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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3:19:40

차광은

성명 차광은(車光恩)
이명 차광은(車廣恩)
생몰 1898년 8월 14일 ~ 1966년 3월 18일
출생지 함경남도 원산시 광석면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차광은은 1898년 8월 14일 함경남도 원산시 광석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23일, 정춘수는 서울의 동지들로부터 3월 1일에 거사한다는 연락을 받고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27일에 곽명리를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곽명리 역시 소식이 없자, 그는 28일에 차광은의 큰아버지인 차준승(車準繩)을 서울로 보내 암호 전보를 치게 했다. 그날 밤 오화영으로부터 서울의 독립선언서 3백매를 전달받은 곽명리가 귀향했고, 이어 차준승으로부터 암호 전보가 도착했다.

정춘수는 이를 확인한 뒤 서울로 상경하면서 뒷일을 차광은에게 맡겼다. 차광은은 이가순, 이순영, 차용운, 김기헌, 이진구, 김장석, 김계술, 정연수, 인이극, 함태영 등 14명과 함께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에서 만나 의논한 끝에 3월 1일에 원산 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일 오후 2시, 그는 각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13명의 주동자들과 함께 시내 요소요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촌동 장터로 행진했다.

그는 장촌동 장터에서 8백명의 군중을 규합한 뒤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지나서 원산경찰서로 행진했다. 이때 일본 경찰, 헌병, 소방대가 출동해 물감을 탄 물을 소방용 호스로 뿌리며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를 전개하자, 이번에는 공포를 쏴서 강제해산시켰다. 이후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체포했는데, 이때 차광은 역시 체포되었다. 그는 1919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원산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서울로 내려왔고 1966년 3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차광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