅기타눔, 중세 이슬람 시대의 알 아스남, 근대 프랑스 지배기의 오를레앙빌 등이다. 중세에는 모로코 기반 국가 (무라비트, 무와히드, 마린, 사드, 알라위 왕조 등)들이 알제리를 공격할 때에 늘 지나던 통로였기에 여러 차례 전장이 되었다. 베르베르인을 거쳐 베두인들이 거주하다가 1843년 프랑스에 의해 근대 도시가 세워졌고, 인구 4만 5천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1962년 독립 후 재차 엘 아스남이 되었다가 1981년 5월 현재의 츨레프로 개칭되었다. 19-20세기 대프랑스 항쟁, 독립전쟁, 알제리 내전 등으로 이어지는 도시의 다사다난한 역사는 알제리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대변한다. 1954년과 1980년의 강진을 겪어 시가지가 두 차례나 완파되었기에 시내에는 80년대 이전 건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2. 역사
로마 제국령 마우레이타니아에 속한 팅기타눔은 성탑과 성벽으로 둘러진 요새도시였고, 기독교화 후 주교구가 되었다. 324년에는 성 레파라투스 바실리카가 지어졌다. 하지만 5세기 반달족의 침공과 지진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674년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아불 무하지르가 일대를 정복하였고, 740년에는 베르베르 대항거의 분수령이 된 엘 아슈라프 (귀족들) 전투[1]의 장이 되었다. 15세기에는 베르베르계 울레드 코세이르 부족이 일대에 정착하였고, 이들은 18세기 오스만 제국령 서부 베이와 협력해 스페인령 오랑을 점령하고 알라위 왕조의 침공을 격퇴하였다. 다만 1774년에는 오랑의 베이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당시 지명은 '우상들'이란 의미인 엘 아스남이었다.2.1. 오를레앙빌
시내에 얼마 남지 않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물군
그러다 1840년 프랑스 군이 점령하였고, 1843년 5월 국왕 루이 필리프의 아들이자 한해 전에 암살당한 오를레앙 공 페르난드 필리프를 기리며 오를레앙빌로 명명하였다. 동부의 스킥다가 필리프빌로 명명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현지 부족들은 모하메드 벤 압달라 (부마자)의 지휘 하에 대프랑스 항쟁을 이어갔고, 1845년 5월에는 오를레앙빌을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로도 그는 에미르 압델카데르와 연대하여 저항하다가 1847년 4월 프랑스 군에 항복하였다. 일대가 안저된 후 프랑스 당국은 도시에 대한 근대화에 나서 1855년에 법원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전력 시설이 갖추어졌다. 1856년 12월 오를레앙빌은 코뮨이 되었고, 유럽인들이 다수 저착하여 1857년에는 그 비율이 82%에 이르렀다.
2.1.1. 2차 대전기
1939년 일대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공화파 인사 수백여명이 피신하기도 하였다. 2차 대전기인 1942년 11월 횃불 작전 후 일대에는 미군이 주둔하였는데[2], 오를레앙빌과 시디 벨 아베스에서 현지 아랍인에게 미군이 발포하는 일이 있었다. 종전 시까지 츨레프는 모로코에서 동부 알제리와 튀니지로 물자를 운송하는 연합군 수송대가 매일 트럭 6백대씩 지나가는 요충지였다. 종전 후 독립 열기가 무르익던 1952년 5월 14일, 알제리 정치인 메살리 핫지가 연설을 위해 도시를 방문하자 수백의 군주이 모였다. 프랑스 당국은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발포하였고, 2명이 사망하였다. 그후 메살리는 가택연금되었고, 이러한 츨레프 사건은 2년 후에 개시된 알제리 독립 전쟁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2.1.2. 알제리 독립전쟁기
20세기 중엽 츨레프 시가지
알제리 독립 전쟁 전야인 1954년 9월, 오를레앙빌에서는 대지진이 발새해 시가지 2/3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1천 5백명이 사망하였고 5천여명이 부상했으며 6만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3] 재건이 한창이던 10월 8일에는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랑스에서 츨레프 지진의 희생자들을 위한 프라스 팀과 북아프리카 팀 간의 자선 경기가 열렸다. 알제리 독립 전쟁 발발 후인 1956년 4월 프랑스 공산당원 앙리 마이유가 츨레프 지역 알제리 군에 가담하였고, 현지 의사 미카일 마르티니 역시 ALN 부상병들을 숨기고 치료해주었다. 같은해 8월 일대에는 비상 사태가 선포되었고, 오후 7시 통금이 내려졌다. 앙리 마이유와 미카일 마르티니는 각각 처형되었고 추방되었다.
봉기 2주년인 11월 1일에는 알제리 무역 노조의 전국적인 파업에 영향을 받은 무슬림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으며 호응하였다. 이는 블리다, 티지우주. 알제 등지에서도 행해졌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알제리 독립군은 시내의 우체국, 군용 트럭, 시나고그, 식당, 제분소 등지에 수류탄 등을 이용한 폭탄 테러를 가하였다. 백여명의 사망자 중에는 행정청 부의장 모하메드 벤 세르키 등이 있었다. 오를레앙빌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정보부가 위치했기에 양측의 첩보전과 심리전 역시 벌어졌다. 일부 저항군 포로들은 프랑스 당국에 의해 무려 단두대에서 처형되기도 하였다. 1958년 알제리 순방에 나선 샤를 드 골이 오를레앙빌에 이르자 시내에서는 유럽계 주민들과 알제리 인들간의 무력 다툼이 벌어졌다.
2.2. 독립 후의 혼란
1962년 3월의 휴전과 7월의 독립 인정 후에도 양측의 충돌과 혼란은 이어졌다. 그해 12월 오를레앙빌에서는 프랑스 군과 알제리 군이 충돌하여 6명이 사망하였고 프랑스 군인들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프랑스 당국의 항의에 내무장관 아흐메드 메데그리가 현장을 방문해 조사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인들이 퇴거한 후 1963년 10월, 오를레앙빌은 옛 이름인 엘 아스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혼란은 끝나지 않았고, 1967년 츨레프 공항 인근 엘 무아피카 군사 기지의 타헤르 즈비리 장군이 탱크를 몰고 알제로 향하여 부메디엔 정권을 전복하려 하였으나 블리다 인근 엘 아프룬에서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1980년 10월 일대에는 규모 7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26년만의 강진에 2633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다치고 실종되었다. [4]
지진을 겪은 이듬해, '우상들'이란 이교스러운 지명이 액운을 불러왔다 여긴 시당국은 지명을 현재의 츨레프로 바꾸었다. 알제리 각지에서 고물가에 대한 시위가 있던 1988년, 츨레프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그해 10월 시위대는 법원 / 시청/ 은행 등에 방화하였고, 이로써 시가지의 절반 가까이가 파괴되었다. 얼마 후 1990년대 알제리 내전 시에 츨레프는 이슬람 주의를 표방하는 온건 반군인 이슬람해방군 (AIS)의 거점이었고, 정부군과의 여러 전투가 벌어졌다. 2000년 AIS가 정부와의 협상으로 해산된 후 츨레프는 정부의 통제 하에 놓였지만 급진 반군인 무장이슬람그룹 (GIA)이 수차례 테러를 가하였다. 1996년, 1997년, 2002년 등의 테러로 2명이 사망, 10여명이 부상하였다. 반군 잔당이 토벌된 2003년 후로는 안정이 유지되고 있다.
3. 갤러리
[1]
제나타 부족장 마이사라 알 무트가리가 아랍 군대 격파
[2]
프랑스 주민드른 미군에게 방을 내어줌
[3]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장 보수가 맡았고 로베르 한스베르거는 모스크를 디자인함
[4]
20세기 서부 지중해권 최대의 지진이었다 한다. 당시는 주말인 금요일이었기에 피해가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