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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가 130여 년에 달하는 워낙 오랜 전성기를 이끈 덕분에, 청 시기의 문화는 가히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 청나라는 한족들의 관심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문화를 진흥시키는 데에 힘썼고, 이에 힘입어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다. 1800년대에는 서양식 소설이나 수필 등 다양한 류의 문학 양식들이 유입되면서 중국 문학계를 풍성하게 만들었고, 문학의 주제 역시 단순한 자연 예찬이나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전통적인 주제들에서 벗어나 루쉰 등의 소설가들이 사회를 비판하거나 근대화에 관련된 작품들을 써내면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이전보다 활발해지고 근현대 중국의 전통풍습들이 정착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큰 변혁이 일었던 시대였다. 이같이 청나라 시대에 형성된 문화는 비록 문화대혁명 등으로 크게 아작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의 문화의 밑바탕이 되어주고 있다.청나라 때도 사회적으로는 일단 기본적으로 유교식 이념들을 깔고 들어갔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중화의 합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유교를 더더욱 강조했고, 어떤 면에서는 명나라보다도 엄격한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부계중심적인 사회였고,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과 함부로 이혼할 수 없었으며[1] 사회적으로 그 제약도 상당히 심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문제들에도 남자에 비해 훨씬 하등한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러한 남녀불평등을 타파한다고 했으나, 이 오랜 폐해는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홍등가, 동성애, 매춘 등 성 관련 풍습들은 청나라 초기에 들어서 크게 탄압받았다. 강희제와 옹정제 치세에는 아예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이들을 때려잡아서 중국의 매춘 산업은 청나라 초기에 쇠퇴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지라 건륭제가 정치에 나태해지기 시작한 건륭제 말기에 이르러 홍등가가 다시 대대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톈진, 충칭, 항커우 등의 대도시들에는 거대한 규모의 매춘굴들이 자리잡았으며 고위 관료들부터 평민들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서양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춘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들어서는 젊은 과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어린 여성들이 나이 많은 상류층 남성들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남편들이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림에 따라 이 어린 신부들이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가문 내에서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평생 아이를 낳아 기를 희망도 없이 홀과부로 늙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니니 가문에서 잘해줄 리도 없었다. 청나라 조정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지해서 함부로 어린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집들에게 상을 내리며 이 풍습을 없애보려 노력하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늙은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어 정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열녀다'라는 입장
다만 이 내용들을 보고 청나라 시대에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문제가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무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가문의 남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이 때 남자들이 사업 등의 이유로 집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집에 남아있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여성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거나 사찰의 법회 등에 참석하고는 했다.
청 황가의 성씨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고, 스스로 조상을 신라로 꼽았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2]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 및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만주족의 성씨를 참고하자.
2. 시문학
홍루몽의 삽화. 어떻게 보면 구운몽을 능가하는 하렘물이다. | 건륭제가 친히 지은 시.[3] |
청나라 시기에는 대규모 국가 주도의 편찬사업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 시기의 한자 사전인 《 강희자전》, 옹정제 시기의 문학전집인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시기에 편찬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서인 《 사고전서》 등이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홍루몽》 외에도 포송령이 지은 《 요재지이》, 오경재가 지은 《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특히 《요재지이》는 중국의 판타지 소설 모음집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들이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 특징이며 믿거나말거나 식의 구전 이야기[4]들이 많이 실려 있다. 당대 청나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허나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오직 순수 문학이나 소설에 한정되어서, 만주족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청나라에 반대되는 내용들은 얄짤없이 검열받았다. 건륭제 시기에 특히 문자의 옥이 많이 일어났고, 이때문에 중국 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중국에서 본격적인 풍자소설이 등장한 것도 청대 시기이다. 명나라 시절의 백화소설[5]을 이어받아 점차 사회비판적인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오경재가 지은 유림외사(儒林外史)는 한족 출신의 양반들과 지식인들의 위선적인 풍모를 풍자하면서 과거제도의 위선과 기형화되어버린 유교적인 도덕 원리를 폭로하고 있다. 또한 선비인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어버린 젊은 아내가 아버지의 강요로 남편을 따라 순장당하는 이야기까지 그대로 실어놓으면서 당대 중국의 허위허식과 부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워낙 자세하게 풍경과 인물 심리를 묘사한 덕분에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때문에 유림외사는 중국 내에서는 중국 전통 고전문학 풍자예술의 정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오히려 현대의 중국에서는 사회 부조리를 폭로하는 류의 소설들이 검열받아서 절단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분야에서는 청나라보다도 퇴보했다고 할 수도.
그 외에도 중국 4대 고전소설들 중 하나로 꼽히는 홍루몽은 청나라 인정소설의 백미로 평가받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안고 준수한 용모와 총명함을 모두 갖춘 주인공 귀공자가 그를 둘러싼 아름다운 소녀들과 더불어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차츰차츰 기울어 가는 가세와 더불어 주위의 여러 자매들도 하나 둘 자신의 곁을 떠나고 각각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게 되면서 스스로 인간사의 비정함과 허망함을 깨달아 마침내는 장래가 보장된 홍루의 저택을 미련 없이 버리고 눈덮힌 황야로 떠나게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70여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과 치밀한 심리 묘사로 당대 독자들의 각광을 받았으며, 30여 편의 후속작들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회적으로도 파장이 엄청나서 그 인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홍루몽의 등장인물처럼 폐결핵에 걸린 것처럼 얼굴을 창백하게 화장하고 허리가 얇게 만드는 것이 전국적으로 유행할 정도이니,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다.
1800년대 중국의 어지러운 사회에 대한 반발에는 홍루몽이나 유림외사처럼 어둡고 우울한 부분을 파헤쳐 들어가는 방법이 있기도 했지만, 난세에 의협적인 인물을 내세워 그 어둡고 우울한 부분을 하나하나 때려 부숴 보는 방법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현대 무협지의 원조인 셈. 청나라 중협에 협의소설과 공안소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여 건륭‧가경 연간에 '시공안'이 나오면서 인기가 크게 높아졌고, 사회가 본격적으로 어지러워진 도광제 연간에 협의소설의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판관 포청천의 이야기도 이 시대 소설 삼협오의가 원전이다. 삼협오의는 총 120회의 장편으로, 원명은 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 저자는 그 당시 베이징에서 야담가 노릇을 하던 석옥곤(石玉崑)이며, 그의 야담을 필기한 것을 1879년에 간행한 것이 이 책이다. 송나라의 명재판관 포증(包拯)이 궁정 내 다툼으로 쫓겨난 인종의 어머니의 무고함을 밝히고, 또 세 협자(俠者)와 다섯 의적(義賊)을 감화하여 조각(趙珏)의 반란을 염탐케 한다는 이야기이며, 포증과 인종 이외는 모두 가공의 인물로서 역사상의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민간 호걸들이 약한 자를 돕고 악한 자를 무찌르는 활약상이 야담조의 문체와 어울리면서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에 좌절하던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반향을 낳았고, 덕분에 현대까지 내려오는 무협 소설의 시조 격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강희제는 당시(唐詩)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명청교체기 시절 잠시 퇴보했던 명나라 시절의 자유로운 시 풍조를 되살리는 데에 성공했고, 이 시기에 명나라의 시인들이 꾸준하게 시들을 지으면서 수 천년간 발전한 중국의 전통시는 청나라 시대에도 꾸준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명청 교체기의 대표적인 시인에는 공정자, 전겸익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장편 소설인 유림외사를 집필한 오경재도 활발하게 활동한 시인이며, 포송령, 여진족 왕공이었던 나라 싱더 등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강희제 시절에 황제가 친히 당나라 시대의 한시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국내 문학계에도 널리 퍼졌고, 이로 인해서 당시 모음집인 '삼백당수'가 편찬되는 등 주로 당시 위주의 한시들이 청나라 시대에 번성했다. 또한 유명한 여류시인인 추근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거의 한국의 허난설헌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추앙을 받고 있다. 1800년대 말에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혁명시인이자, 중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3. 건축
중국의 대표 전통가옥인 사합원 | 객가족의 가옥인 토루 |
중국은 사실상 하나의 대륙이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영토가 광활하고,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 건축 양식과 건물의 모양들도 천차만별이다. 한국과 위도와 기후가 적당히 엇비슷한 베이징이나 전통적인 중국 북부 지방의 경우 처마나 용마루의 양식이 한국과 거의 비슷하지만, 훨씬 위도가 낮고 습하고 더운 중국 남부 지방의 경우에는 처마가 하늘로 높이 쳐들려 올라가고[7] 목재도 북부보다 더 습기를 잘 견디는 재질을 주로 사용한다. 또한 기후 덕분에 식생이 다양하여 나무가 많이 자라니 더 건축재들도 다양하고, 강남의 풍요로운 경제 덕분에 건물의 용마루나 기둥, 혹은 천장에까지 화려한 장식을 덧붙이는 것도 유행했다. 중국 사찰에 보면 용마루에 온갖 장식들이 어지럽게 붙여져 있는 것도 비슷한 원리.
중국의 전통 건축은 크게 북부와 남부 지방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국 전통가옥'하면 떠오르는 건물은 북부의 전형적인 가옥인 '사합원'이다. 중앙의 중정을 중심으로 정방(正房), 사랑채(倒座), 동서 곁채가 사면을 둘러서 담으로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하여 완전히 외지와 봉쇄된 형태의 가옥이다. 이 모든 건축물은 마치 “口”자형으로 되었기에 사합원이라고 불리고 있다. 청나라가 세워지기 한참 전인 한나라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한족 전통의 건축 방식이었으며, 정원을 중심으로 주변에 높은 담과 건물들을 높다랗게 올려 쌓은 구조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극대화한 건축법이었다.[8] 특히 사합원의 출입구도 일부러 동남쪽의 모서리 부분에 교묘하게 설치해서 절대로 문 밖에서 정원이나 문 내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기에, 사생활 보호에는 그만이었다. 주로 대가족 형태의 가구들이 많았던 근대 중국에서 정방에 최고령자나 가장 서열이 높은 구성원이 머물렀으며, 사랑채에는 주로 아들과 그 가족들이 살았다. 그리고 입구 쪽에 자리한 곁채에는 주로 남자 하인들이나 서열이 낮은 손님용 숙소, 혹은 창고 따위의 용도로 쓰였다. 사합원은 북방의 추운 겨울과 바람이 많이 부는 봄 기후에 최적인 건축 구조였으며, 대부분의 북부 지방의 귀족들과 서민들은 모두 이 사합원 구조의 저택에서 살았다. 다만 신분고하에 따라서 사합원의 규모나 화려함이 달라졌을 뿐이지.
한편 남부 지방은 북부 지방처럼 사합원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형태의 가옥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북부 지방에서 남부로 이주해온 한족들은 그대로 사합원 형식의 집들을 짓기도 했지만, 사방이 꽉 막힌 사합원이 기본적으로 통풍에 취약한 구조이다보니 덥고 습한 남부 지방에는 잘 맞지 않았다. 때문에 남부 지방에 원래 거주하던 소수민족들의 가옥들과 뒤섞이면서 성들마다 독특한 양식들의 가옥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광둥성과 푸젠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객가족은 토루라고 불리는 독특한 가옥을 짓고 사는데, 이 토루는 거대한 원통형의 아파트 같은 구조로 중앙에 우물, 식당, 창고 등 거주민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공시설이 들어서고 그 주위를 층층이 가옥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대략 100여 개의 방이 있으며, 최대 200명에서 300명까지 함께 살 수 있었다. 게다가 밖에서 보면 창문이 거의 없어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했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황하의 고산지역에서는 일부 소수민족들이 황토산에 굴을 뚫어 사는 동굴집 형태의 '야오동'을 지었으며, 푸젠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태족은 비가 많이 오는 탓에 아예 집이 환하게 뚫려있는 수상가옥을 지어 살았다.[9]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과 열하의 피서산장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양식이 많은 것에 반해, 청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건축방식을 답습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동군연합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또한 화려함과 정교함을 숭상하여 이전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고, 색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타 민족들의 문화에 대하여 야만적이라고 배척했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 비하여, 스스로가 이민족이었던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타 문화에 관용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앞서 말한 열하의 피서산장이다. 피서산장에 있는 보타종승사원(普陀宗乘之庙)은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떠 지었는데, 타민족의 문화를 천시하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는 티베트와의 접경지대 정도를 제외하면 흔히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4. 의복
건륭제의 초상화 | 니오후루 허션의 초상화 | 효현순황후의 초상화 | 서태후의 초상화 |
청나라는 입관 이후 한족 이후 원나라의 선례를 밟지 않기 위하여 피지배계급이었던 한족의 의복 문화를 근절하고 만주족의 전통 복식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중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한족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청나라 조정도 할 수 없이 타협,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원칙을 내세워 남성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답습하되, 여성과 도사, 승려 등의 경우에는 일부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청나라가 오래 이어지며 만주족의 통치가 당연시되기 시작하자, 점차 여성의 복식 역시 만주족의 복식을 자연스레 닮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청 말에는 명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였다.
청나라 일반 남성의 경우, 장삼이나 장포(長袍)를 기본적으로 걸친 후, 그 위에 조끼 형태의 마과나 마갑 등을 덧대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장삼은 긴 원피스 형태의 남성용 치파오와 비슷한 옷으로, 옆트임이 존재한다. 또한 마과나 마갑의 경우, 본디 만주족들이 말을 탈 때 보온용으로 위에 걸치던 조끼 형태의 단상의였는데, 청 초기에는 만주족의 특권으로 여겨져 함부로 입을 수 없었으나 옹정제 연간에 한족 일반 백성들도 입는 것이 허가되었다.[10] 한편 청나라 여성이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치파오인데, 양옆에만 트임을 주며 허리를 매지 않는 형태였다. 소매끝과 옷깃, 밑단 등에 다양한 색의 천을 달아 포인트를 주었으며, 특히 목선의 경우 둥근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깃이 올라가는 형태를 띠며 점점 화려해졌다. 또한 그 위에 비갑이나 피풍이라고 하여 소매가 없는 조끼 비슷한 방한용 겉옷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보통 신분이 높을수록 이 비갑과 피풍의 무늬가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1860년대 청나라 광동성의 현령(縣令) 부부를 찍은 사진 |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청나라 시대 여성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양파두'라고 부른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가른 다음, 편방이라는 비녀에 감아 만든 것이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과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머리 모양이라서 평민들보다는 귀족층이나 돈많은 세가들의 여인들이 주로 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한편 남성의 경우, 남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양모'라고 부르며, 말꼬리털 등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실을 등나무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에 늘어뜨린 것이다. 입고있는 의복은 '조복'이라고 부르며, 현대에서의 군대 예복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종묘제례, 즉위식, 조회 등 중대사에서만 간간히 입고 나오는 의식용 복장이었다. 또한 남성이 어깨에 두르고 있는 저 독특한 모양의 장식도 청나라 시대 인물들이 굉장히 많이 입고 다니던 것인데, 이를 '피령'이라고 부르며, 길복이나 조복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걸치고 다니는 일종의 예식용 칼라 정도로 보면 된다. [11] 남성이 하고 있는 목걸이의 경우, '조주'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며 108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들 사이사이에 '불두'라고 하여 좀더 크고 재질이 다른 구슬들을 정확히 4개를 끼우며, 이는 1년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주의 뒤에는 탑모양의 장식과 구슬들을 꿰어만든 기다란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배추'라고 불렀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조주의 품질 역시 달라졌으며, 만인지상의 황제의 경우에는 상아로 만든 조주에 황금을 장식하여 사용했다고도 한다.
또한 현대까지도 중국의 오랜 악습으로 남아있는 전족의 경우, 만주족의 전통이 아니라 송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한족의 전통양식이다. 강희제는 오히려 이 전족이 여성의 노동력을 하락시켜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전족을 금할 정도였으나,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만주족 가문들이 이 풍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근대 시기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흔히 '중국 모자', ' 강시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더 정확히는 겨울용 관모인데, 사발 모양의 챙은 모피 재질이고 벨벳으로 안을 덧대서 꽤 따뜻한 편이었다고 한다. 반면 여름에는 위 사진에서 보듯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만든 삿갓 모양의 관모를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
만주족 대다수가 한족에 동화되어버린 현대 시점에서 만주족은 청나라 시절에 한족들에게 강요했던 자신들의 전통문화(변발, 호복 등)를 한족들에게 역으로 빼앗긴 꼴이 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만주족보다 먼저 중국에 정복왕조를 세웠던 선비족과 거란족이 자신들의 전통의상이었던 단령을 한족들에게 역으로 빼앗긴 것과 비슷하다.
5. 도자기
명나라 시대의 도자기 장인들이 주로 관청이나 황실에 소속되면서 자유도가 많이 제약되었던 반면, 청나라 시기에는 도예인들이 사실상 독립해 떨어져나가면서 자유롭게 도자기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하였다. 1600년대에는 주로 백색과 청색을 주로 활용해서 도자기들을 장식했고, 풍경부터 시작해서 물고기나 인물까지 극도로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을 도자기들에 넣으면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유약 기법이 발전하면서 명나라 도자기보다도 훨씬 다양한 색깔의 도자기들이 만들어졌으며, 이전에는 만들지 못했던 노란색이나 초록색의 색을 고르게 입힌 도자기들도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다만 황실의 도자기 취향은 극도로 까다로웠고, 지나치게 색이 어지럽게 화려한 것은 천박하다 여겨 쓰지 않았고 보통 백색과 청색을 사용한 도자기나 밝은 단색의 도자기들을 주로 사들였다. 색이 지나치게 화려한 도자기들은 일반적으로 서양으로 팔려나가는 도자기들이었다고. 서양으로 팔려나가는 도자기들은 18세기에 이를수록 도자기 자체의 질은 떨어지는 와중에 점점 색깔만 지나치게 조잡하게 화려해지는 경향을 띄었고, 이는 서양에서 중국산 도자기들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씩 서구의 가정집 창고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도자기 그릇이 알고보니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골동품이어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경매에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는 한다. 2020년에는 다락방에 80여 년 동안 썩고 있었던 웬 화병이 알고보니 건륭제가 쓰던 것이어서 무려 20억원에 가까운 거액에 팔렸다는 뉴스도 있으며, 1500원에 사들인 저렴한 중국 꽃병이 사실은 몇 십억원대에 달하는 보물이었다는 뉴스도 있다.
청나라의 공예작품들 참고
[1]
정말 심각한 상해를 입히거나 여성의 가문이 매우 지위가 높으면 예외다.
[2]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다 보니 문구가 '애신각라'와 일치하게 된 것이다. 신라 = 사로 = 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3]
건륭제는 생전 시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고, 약 42,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하지만 문학성은 그닥이라고.
[4]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간을 하다가 찢겨 죽은 여자와 개 이야기다. 《요재지이》에 따르면 이 여자가 관청으로 압송되어가던 중에, 민중들이 이 여자가 수간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자 간수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간을 시켰다고 한다.
[5]
중국의 초기 형태의 소설 분야
[6]
물론 농경, 정주생활을 안 한건 아니지만 반야생으로 곡식을 기르는 유랑농업을 하는 부족도 있는 등 부족마다 달랐는데다가 문화 역시 금나라 및 동하 멸망 이후 파괴되어 다시 원시농업이나 약간의 임업 및 목축에 의존하는 사회로 되돌아가거나 어로나 수렵채집사회로 다시 변화했고, 금의 통치를 받지 않은 부족들은 여전히 비문명권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여진-만주족의 문화는 조선이나 명나라에 비해 수준이 낮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야인여진에 비하면 나았지만 명과 조선의 변방에 멀리 있었다보니 문화적 혜택을 받는 일이 적었다.
[7]
이는 위도가 낮아 햇빛이 바로 위에서 내리쬐기 때문이다. 비는 매일같이 쏟아지면서 습도가 높으니 목재로 지어진 가옥들이 썩기 시작하는데, 이를 말리기 위해서는 햇빛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위도 때문에 햇빛이 바로 위에서 내리쬐니 어쩔 수 없이 처마를 높여서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8]
원나라 시절에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도 이 사합원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9]
중국 극남부의 가옥과 문화들은 거의
동남아시아와 유사하다.
[10]
한편 중국 청나라 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이 마과인데, 이 마과도 아무나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황제의 색이던 황색마과의 경우,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가 친히 하사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일반인이 입었을 경우 곧바로 끌려가 경을 쳤다.
[11]
청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저 피령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2]
조선의 도자기의 경우
임진왜란으로 인해 많은 도공들이 잡혀 가며 기술들이 다수 실전되었고, 일찍부터 서구와 교역을 시작하며 상품으로서의 도자기 제조에 많은 공을 들인 일본이나 중국만큼 기예가 발전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