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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07:40:18

찬합

파일:찬합.jpg
파일:조선시대 찬합.jpg
조선시대 찬합들[1]
1. 개요2. 역사3. 사용4. 기타

1. 개요

饌盒 / 饌榼

반찬()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반찬을 여러 층의 그릇에 담아 포개어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용기를 말한다. 이는 현대의 도시락과 비슷하다.

나무로 만든 상자에 반찬을 넣고 층층이 쌓은 뒤 맨 위의 그릇에만 뚜껑을 덮으면 찬합이 된다. 그 외에 서랍식으로 만들어 음식을 넣고 꺼낼 때 여닫는 형태도 있으며, 이 경우 서랍이 열려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앞에 위아래로 여닫는 덮개를 하나 더 덧대는 경우도 있다.

편의상 여러 개의 그릇을 한 번에 들고 다니기 쉽도록 손잡이가 달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릇만 쌓아서 손으로 들고 다니는 것도 찬합이라고 한다.

집에서 음식은 대개 사기그릇이나 놋그릇에 담아서 먹지만 찬합의 경우는 들고 다니기 가볍도록 목재나 자기 등으로 만들었다. 목재의 경우 음식의 보관과 부패 방지를 위해 수분에 강하고 통풍이 잘되는 소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등 수종을 이용했고 대나무쪽을 잇대어 엮은 죽합(竹盒)이나 박목판(薄木板)으로 짠 구조 위에 등나무줄기로 엮어 만든 등합(藤盒) 등이 있었다.

그런데 물기가 있는 반찬을 담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목재는 썩기가 쉬우니 옻칠을 하여 방수처리를 하는 것이 필수였다. 술안주 등 마른 반찬을 담는 찬합의 경우 기름칠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나전칠기로 장식하거나 금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전, 흑칠, 주칠 등 고급 찬합과 내부에 옻칠이 되어있지 않은 찬합 등도 있어 다양한 계층에서 고루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역사

파일:김홍도 군현도.jpg
김홍도의 군현도
주로 도시락처럼 외출할 때, 이동 중에 먹을 음식을 담는 보관용으로 사용했다. 위 그림처럼 나들이를 나갈 때 사용하거나 궁중연회 때도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연회장까지 가져가야 했으므로 찬합을 요긴하게 썼다.

1421년 세종 3년 조선왕조실록 일본 규슈 총관이 사신을 보내 서신과 함께 식롱(食籠) 한 개를 바쳤다는 기록으로도 등장하는데 식롱은 찬합과 같이 포개는 형태의 용기이다. 1624년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에서는 사신 접대를 담당하던 회동관에서 찬합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1847년 정미가례시일기(丁未嘉禮時日記),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에서도 연행(燕行)에 사층왜찬합(四層倭饌盒)을 사용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주변 나라들과 선물용으로 주고받기도 한 듯.

중국에서는 조조 순욱의 일화에서 보듯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찬합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정룽에서 볼 수 있듯이 음식을 겹겹히 쌓아놓고 조리한다는 개념은 현대의 찬합과 비슷한 면모가 있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의 전통 찬합도 사실 한국, 일본의 전통 찬합과 비슷하기 때문에 중화권 사극에서도 주로 순욱 찬합씬 찍을때 겹겹이 쌓은 찬합을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다.

3. 사용

전통적인 사용방법 대로 음식을 담는 휴대용 용기로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구절판을 여기다 담아 먹기도 하는데 층층이 쌓인 찬합은 아니고 팔각형 구절판용 그릇이 따로 있다.

피크닉 때 들고 가는 피크닉 상자나 나들이 소풍 때 들고 가는 도시락 상자가 딱 옛날 찬합 모양이다. 목재 뿐만 아니라 알루미늄이나 플라스틱 같은 현대 소재로 만들기도 한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반합(飯盒)도 찬합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글자의 뜻 자체는 찬합과 똑같은데 용기 형태는 찬합에서 조금 더 간소화한 모양이다. 철가방도 찬합을 현대식으로 계승한 형태이다.

일본에서는 1월 1일이면 찬합에 오세치 요리를 담아서 먹으며 백화점에서 아예 코너를 만들고 대량으로 판매하기도 하는데 수요가 너무 많아 예약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초밥도 여기에 포장되어 배달되어 오는 경우가 많다.

4. 기타



[1] 위와 같은 형태 말고도 다양한 디자인의 찬합 문화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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