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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생년 1340년대 추정 |
고려 | |
사망 | 미상 |
조선 | |
본관 | 경주 최씨(慶州) |
가족관계 |
종조부 - 최자운(崔子雲)[1], 최해운(崔海雲)[2] 조부 - 최수운(崔峀雲) 부친 - 최호(崔澔)[3] 장남 - 최재전(崔在田)[4] 차남 - 최재원(崔在源)[5] 손자 - 최맹연(崔孟淵)[6], 최중연(崔仲淵)[7], 최계연(崔季淵), 최일(崔鎰) 당숙 - 최청, 최강(崔江), 최진(崔津), 최연(崔淵), 최흘(崔汔) |
호 | 명암(明菴) |
시호 | 광정(匡靖) |
품계 | 광정대부(匡靖大夫) |
공훈 |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 1390) 개국원종공신 3등(開國元從功臣 三等, 1392) 태조조회군공신 3등(太祖朝回軍功臣 三等, 1393)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
경력 |
판사(1380) 밀직부사(1384) 안동도원수겸부사(1387~1388) 한양윤, 판자혜부사(1390) 무진회공신(1390) 개국원종공신(1392) 태조회군공신(1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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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말 무신, 광정대부, 안동도원수겸 부사. 조선태조 개국원종공신, 회군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본관은 경주. 광정공파(匡靖公派)의 시조이다. 할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최수운(崔峀雲)이고, 아버지는 어사중승 집현전학사 최호(崔澔)다.
2. 생애
고려사 실록에 따르면 1380년( 우왕 6) 판사(判事)로서 부정 안천길(安天吉)과 함께 서북면에 파견되어 요동의 소란한 정세를 정탐하였다. 밀직부사로 재직하던 1384년에는 최영의 요청으로 당시 우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한 문달한(文達漢)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진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함께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기도 하였다. 1387년에는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안동도원수겸 부사(府使)로 재임했다.2.1. 말머리를 돌리다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崔瑩) | ||||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 조민수(曺敏修) |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 이성계(李成桂) | |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 심덕부(沈德符) |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 정지(鄭地) | |
부원수(副元帥) | 이무(李茂) | 상원수(上元帥) | 지용기(池湧奇) | |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 | 왕안덕(王安德) | 부원수(副元帥) | 황보림(皇甫琳) | |
부원수(副元帥) | 이승원(李承源) |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 | 이빈(李彬) | |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 박위(朴葳) |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 | 구성로(具成老) | |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 | 최운해(崔雲海) | 조전원수(助戰元帥) | 윤호(尹虎) | |
계림원수(鷄林元帥) | 경의(慶儀) |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 이원계(李元桂) | |
안동원수(安東元帥) | 최단(崔鄲) | 배극렴(裴克廉)·박영충(朴永忠)· 이화(李和) | ||
조전원수(助戰元帥) | 최공철(崔公哲) | 이두란(李豆蘭)· 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 | ||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 조희고(趙希古) | 경보(慶補)·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 | ||
안경(安慶)· 왕빈(王賓) | ||||
총 병력 50,473명 군마 21,682필 |
1388년 제2차 요동정벌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좌군도통수 조민수의 휘하로 출정하여 위화도 회군의 공을 세웠다.
1608년 류성룡의 지시로 한강 정구 등에 의해 편찬된 안동 사료인 《영가지(永嘉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崔鄲 安東道元帥兼府事. 匡靖洪武丁卯赴戊辰遞."[8] 여기서 광정은 광정대부, 홍무는 명 태조 주원장 연호, 정묘 무진은 1387년부터 1388년까지 재임 기간이다. 1388년 5월 회군 후에는 안동도원수겸 부사로 다시 부임해 경상도순문사 박위와 함께 상주 중모현에서 왜구를 소탕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한양윤(漢陽尹)을 거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무진회군공신에 녹훈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393년(태조 2) 태조가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이들을 다시 포상했을 때 회군공신 3등(10인)에 책록되었다.
3. 관련 기록
최단은 경주최씨 광정공파 중시조로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동보(崔東輔, 1560~1625)의 <우락재실기(憂樂齋實記)>에 나오는 신와공(愼窩公) 최겸(崔謙)의 유사(遺事)이다. 최동보는 임진왜란때 대구 팔공산 지역의 공산관군장을 지냈는데 임진왜란의 전란을 사실대로 기록한 <우락재실기>를 썼다. 여기에 ‘돌아가신 아버님 신와공의 유사(先考府君愼窩公遺事)’를 남겼는데 “공휘겸자사겸 고병조판서휘단지칠세손야(公諱謙字士兼 故兵曹判書諱鄲之七世孫也)", 즉 “공의 휘는 겸(謙, 1539~?)이고 자는 사겸(士兼)이니 옛 병조판서 휘 단(鄲)의 7세손이시다.” 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우락재실기>에는 지헌(止軒) 노기종(盧起宗, 1560~1622)이 쓴 <국조효행록>이 전하는데 여기에 자형(姉兄)인 신와공의 효행을 기록하면서 최겸(崔謙)을 ‘단의 8세손’(광정공의 8세이므로 7세손의 오기)이라고 기록했다. 영천출신 무인인 지헌은 임진왜란 때 우락재와 함께 팔공, 화왕회맹에 참여했고 훈련원판관을 지냈다.[9]원본이 실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주최씨족보인 《정유보》(丁酉譜, 1777년)에 따르면 최단은 <청하후 7세손 합문지후 수운파>(淸河侯 七世孫 閤門祗侯 峀雲派) 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청하후(淸河侯)는 최승로의 봉호이고 최수운(崔峀雲)은 최단의 조부이다.
《정유보》에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은함(殷含)-승로(承老)-숙(肅)-제안(齊顔-계훈(繼勳)의 상계(上系)와 함께 수운(峀雲)-호(澔)-단(鄲)에 이어 단(崔鄲)-재전(在田)-맹연(孟淵)-유(洧)의 파보가 기록되어 있다. 《정유보》의 합문지후 수운파보(峀雲派譜)는 구미의 원본 소장자 자료이다.
《정유보》는 1672년 사관이었던 동주공 최상익(崔商翼)에서 시작해 중태(重泰)-명상(命相)-태진(台鎭)을 거쳐 공급(公伋,1731-1791)이 4대에 걸친 선대의 작업을 이어 105년만인 1777년에 편찬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온라인으로도 열람되는《경주최씨족보: 원보밀직파》(1832년)에도 은함(殷含)-승로(承老)-숙(肅)-제안(齊顔)-계훈(繼勳)의 상계(上系)와 함께 수운(峀雲)-호(澔)-단(鄲)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원보(元甫)는 문창후의 아들이자 청하후의 아버지인 은함의 관직명이다. 1777년과 1832년 발간된 이들 경주 최씨 족보는 관가정공파가 주도해 편찬한 족보이다.
17세기 족보학자인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의 《씨족원류》 부전(附箋, 867쪽)에는 경주최씨 최단의 파보를 전하는데 이는 최단의 손자인 맹연(孟淵)의 한(澣), 식(湜), 유(洧), 징(澄) 등의 네 명의 아들 중에서 3자(子) 충의공(忠義公) 유(洧)의 파보가 실려있는 《정유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3.1. 포은집의 최단 기록
《포은집》에는 정몽주가 1380년 밀직사제학 벼슬을 받은 후 이집(李集)[10]에게 보낸 답서가 있는데 이글 말미에 최단의 기록이 있다."崔鄲之女之母族 亦眞兩班也 余聞之三寸李敬之判書."
최단의 딸은 그 어머니 일족 또한 참 양반입니다. 제가 삼촌 이경지 판서에게서 들었습니다.[11]
최단의 딸은 그 어머니 일족 또한 참 양반입니다. 제가 삼촌 이경지 판서에게서 들었습니다.[11]
이 편지가 오고간 이후 둔촌은 문과에 급제한 장남 이지직(李之直)을 이경지의 숙부인 이과(李薖) 집안으로 장가를 보냈다. 최단의 당숙인 최청의 장인은 이경지의 재종형인 이성중(李誠中)이다.
4. 씨족원류의 동명이인 최단
동명의 최단에 대한 내용은 최단(대령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1744년 제작된 해주최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방주에 최단의 관직은 [대령군(大寧君)]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4년 남주원의《조선과환보》에는 문무과, 음사편이 실려있는데 <해주최씨 음사편> 최단의 방주에 [대령군(大寧君)]만 기록되어 있다.[14][15]
이와 같이 대령 최씨( 해주 최씨)의 사료에 따르면 해주인 최단의 관직은 <대령군>이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씨족원류》부전(附箋) 867쪽 경주최씨편에는 광정(匡靖), 판자혜부사 겸 판한남윤(判漢南尹), 개국원종공신, 회군공신, 판사(判事) 등이 적힌 최단(崔鄲)의 방주와 함께 아들 재전(在田), 손자 맹연(孟淵), 증손자 유(洧), 고손자 연수(延壽), 담수(潭壽), 창수(昌壽), 영수(永壽) 등 5세손까지 기록되어 있다.
《씨족원류》는 방주의 관직과 후손들의 파보 등 사료들을 통해 <경주 최씨 최단>은 <해주 최씨 최단>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동명이인임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16]
5. 주요 후손들
- 최자빈(崔自濱): 충순위 어모장군. 좌승지.
- 최해(崔海): 어모장군. 만호.
- 최계(崔誡): 호 태동(台洞). 임진왜란 대구의병장. 선무이등공신. 증 병조참판. 불천위(不遷位).
- 최인(崔認): 호 한천(寒川). 임진왜란 공산의병장.
- 최동보(崔東輔): 호 우락재(憂樂齋). 임진왜란 대송장군, 공산관군장. 증 호조참판.
- 최학경(崔鶴涇): 호 우재(愚齋). 곽재우 장군 휘하 삼가현 의병활동, 건공장군 제수. 효행으로 참봉 제수. 사직공파는 대부분 우재공과 손자 최준립(崔俊立)서 분파.
- 최동집(崔東㠍) 호 대암(臺巖). 효종 대군사부. 불천위.
- 최동립(崔東岦): 한강 정구(鄭逑) 문인. 부호군(副護軍) 제수
- 최동률(崔東嵂):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
- 최진남(崔鎭南): 문과. 진주목사, 사헌부 장령
- 최위남(崔衛南): 성균관 생원(生員)
- 최수학(崔壽學): 무과. 광양현감.
- 최경식(崔慶湜): 문과.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울산 부사, 사헌부 장령.
- 최종옥(崔宗沃): 사헌부 감찰.
- 최중해(崔仲海): 무과. 훈련원 봉사. 남명학파 수장 노파(蘆坡) 이흘(李屹) 문인(門人).
- 최준립(崔俊立): 호 긍수당(肯守堂). 통덕랑. 노파 이흘과 존양재(存養齋) 송정렴(宋挺濂)의 문인. 장남은 호 간곡(澗谷) 최경문(崔慶文)으로 동지중추부사(壽職), 사직공파의 종가인 간곡공파조. 차남은 사재감 주부 최경휘(崔慶輝)로 주부공파조. 3남(三男)은 호 오죽헌(五竹軒) 최경신(崔慶新)으로 오죽헌파조. 이들 4부자(四父子)는 1639년 결성된 향약인 옥계정계(玉溪亭契)를 주도하였다.
- 최재능(崔在能): 진사.
- 최흥원(崔興遠): 호 백불암(百弗庵). 세자익위사좌익찬. 부인동규(夫仁洞規) 향약 실시. 사후 효행으로 정려. 문집 《백불암집》. 불천위.
- 최남두(崔南斗): 호 모려(茅廬). 병계 윤봉구의 적전고제. 1770년 사직공파보인 《경인구보》 발간 주관. 옥계서원 창간 모태인 향옥재(香玉齋)서 강학. 옥계서원 배향. 문집 《모려집》.
- 최수항(崔壽恒): 절충장군. 거제 탑포산성 정상 묘지석에 '광정공(匡靖公) 12세손' 비문.
- 최유윤(崔惟允): 호 몽관(夢關). 옥계서원 배향. 문집 《몽관집》.
- 최시교: 국채보상운동 대구발기인대표 13인
- 최종응: 독립운동가, 건국애족장.
- 최세창: 대장. 제29대 국방부 장관.
- 최종덕: 최초 독도 주민
- 최근덕: 제29대 성균관장.
- 최수부: 광동제약 창업자.
- 최효석: 24·25대 경주최씨중앙종친회장.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10대 회장. 재경경남도민회장. ㈜정우 회장.
- 최병림: 광정공파종친회 회장.
- 최진돈: 백불암종가 종손.
- 최언돈: 문학박사. 고운사랑방운동연합회 회장.
- 최성덕: 공학박사. 윤사모 중앙회 회장.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 사법행정 자문위원. 국민통합위원회 위원. 영남매일 대표이사·사장.
- 최철국: 제17·18대 국회의원
- 최재훈: 달성군수
- 최치국: 전 지방공기업평가원 이사장.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6. 관련 사적지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경운재(景雲齋)
대구 백불암(百弗庵)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61호)
옥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
대구 도동 구회당(九會堂)
거제 탑포산성 정상 절충장군 최수항(崔壽恒) 비문
[1]
판봉상시사를 역임했다.
[2]
좌윤을 역임했다.
[3]
어사중승 집현전학사를 역임했다.
[4]
양산군수 증 호조참의
[5]
병조정랑을 역임했다.
[6]
맹산현감 서부주부를 역임했다.
[7]
감찰을 역임했다.
[8]
출처
https://naver.me/5smgzNRm
[9]
최동보, 『내가 겪은 임진왜란(憂樂齋實記 원본 역문)』, 최오영 역, 중문출판사. 114~120쪽.
[10]
광주 이씨.
[11]
출처
https://naver.me/FHumynbG
[12]
대령군(大寧君)은 대령최씨 최단의 증조부
최유엄(崔有渰)이 1309년 받은 관직이라고 고려사에 나온다. 최유엄은 1324년에 대령부원군에 봉해졌다.
[13]
https://naver.me/xaoL4HID
[14]
출처
https://naver.me/xTbH7LCm
[15]
광산김씨 대종중 자료에는 김광철(1285~1349)의 장녀가 최충손(崔沖孫, 씨족원류에는 崔仲孫으로 기록)에게 출가하였고 외손서로 <해주인 대령군 최단>이 기록되어 있다.
[16]
이 문서는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친회에서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