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데일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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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428a>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No. 2 | |
<colcolor=#fff> 찰스 제롬 "척" 데일리 Charles Jerome "Chuck" Da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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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0년 7월 20일 |
펜실베이니아주 케인 | |
사망 | 2009년 5월 9일 (향년 78세) |
플로리다주 주피터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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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학교 | 블룸스버그 대학교 |
지도자 경력 |
펀슈토웨이 고등학교 (1955~1963, 감독) 듀크 대학교 (1963~1969, 어시스턴트 코치) 보스턴 칼리지 (1969~1971, 감독)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1971~1977, 감독)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78~1981, 어시스턴트 코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81~1982, 감독)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83~1992, 감독) 뉴저지 네츠 (1992~1994, 감독) 올랜도 매직 (1997~1999, 감독) |
국가대표 경력 |
FIBA 아메리카 챔피언십 감독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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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NBA 역사상 가장 터프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감독이며 1980년대 중후반에는 팻 라일리의 라이벌로 조명됐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2회 우승 및 원조 드림팀으로 유명한 1992년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을 이끌었다.2. 일생
2.1. 디트로이트 이전
블룸스버그 대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에 펀슈토웨이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하였으며, 1963년부터 듀크 대학교 코치로 대학 무대에 첫 진출, 이후 보스턴 칼리지-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거쳤다. 특히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971년부터 1977년까지 6년 동안 팀을 지휘하면서 4번 연속으로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에 진출시켰는데, 그 중에서 최고 성적은 1972년에 달성한 8강 진출이었다.이후 1978년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NBA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그곳에서 3년간 빌리 커닝엄 감독 옆에서 활동하다가 1981-82 시즌 도중에 공석 중이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처음으로 감독생활을 시작하였으나, 9승 32패로 팀을 말아먹고 시즌 도중에 해임당했다. 그 뒤 필라델피아 지역 케이블 영화/스포츠 채널 'PRISM'[1]에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중계 전담 해설위원을 맡았다.
2.2. 디트로이트 시절
그러다가 1983년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감독으로 부임, 그는 데뷔 2년차인 아이제아 토마스와 더티 플레이의 대명사인 센터 빌 레임비어, 식스맨 비니 존스, 켄트 벤슨 등 기존 멤버들을 필두로 하여 부임 첫 시진에 처음으로 플옵에 진출했고, 임기 9년 동안 전부 플옵 단골로 거듭나게 했다.
1985년 드래프트 때 2류 대학 맥니시 주립대 출신인 조 듀마스를 18번으로 뽑고 워싱턴 불리츠로부터 릭 마혼을 사는가 하면, 1986년에는 유타 재즈로부터 애드리안 댄틀리를 켄트 벤슨과 맞바꾸며 드래프트에서 조지아 공대 출신 존 샐리를 11번, NAIA의 무명대학 사우스이스턴 오클라호마대 출신 데니스 로드맨을 27번으로 각각 영입시켜 차차 전력을 보강시키는 한편, 탁월한 카리스마로 이런 성깔있는 선수들을 빡세게 통솔시켰다.
이들은 터프한 플레이로 1983-84 시즌부터 플옵 단골이 되어 1987-88시즌 고대하던 파이널 진출에 성공하지만, 이번엔 매직 존슨이 이끄는 쇼타임 레이커스와 명승부를 펼친 끝에 아쉽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이때 토마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파이널 단일 쿼터 최다득점 기록을 세우면서 분전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아쉬운 시즌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1988-89시즌, 결국 레이커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 1989-90시즌에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꺾고 우승하여 백투백 우승을 이룩하게 된다. 이 89, 90년 백투백 우승 당시의 팀 디트로이트를 바로 배드 보이즈라 부른다. 아이제아 토마스, 조 듀마스, 빌 레임비어, 비니 존슨, 데니스 로드먼 등이 바로 핵심 멤버들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감독생활 외에도 TBS에서 NBA 플레이오프 중계 해설위원도 겸직했었다고 한다.
2.3. 뉴저지 시절
1991-92시즌이 끝나고 피스톤즈를 떠난 데일리는 당시 약체팀인 뉴저지 네츠로 이적, 이곳에서 데릭 콜먼-제이슨 윌리엄스- 드라젠 페트로비치-케니 앤더슨을 축으로 하여 팀을 다잡아서 1993년과 1994년에 두 차례에 걸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으나, 2년만에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2.4. 올랜도 시절
감독 은퇴 후 1990년대 중반에 TNT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일하다가 1997년에 샤킬 오닐의 추천으로 올랜도 매직과 3년 계약을 맺고 현장으로 복귀, 파업으로 인한 직장폐쇄로 반쪽짜리 시즌이 된 1998-99시즌까지 74승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이뤄냈지만, 오랜 지도자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지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2.5. 국가대표 감독
1992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드림팀을 결성하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2.6. 은퇴 이후
감독 은퇴 이후에도 농구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지 2000년에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고문에 위촉됐으며, 2009년 5월 9일에 췌장암으로 투병 중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3. 감독 스타일
데일리가 만든 전술은 선수들이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에서 각자의 포지션마다 선수들을 로테이션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후, 경기 내내 짠물 수비를 지속하도록 선수들을 통제한다. 또 그는 선수들이 감독을 존중하기를 누누이 강조했는데, 결국 주역은 선수이며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는 스파르타 교육을 따랐고 이는 오히려 개개인의 선수들을 융화시키는데 큰 효과를 낳았다.디트로이트 시절에는 한 성깔 있고 개성이 충만한 이들을 ‘팀’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악동의 대명사와도 같은 데니스 로드맨은 그를 스승 이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1993년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한 이유도 데일리 감독의 재계약이 불발이었으니 선수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아이제아 토마스 항목에도 데일리에 대한 피스톤즈 선수들의 신뢰도는 절대적이었는데 한때 슈퍼스타였던 댄틀리가 감히 불복하자 그를 트레이드 해버릴 정도로 피스톤즈 내의 데일리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역대급 슈퍼스타급만 모인 '드림팀'도 특유의 융화력으로 결집시켰는데, 마이클 조던과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등 개성 강한 스타선수들도 그를 감독으로 인정하고 따랐다. 이 점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마이클 조던과 척 데일리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배드 보이즈의 리더 아이제아 토마스가 사실상 조던의 암묵적인 반대로 드림팀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 토마스가 "조던 룰" 을 사용하도록 방치하며 조던을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괴롭혔던 배드 보이즈의 보스가 바로 척 데일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은 드림팀 시절 내내 척 데일리와 골프를 치고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등 친한 모습을 보여준 것을 볼때 척 데일리의 친화도와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조 듀마스조차 “데일리 감독은 농구만큼이나마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며 그를 추억했다.
드림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래리 버드는 “그와 오랜 시간 NBA에서 지냈다. 팀은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는 정말 좋은 코치였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버드는 이어서 “드림팀에서 우리는 함께 잘 해냈다. 스타들이 우글거렸지만 주된 쟁점은 누가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리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 금메달을 따내는 것이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드림팀 비디오에서 찰스 바클리는 그가 드림팀의 사령탑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해 "만약 배드 보이즈 그 새X들을 코칭할 수 있으면 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회상하였다. 실제 배드 보이즈 멤버들이 하나같이 범상한 인물들이 없다는 걸 생각해볼때 다양한 성격을 하나로 뭉치는데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드림팀이 처음부터 이타적인 마인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리그 득점왕서부터 대학 최고의 선수[2]까지 모두가 스타 플레이어다보니 아무래도 자만심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데일리 감독은 초장부터 군기를 잡겠다는 심산으로 당시 앤퍼니 하더웨이와 크리스 웨버, 그랜트 힐 등 대학 올스타 팀을 구성하여 친선경기를 추진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본선에서 맞붙게 될 유럽의 강호들과 비슷한 세트오펜스와 지역방어 전술을 대학팀에 주문한 데일리 감독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NBA와 다른 국제 전술패턴을 직접 경험시켜 주는데 그치지 않고 스타군단의 기강해이까지 조기에 단속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이는 드림팀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고 금메달을 잡는데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데일리 감독은 당시 올림픽 최종 결승전이 끝난 후 “나는 경기장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그의 팀들만 놓고 보면 최고의 선수들만 지도하며 손쉽게 1등을 차지한 듯 보이지만 그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다. 특히 '배드 보이즈' 시절 디트로이트를 맡으면서 승리를 위해 선수들이 거칠게 도발하거나 파울을 해도 묵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흔히 디트로이트를 최고의 수비 팀으로 보는 이가 많았지만 사실 디트로이트는 공격에도 능한 챔피언이었다. 정상급 포인트가드인 아이제아 토마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술을 만들어냈다. 센터임에도 뛰어난 슈팅능력을 보유했던 빌 레임비어는 다양한 2대2 플레이로 활용했고 조 듀마스나 마크 어과이어 등의 윙맨들도 이러한 전술패턴에서 빛을 발했다.
4. 기타
1994년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6년에는 NBA 50주년을 기념하여 '역사상 위대한 감독 10인'에 등재되기도 했다.그리고 척 데일리는 감독으로써만이 아니라 항상 정장을 입고 패션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항상 머리 손질을 하며 따로 빗을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를 관리한 것으로 유명하였고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선수들이 옷을 잘 집는 것을 놀리며 "Rich Daddy" (돈 많은 아빠 내지 부자 아빠) 라고 놀리기도 할 정도로 정장과 헤어스타일 관리 등으로도 유명한 감독이었다.
5. 관련 문서
[1]
1976년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를 운영하는 스펙테이커(현 컴캐스트 스펙테이커)와 20세기 폭스가 세운 케이블 방송사. 1981년 레인보우 미디어(현 AMC 네트웍스)와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가 폭스의 지분을 인수했고, 1983년에 스펙테이커의 지분까지 샀다. 1985년에는 CBS도 경영에 참여했으나 2년 후 CBS와 워싱턴 포스트가 지분을 팔고 레인보우 미디어가 단독 운영했다가 1997년에 스포츠채널 필라델피아와 함께 폐국되어 신규 채널 컴캐스트 스포츠넷 필라델피아(현 NBC 스포츠 필라델피아)가 중계권을 가져갔다.
[2]
말이 대학 최고 선수이지, 드림팀 안에서는 그저 막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20년이 지난 후에도 드림팀 멤버들에게 아직도 "그 대학생 애" 라고 불린다. 오죽하면 드림팀과의 경기에서 "저 대학생 애 니네 팀에 가져" 하면서 짐 취급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