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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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1018><colcolor=#fff> 미합중국 제12대 육군참모총장
찰스 펠럿 서머올 Charles Pelot Summer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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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7년 3월 4일 |
플로리다주 블루츠페리 | |
사망 | 1955년 5월 14일 (향년 88세) |
워싱턴 D.C. 월터리드 군인병원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재임기간 | 제12대 육군참모총장 |
1926년 11월 21일 ~ 1930년 11월 20일 | |
임관 | 미국육군사관학교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1888년 ~ 1931년 | |
주요 참전 |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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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플로리다주 블루츠페리에서 태어났고 군사학교를 졸업 후 3년간 교사로 일하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88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포병으로 전과해 제5포병연대에서 복무했고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윌리엄 몬트로즈 그레이엄 소장 휘하에서 2년간 공병부대에서 복무했다. 1899년 중위로 진급했다.이후 필리핀 전쟁에 투입되었고 1901년 의화단 운동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청나라로 건너갔다. 대위로 진급 후 국내 포병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포술교관으로 복무했다. 소령으로 진급 후 텍사스 주방위군을 교육시켰고 1916년 중령, 1917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뒤로는 미국 원정군 제1포병여단장, 제67포병여단장으로 복무했고 전시계급 소장으로 진급해 제1보병사단장으로서 서부전선에 투입되었고 캉티뉴, 수아송, 생미이엘, 뫼즈-아르곤 등 백일 공세 당시 주 전장이였던 곳에 모두 투입되었으며 뛰어난 리더십과 과감함으로 공을 세웠다. 조지 H. 캐머런의 후임으로 제5군단장이 되었다.
전후 준장으로 환원되었으나 소장으로 빠르게 진급했고 하와이 육군사령관을 거쳐 중장으로 진급해 제9군단장, 제4군단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빌리 미첼과 공군력 강화로 인해 갈등이 있었고 미첼의 독단적인 행동에 군법회의에 회부해 5년간 직무정지하게 만든 적이 있다.[1]
1926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가 재직했던 기간엔 전차, 포병, 공병을 확대 편성해 점진적이 기계화에 힘썼다. 임기가 끝나고 퇴역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주도 찰스턴에 위치한 시타델 군사학교장으로 20년넘게 있다가 1953년 물러났고 1955년 사망했다.
[1]
결국 미첼은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