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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7 20:00:41

체스터필드 전투


제2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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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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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66년 5월 15일, 알메인의 헨리와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이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가 지휘하는 반군을 격파한 전투.

2. 상세

제6대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는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에드워드 왕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지만, 1265년 1월 시몽 드 몽포르가 소집한 의회에 소환된 뒤 에드워드 왕자의 영지에 속했지만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그가 탈취했던 페베렐 성을 왕실에 돌려주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가 불법으로 왕실의 영지를 빼앗은 혐의로 고발된 뒤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 후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를 꺾은 에드워드 왕자에 의해 풀려난 뒤 반란에 가담한 책임으로 1,500 마크를 지불한 후 사면되었고, 재산 유지를 보장받았다. 당시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영지를 모조리 몰수당했던 것에 비하면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266년 초 체스터필드 영주 볼드윈 드 웨이크를 포함한 이전의 몽포르 지지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더필드 성에서 견고한 방어를 갖추며 토벌대를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이에 헨리 3세의 조카이며 콘월 백작 리처드의 아들인 알메인의 헨리와 워렌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왕실군은 터트버리에서 더필드 성을 우회해 체스터필드로 진군해, 북쪽에 있는 반군 지휘관 존 데이빌의 부대를 격파하려 했다. 이 움직임을 알게 된 로버트는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고, 당시 범람했던 엠버 강을 어렵게 건너 1266년 5월 15일 체스터필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존 데이빌은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더필드 성으로 남하했고, 두 군대의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중도에서 마주치지 못했다.

그 후 반군이 체스터필드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토머스 와이크스[1]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왕실군이 덮개가 있는 마차를 사용하여 마을에 진입했다고 기술했다. 와이크스는 여기에 더해 로버트 페러스가 전투 당시 통풍에 시달렸고, 전투 후 비열하게 잡혔다고 서술했다. 이로 볼 때, 그는 전투가 끝난 뒤 교회에 숨었다가 억지로 끌려나온 듯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마을의 한 여성에게 배신당했다고 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동시대 기록은 없다.

로버트 드 페러스는 체스터필드 전투에서 패배해 체포된 뒤 쇠사슬에 묶인 채 런던으로 끌려갔고, 1266년 말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석방되는 대가로 상속권을 몰수당했다. 이후 반군 잔당이 모인 케닐워스 성에서 농성할 때 가담했지만, 나중에 토지 가치의 5배를 벌금으로 지불한 후 영지 소유를 인정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한편, 볼드윈 드 웨이크는 엘리 섬으로 가서 잔여 반란군과 함께 항전했지만 1267년에 귀순했다.
[1] 1222 ~ 1292, 옥스퍼드 인근 오세니 수도원의 수도자, 연대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