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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촬영된 총릉의 모습[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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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총릉 모습 |
1. 개요
聰陵/총릉고려 제30대 국왕 충정왕이 안장된 왕릉. 북한 개성시에 위치하고 있다. 총릉은 개성성의 남소문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다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지점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기도 개성군 청교면 유릉리였고,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 오산리에 속한다. 총릉의 서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16대 예종(睿宗)의 유릉(裕陵)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용수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들로 낮은 구릉 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변에 정종의 안릉을 비롯한 여러 고려 왕릉과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다.
2. 역사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1352년( 공민왕 즉위년)에 스스로 독을 먹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공민왕 세력에 의해서 독살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사 기록에는 충정왕의 승하와 성정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는데, 승자의 기록임을 참고하도록 하자.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3월 신해에 왕이 짐독(鴆毒)을 먹고 훙서(薨逝)하였다. 3년간 재위하였고 향년 14세였으며, 총릉(聰陵)에 장사지냈다.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정월 정해에 원(元)이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찍이 밤에 왕이 근시(近侍)와 함께 새벽까지 놀기도 하였고, 때로는 시학관(侍學官)의 옷에 먹물을 뿌리기도 하였다. 혹은 여자와 가까이 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사람이 비록 재상이라도 마구 때렸으며, 때때로 쇠몽둥이로 사람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기도 하였다. 때로는 한 겨울에 얼음과 눈이 섞인 물을 가지고 언 밥에 섞어서 사람에게 먹이기도 하였으니, 광패한 행동이 이와 같았다.
- 고려사 1352년 음력 3월 7일 고려사 기사
- 고려사 1352년 음력 3월 7일 고려사 기사
<고려사>에는 “충정왕이 1352년(공민왕 1) 3월에 별세하자 7월 계유일에 소략하게 장례 지냈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기록대로 그의 무덤은 협소하고, 관대(棺臺)도 없다. 1910년대에 작성된 일제의 조사보고서에는 “높이 8척, 지름 21척이며, 병석(屛石)은 천연석으로 만들어졌다. 망주석(望柱石) 1쌍을 팔각형으로 상부를 보주형(寶珠形)으로 조각하였고, 석인(石人) 2쌍과 석수(石獸)가 유존하고 있으며, 정자각(丁字閣)의 유물이 남아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능 앞에 고종 때 세운 표석(表石)이 있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1978년 북한의 발굴조사서도 무덤 칸(墓室)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지하에 설치되었고, 관대는 따로 설치되지 않았으며, 봉분의 높이는 2m, 직경은 6.2로 다른 왕릉에 비해 작은 편이라고 했다. 무덤 칸의 크기는 남북 길이 3.88m, 동서 너비 2.2m, 높이는 1.88m로 조사됐다. 발굴 당시 청동합, 청동거울 등의 청동 제품들과 철제 자물쇠, 문장식판, 구슬, 판 못, 화폐(대관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을사늑약 두 달 전인 1905년 7월에 “방금 개성 부윤(開城府尹) 최석조(崔錫肇)의 보고서를 보니, 음력 6월 11일 밤에 부(府)의 남쪽 배야동리(排也洞里)에 있는 고려조 충정왕(忠定王)의 총릉(聰陵)을 파헤쳤는데 길이와 너비가 각각 여섯 자 남짓이 되고 깊이는 어두워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총릉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개성에 있는 여러 고려 왕릉이 도굴됐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9월에 “개성부에 있는 여조(麗朝)의 정종(定宗) 안릉(安陵), 능현(陵峴) 제2릉, 월로동(月老洞) 제1릉ㆍ제2릉, 칠릉동(七陵洞) 제4릉, 예종(睿宗) 유릉(裕陵), 충정왕(忠定王) 총릉(聰陵), 공민왕(恭愍王) 현릉(玄陵),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정릉(正陵)의 능위를 개수하는 일을 마친 뒤에 치제(致祭) 하도록 명”을 내렸다.
3. 유적
최근 드론을 이용해 촬영한 총릉의 전경 사진을 보면 4단으로 이뤄진 고려 왕릉의 모양새에 맞게 정비해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이 세운 표석을 통해 ‘보존유적 제55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무덤의 외부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며, 1층 단에 12각형의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된 봉분(封墳)과 난간석(欄干石), 망주석(望柱石) 등이 남아 있다. 난간석은 기둥만 있고, 상판이 없는 혼유석(魂遊石)이 봉분 앞에 있다. 망주석은 혼유석의 좌우에 한 기씩 서 있고, 석수(石獸)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석수는 일본강점기 때에 촬영된 사진에도 없었다. 2층 단에는 장명등(長明燈)의 받침대와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있으며, 3층 단에도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4층 단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고, 정자각 터만 확인된다.재미있는 것은 총릉에 남아 있는 문인석의 경우 모두 평평한 형태의 평각(平角) 관모(冠帽)가 아니라[2]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은 익선관 형태의 관모를 쓰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돼 있는데, 현재까지 무덤의 주인공이 확인된 고려 왕릉 중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난 형태라고 한다. [3] 무덤의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고려 태조 현릉(顯陵) 북쪽의 칠릉군(七陵群) 중에서도 제1 · 2 · 4 · 5 · 7릉의 문인석은 평각 관모로, 제3릉과 6릉의 문인석은 익선관 형태로 조각돼 있고 소릉군(韶陵群)[4] 중에서는 제4릉의 문인석만 익선관 형태로 조각돼 있어, 고려 왕릉의 조성시기나 무덤의 주인공을 비정할 때 문인석의 관모 형태가 하나의 판단기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