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광동독군 | ||
정체 | 陳炳焜 | |
간체 | 陈炳焜 | |
한국식 독음 | 진병혼 | |
영문 | Chen Bingkun | |
자 | 순금(舜琴) | |
출생 | 1868년 11월 11일 청나라 광서성 마평현 | |
사망 | 1927년 9월 1일 중화민국 광서성 유주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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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광서무비학당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구 계계군벌의 일원으로 루룽팅, 탄하오밍과 함께 북양정부 시절 양광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쑨원과 천중밍의 공격으로 몰락했다.2. 생애
1868년 광서성 마평에서 출생했다. 1885년 진남군에 입대하여 1891년 관대에 이르렀으며 이후 루룽팅과 의형제를 맺었다. 1907년, 루룽팅과 함께 혁명당의 진남관 기의를 진압하였고 1908년 용주의 광서무비학당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재학 기간 동안 학병관영대관(學兵官營隊官)를 맡았다. 1910년, 졸업 후 용주신군 제2표 표통에 임명되었다. 이후 많은 군인들이 그러했듯이 1911년 무창봉기가 발생하면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광서성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루룽팅이 광서도독에 이르자 1912년 2월 도독부 군정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계축전쟁에서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아 혁명당원 장익무를 처형하였으며 군벌 유진환을 공격해서 패퇴시켰다. 이후 1913년 4월 광서육군 1사단장에 임명되었다.1914년 7계림진수사에 임명되었으며 1915년 12월 홍헌제제가 행해지면서 1등 남작에 봉해졌다. 운남에서 차이어, 리례쥔, 탕지야오의 주도로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엔 루룽팅과 함께 호국군 토벌을 주장하였고 1916년 3월 위안스카이로부터 호독리관서군무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3월 15일, 루룽팅이 호국군에 가담하면서 광서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국군 3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6월에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리위안훙 총통이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킨 후 광서독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광서성장에 임명되었던 나패금이 사천성으로 이동하면서 광서성장을 겸하였다. 1917년 4월, 광동독군에 임명되었으며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광동순무에 임명되었지만 불응하고 장쉰 토벌을 선언하여 루룽팅을 토역군 양광사령관에 추대하였다. 이후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하자 광동성장 주칭란, 광서독군 탄하오밍 등과 함께 쑨원을 환영하였으나 군정부 수립 후 쑨원의 말은 안 들었다. 호법전쟁이 발발한 후 북양군과 교전했으나 루룽팅의 명령에 따라 태업하였다.
1917년 11월, 광동독군에서 물러나 유주진수사로 옮겼다. 1918년 6월 광서성장에 임명되었으며 1919년 5월에 물러났다. 호법전쟁 이후 루룽팅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1921년 1월 광서호군사에 임명되어 광서로 물러났다. 4월에 루룽팅, 탄하오밍과 함께 광저우 군정부에 반대한다고 통전하고 광동을 공격했으나 쑨원과 천중밍의 반격으로 패퇴했으며 7월에 광서호군사에서 물러남을 통전한 후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광서성 유주로 돌아와 기거하였으며 방탕한 생활를 보내다가 1927년 9월 유주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이승휘, 손문의 혁명, 한울아카데미.
- 진지양, 군신정권, 고려원.
- 민국인물대사전, 하북인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