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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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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교구 및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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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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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사진

1. 소개2. 역사3. 문화재
3.1. 비석 목록
3.1.1. 직지사 사적비3.1.2. 직지사 추담대사비
4. 산내 암자5. 여담6. 외부 링크

1. 소개

한자 : 直指寺 / 로마자 : Jikjisa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2. 역사

고구려 아도(阿道)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는 사적비(寺蹟碑)가 허물어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418년( 눌지왕 2년)에 묵호자(墨胡子)가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645년( 선덕여왕 14년)에 자장(慈藏)이, 930년( 경순왕 4년)에는 천묵(天默)이 중수하고, 936년(태조 19년)에 능여(能如)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1610년( 광해군 2년)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아도화상이 태조산에 도리사를 짓고 난 후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곳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하여 직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학조(學祖)가 주지로 있었고, 유정대사가 이 절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하였다.

3. 문화재

경내에는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국보 제208호),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제607호),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1],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보물 제1576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보물 제1859호), 김천 직지사 괘불도(보물 제2026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직지사에 소장 중인 문화재 중에는 폐사지와 같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물들이 몇 점 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등이 이러한 경우다.

3.1. 비석 목록

3.1.1. 직지사 사적비

1741년 세워진 비석이다.
=====# 해석문[4] #=====
금산(金山)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 사적비명(事蹟碑銘)과 서(序)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수찬(行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조종저(趙宗著)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우(李?) 씀

승헌대부(承憲大夫) 낭원군(朗原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간(李?) 전액을 씀

절은 금산(金山)에 있으니 황악산(黃岳山)의 동남에 있어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 한다. 절을 처음 창건할 때 능여(能如)대사가 홀과 해시계를 쓰지 않고 곧바로 열 손가락으로 재고 손으로 개창할 곳을 가리킨 까닭에 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혹은 전하기를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 경상북도 선산) 냉산(冷山)의 도리사(桃李寺, 선산군에 있는 절.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 함)를 창건할 때 함께 개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사의 사적은 비가 훼손되어 그 글을 잃어버려 모두 상고할 수 없다.

대개 묵호자와 아도는 둘 다 신라 눌지왕(訥祇王, 417~457년 재위) 때의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불법을 처음 연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능여대사는 고려 때 인동(仁同, 경상북도 구미시의 옛 이름)의 전투에서 신통력으로 구제하고 또 적을 이길 시기를 예고하여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대가람을 이곳에 지어 대사에게 보답하고 토지와 재물과 보배를 많이 하사하여 왕실의 복을 비는 절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혜종(惠宗, 944~945년) 정종(定宗, 946~949년) 광종(光宗, 950~975년)조에 하사가 계속 이어져 이 절을 받들어 모심이 학사 임민비(林民庇)에게 절의 기록을 짓게 하여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돌에 새기기에 이르렀다. 능여대사의 제자인 신홍(信弘) 혜안(慧安) 등 8인이 계속 주석하며 금자(金字) 사경(寫經) 593함(函)을 조성하고 함은 모두 옻칠과 황금으로 장식하여 해장당(海藏堂)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전각과 당우의 화려함과 훌륭한 승려들의 번성은 우뚝 솟아 동방의 제일도량이 되었다. 승려들의 삼매 수행으로 그 도가 국사가 된 자는 이 절로부터 자취를 시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 절의 북쪽 언덕에 길한 자리가 있어 공정대왕(恭靖大王, 조선 제2대왕 정종, 1399~1400년)의 태(胎)를 봉안하였고 이로 인해 절에 토지를 하사하여 은총을 내렸다. 학조(學祖) 대사가 있어 세조의 특별한 우대를 입어 이 절에 머무르며 십년이 넘도록 중수하였고 그래서 말하기를 이 절에 공덕을 베푼 사람은 모두들 능여대사와 학조대사 두 분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절이 모두 불타 재가 되어 산인 인수(仁守)와 명례(明禮) 등이 중수를 발원하고 그들을 이어 묘연(妙衍) 상원(尙元) 신흡(信洽) 보감(寶鑑) 도혜(道慧) 각순(覺淳) 등이 그 일을 맡아 70년 동안 앞에서 뒤에서 힘을 써서 전각의 숫자와 부처를 공양하는 기구가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 현판으로 전(殿)이라 이름한 것이 8개, 각(閣)이라 이름한 것이 3개, 당(堂)이라 이름한 것이 12개, 료(寮)이라 이름한 것이 4개, 장(莊)이라 이름한 것이 3개, 문(門)이라 이름한 것이 4개요, 정실(正室)이 353칸이고 회랑(廚廊)은 그 배나 된다. 산내의 20여 개의 암자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여러 비구들의 경영과 중수는 부지런하다고 할 만하다.

절의 승려인 가선(嘉善) 계려(階呂)가 본사의 전말(顚末)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재물을 모아 돌을 다듬어 새기고 싶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이 절은 전시대 고려 때에는 신성한 개국 사업을 도와 이곳에 터를 잡았고 우리 조선에 들어서는 길이 태실(胎室)을 보호하였으니 나라의 경사를 기르는 터전인 즉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와 이익되게 한 공은 어찌 다른 산사에 비길 것인가. 절이 여러 차례 퇴락했다가 곧바로 부흥한 것은 또한 이런 까닭에서인 것이다. 마침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에 이어 명하여 이른다.

묵가와 도가의 장경을 시작한 자취는
어찌 그리 아득한지 기록할 수가 없네
창건한 자는 능여대사요 계승한 자는 학조대사라
오직 뚜렷하기만 하여 마치 어제 일 같구나
노송나무 두 그루가 창창하여 시들지 않으니
이 절과 더불어 처음과 끝을 같이 하기를

숭정기원 무진후 54년 신유(숙종 7, 1681년) 7월 일 세움

(뒷면)
지난 신유년(숙종 7, 1681년)에 화상(和尙) 여상(呂祥)이 이 비를 처음 새겼는데 다 마치지 못해 쓸모 없는 조각돌이 되고 말았다. 그때 화상 태감(泰鑑)이 슬퍼하며 탄식하여 이끼를 쓸어내고 자획을 새겼으며 이수(?首)와 귀부(龜趺)를 온 힘을 기울여 새로 마련하여 한 주갑 뒤인 신유년(영조 17, 1741년)에 우뚝 세우니 혹은 보통 일이 아니며 아마도 인연을 기다려 그렇게 된 모양이다. 하물며 전 화상(前和尙) 종익(宗益)과 함께 또 자하문(紫霞門) 밖에 무지개다리를 이루어 만장교(萬藏橋)라 이름하여 절의 외양에 일조를 하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 해 6월 상순에 수원인(水原人) 백봉집(白鳳集)이 적는다.

대사(大師)
처명(處明), 의천(儀天), 설한(雪閑), 관징(貫澄), 담숙(湛肅), 조원(祖遠), 탁행(卓行), 태일(太一)

도인(道人)
진기(振其), 법원(法圓), 효안(效安), 충륵(忠勒), 붕일(鵬一), 성안(性安), 채인(彩認), 정징(定澄), 응희(應熙)

전화상(前和尙) 설운(雪雲), 전화상 청찰(淸察), 전화상 수변(秀卞), 전화상 담현(曇現), 전화상 종순(宗順), 전화상 취운(就運)

본사질(本寺秩)
선축(禪?), 득순(得淳), 두철(杜哲), 대준(大俊), 심철(心哲), 새임(璽任), 새협(璽?), 지행(智行), 종안(宗眼), 민형(敏?), 치학(致學), 석능(釋能), 축잠(?岑), 순기(順己), 세민(世敏), 극명(克明), 영인(英印), 태숙(太淑), 위찰(位察), 정열(定悅), 문인(文印), 진순(進順), 시응(時應), 시한(時閑), 위천(位天), 승천(勝天), 희신(熙信), 귀협(??), 해옥(解玉), 응백(應伯), 신익(神益), 신욱(神旭), 재찬(再贊), 연휘(演輝), 관오(寬悟), 청윤(淸允), 회옥(會玉), 회감(會鑒), 회한(會閑), 세관(世冠), 신기(信己), 연기(演己), 계찰(戒察), 성휘(省輝), 태우(太祐), 위성(位星), 국념(國念), 회식(會湜), 쌍옥(雙玉), 쌍붕(雙鵬), 정훈(定訓), 천일(天一), 국간(國侃), 국등(國登), 정학(定學), 계철(戒哲), 채흠(彩欠), 순화(順和), 홍간(弘侃), 조연(祖演), 지원(智元), 최은(最?), 종인(宗印), 치윤(緇允), 천준(天俊), 법순(法淳), 팔징(八澄), 삼원(三元), 신환(信還), 추환(秋還), 호언(護彦), 호신(護信), 호열(護悅), 재희(再熙), 약율(若律), 추헌(秋軒), 여순(呂順), 명종(明宗), 풍성(?性), 풍정(?淨), 한숙(漢淑), 월순(月淳), 월관(月寬), 월명(月明), 월화(月和), 월림(月林), 월훈(月訓), 월삼(月三), 찬유(贊裕), 진철(進哲), 일점(日點), 풍일(?一), 쾌세(快世), 치상(緇尙), 치율(緇律), 긍행(肯行), 팔영(八英), 묘정(妙淨), 사신(師信), 치백(緇白), 진선(進善), 희준(熙俊), 신영(信英), 쾌심(快心), 선원(善元), 한붕(漢鵬), 홍민(弘敏), 월경(月瓊), 선찰(善察), 사눌(師訥), 풍감(?鑒), 풍익(?益), 산암(山庵), 희운(熙雲), 두성(斗星), 묘운(妙雲), 수찬(秀贊), 뇌원(雷遠), 설잠(雪岑), 여청(呂淸), 일현(一玄), 종임(宗任), 해순(海淳), 보운(普雲), 원오(圓悟), 시연(時演), 순명(順明), 정원(定元), 청원(淸遠)

절 위전(位田) 논 30결

각전(各殿)
대웅전(大雄殿), 팔상전(八相殿), 천불전(千佛殿), 백화당(白華堂), 명부전(冥府殿), 영자전(影子殿), 연향각(燃香閣), 향적전(香積殿), 운문각(雲門閣), 대양문(大陽門), 범종각(泛鍾閣), 만세루(萬歲樓),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자하문(紫霞門)

각방(各房)
청규헌(聽糾軒),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총운료(摠運寮), 청우당(聽雨堂), 영류당(詠流堂), 남월료(南月寮), 월영료(月暎寮), 청풍료(淸風寮), 명월료(明月寮), 지대동(紙大同)

각암(各庵)
지장전(地藏殿), 극락전(極樂殿), 부도전(浮屠殿), 은선암(隱仙庵), 명적암(明寂庵), 견불암(見佛庵), 능여사(能如寺), 내원(內院), 상원(上院) 금강대(金剛臺), 백운암(白雲庵), 심적암(深寂庵), 영운암(靈雲庵), 운수암(雲水庵), 묘적암(妙寂庵)

당시 승통(僧統) 가선(嘉善) 태감(泰鑑)
삼강(三綱)
수승(首僧) 지원(智元)
직사(直舍) 혜감(惠鑒)
삼보(三補) 월섬(月暹)
지사(持事) 선총(善摠)
서기(書記) 상원(尙圓)
연화질(緣化秩)
도감(都監) 통정(通政) 종익(宗益)
별좌(別座) 통정 한정(漢定)
편수(片手) 가선(嘉善) 최협(最?)
각수(刻手) 서붕(瑞鵬), 흥책(興策), 오덕귀(吳德貴), 호현(好賢)
공양주(供養主)
대숙(大淑), 포원(抱遠), 국준(國俊), 국협(國?), 돈평(頓平), 포관(抱寬), 치숙(緇淑), 긍찰(肯察), 추성(秋星), 존흠(尊欠), 수연(守演), 돈훈(頓訓), 풍훈(?訓), 사규(師圭), 돈섬(頓暹), 긍련(肯連), 치각(緇覺), 포련(抱連), 돈식(頓湜), 돈규(頓奎), 돈수(頓修), 존희(尊熙), 존신(尊信), 통율(通律), 통원(通遠), 치열(緇悅), 치탄(緇坦), 포선(抱善), 포신(抱信), 돈희(頓熙), 돈혜(頓惠), 돈기(頓己), 존일(尊一), 돈연(頓演), 돈정(頓淨), 존혜(尊惠), 체능(?能), 박태진(朴太振), 이중해(李重海), 명혜(明惠), 성준(性俊), 한초(漢楚), 김장수(金長守), 선은(善?), 통준(通俊), 돈율(頓律), 굉익(宏益), 선행(善行), 송만명(宋萬命)
야장(冶匠)

숭정기원후 114년 신유(영조 17, 1741년) 추7월 기망(16일) 세움
-해석자 정병삼-

3.1.2. 직지사 추담대사비

1787년 세워진 추담대사의 비이다.
=====# 해석문[5] #=====
금산(金山) 직지사(直指寺) 추담대사비(秋潭大師碑)
추담대사(秋潭大師)의 비(碑)(전자(篆字)로 씀)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선교양종(禪敎兩宗) 추담당대사(秋潭堂大師) 비명(碑銘) 병서(幷序)

영남(嶺南) 금산(金山, 원문에는 金만 표기됨, 경상북도 김천)의 명적암(明寂庵)에 영각(影閣)이 있는데 부휴(浮休)의 적전인 추담(秋潭) 대선사(大禪) 법명 관징(琯澄)의 계단(戒壇)이라고 한다. 선사의 속성은 백(白)씨이며 수원(水原) 사람이다. 숙종 임오년(1702년) 10월 24일 금산의 위동리(衛洞里)에서 태어났다. 모친의 꿈에 달이 품 안으로 들어와서 임신을 하였으니 그 태어난 것이 또한 달을 태몽으로 꾼 것이었다. 나이 13세에 뇌원(雷遠)에게 출가하였고 원공(圓空)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배움에 뜻을 두어 사방의 대종사(大宗師)로 칭해지는 문하에 유력하였으니 회암(晦庵), 낙암(洛岩), 환성(喚醒), 쌍운(雙運), 대적(大寂)과 같은 이들이며 끝내는 운암(雲岩)의 후계자가 되었다. 여러 법조사(法祖)들이 모두 대승(上乘, 大乘)에 적합하다고 찬탄하였다. 계축년(1733년) 학문이 대성하여 마침내 화로(盧)를 손에 쥐고 단(壇)에 올랐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르니 팔방의 중생이 문에 이르러 법익(益)을 청하는 자가 날마다 수백이었다. 넘쳐날 정도로 많이 가르치고 이끌었지만 조금도 막힘이 없이 칼날로 실을 가르듯 명쾌하고 분명하였으며 환히 밝은 것이 어두운 길에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그 문하에는 늘 깊이 깨달은 자가 많았다. 선사의 얼굴은 희고 밝았으며 키는 8척, 허리둘레는 몇 위(圍: 허리둘레 단위)였고 성품은 다소 엄하고 신중하였다. 나이 든 뒤에는 도가 통하여 사물과 함께 온화하게 기뻐하며 은혜를 베풀었고 혼연히 자비의 큰 덕을 이루었다. 여력이 있으면 시문(詩文)에 힘썼는데 또한 고상하고 속되지 않았다. 석장을 짚고 한번 산을 나가니 사방에서 호응하였고 가르침의 바다(敎海)가 깊고 넓어서 가깝고 먼 곳에 모두 미쳤으니 한 때의 여러 명사와 석덕들도 그보다 낫지 못했다. 당시 표충(表忠)의 으뜸 자리(長席)를 반드시 극망(極望)으로 골랐으나 선사가 여러 번 차지하였다. 운수(雲水), 명적(明寂) 두 암자에 모두 진영(眞影)이 있으니, 아! 성대하구나. 무술년(정조 2, 1778년) 5월 6일에 명적암에서 입적하였다. 이에 7일에 상서로운 뼈(瑞骨)가 나오니 문도 광민(廣敏) 등이 부도를 세워 안장하였다. 10년이 지난 정미년(1787년)에 문도 총화(摠華)가 영각(影閣) 앞에 비석을 세우고자 내게 와서 글을 청하였다. 아! 선사는 한량없는 육신으로 삼법계(三法界)를 거치면서 항시 나타나기도 하고 항시 나타나지 않기도 하니 또한 어찌 저 부도를 쓸 것이며 또 어찌 저 비석을 쓰겠는가? 그러나 총화의 정성을 거듭 원망하며(重違) 끝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빛(曰)은 공(空)하면서도 공(空)하지 않으니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어둠속에서 구하여 묘하게 들어맞으니
호랑이는 엎드려 있고 용은 숨어있도다.
빛이 도솔천에서 빛나니 오직 선사의 참된 모습이구나!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86세 노인 강항(姜杭) 지음
진산후인(晋山後人) 강세백(姜世白) 전자(篆字)로 글씨 씀

(이면)
<제자질(弟子秩)>
초규(初圭) 민식(敏式) 성원(晟元) 도규(道圭) 정우(定于) 가우(可愚) 여우(如愚) 가성(可誠) 돈헌(頓?) 상초(象初) 우평(宇平) 광민(廣敏)
<손제자질(孫弟子秩)>
우직(偶直) 존성(存性) 범해(?解) 성엽(性曄) 도홍(道弘) 염휘(念輝) 청일(淸一) □□(□□) 위환(位還) 성천(成千) 보추(普樞) 거훈(巨熏) 영희(永希) 태유(泰有) 탄하(坦河) 제묵(提默) 종윤(宗允) 낙선(樂善) 사일(思一) 석보(碩普) 품현(品賢) 대유(大有) 보유(普有) 하유(賀有) 영유(永有) 상선(象善) 부책(赴冊) 문책(文冊) 법률(法律) 낭초(浪初) 장오(藏旿) 제선(濟善) 유심(有心) 종철(宗哲)
<상좌질(上佐秩)>
연오(演旿) 순옥(順玉)
<손상좌(孫上佐)>
집사(執事) 운담(雲潭) 총화(摠華) 진우(振羽) 유신(有信) 계손(癸孫)
<질자질(姪子秩)>
백상태(白尙太) 상엽(尙曄) 이상응(李尙應) 상손(尙孫)
<본사(本寺)>
긍우(肯宇) 자우(自宇) 통도감(統都監) 자찬(自?) 자선(自善) 자문(自文) 번상(煩尙) 순우(順宇)
쌍계사(雙溪) 달우(達宇) 근우(根宇) 총우(摠宇)
해인사(海印) 총우(摠宇) 총유(摠有)
봉곡사(鳳谷) 정우(正宇) 총성(摠性)
공림사(公林) 정우(正宇)
<노덕(老德)>
영파당 성규(影波堂 聖奎) 대운당 총활(大運堂 總?)
숭정 기원후 정미년(1787년) 동짓달(至月) 일에 세움
- 해석자 정병삼 -

4. 산내 암자

5. 여담

원래는 (조계종) 승려는 진신 사리가 있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수계를 받아야하지만, 통도사가 바빠서 여기서 수계를 받는다고 한다.

현재 입장료는 무료이다.
절 입구에 무인커피머신을 설치하여 이용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절의 이름을 딴 경부선의 철도역인 직지사역이 있다. 다만 직지사에서부터 거리는 꽤나 떨어져 있다. 직지사역은 직지사 인근 동리의 승객을 위한 역이라기보다는 그 시절 경부본선상에서 추풍령 고개를 올라가기 위해 증기기관차가 쉬어간다는 의미가 강했다.[6] 직지사역은 2007년 6월 1일부터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역이 되었다. 어차피 김천 시내버스들이 직지사 입구까지 바로 꽂아주기 때문에 이용객이 거의 없긴 하다. 참고로 김천시 초중고교들이 소풍을 간다면 십중팔구 직지사로 간다.

대양문은 1990년쯤에 세워졌고 부처님의 큰 광명을 상징한다. 이 문 안의 양쪽 문에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다. 금강문 안에 금강역사 석상 두 개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없어졌고 두 개의 금강역사(금강 신장) 탱화와 두 개의 조그마한 인왕(불교)상( 청동 제조)이 이 금강문 안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두 개의 금강역사 동상이 금강문 입구로 옮겨졌다. 천왕문 안에 소조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직지심체요절과는 관련이 없다. 직지가 간행된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었던 흥덕사였다.

경내에 지네가 많다. 주로 수계식을 하는 만덕전 옆에 화엄일승법계도를 재현하여 산책로를 만들어 놨는데, 거기 지네가 우글우글하다. 지네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산책로 이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애초에 지네는 해충이다. 물론 그밖의 전각에서도 지네를 쉽게 볼 수 있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시아권에 서식하는 왕지네이며, 몸길이가 10cm 이상 되는 경우가 많다.

불교 나이트를 창시한 보운 스님이 임관 전에 승려로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직지사 대웅전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는 얘기가 나와서 한동안 논란이 된 적도 있다.

2011년에 이곳에서 30대 남성 이후재 씨가 실종된 사건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천 직지사 30대 남성 실종 사건 문서 참조.

직지사 뒷편으로 가면 황악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황악산은 해발 1,111m로,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블랙야크 한국 100대 명산으로 지정된 산 중 하나다. 처음 온 사람들은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

6. 외부 링크


[1] 김천 직지사 석가여래삼불회도라는 명칭으로 국보로 지정예고되었다. [2] 영조 17년(1741) 건립 [3] 정조 11년(1787) 건립 [4] 해석문 부분을 클릭하면 해석문을 볼 수 있다. [5] 해석문 부분을 클릭하면 해석문을 볼 수 있다. [6] 직지사역에서부터 계속 수십 퍼밀의 오르막이 추풍령 고개까지 주욱 이어지는데, 현대식 디젤전기기관차는 이 구배를 오르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지만 불 때서 스팀 피우고 화통을 덥힌 상태에서 고개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증기기관차에게는 꽤나 노하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고충이 있던 곳이 바로 경원선 선구인데 여기도 의정부부터 추가령까지 계속 오르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