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달수(李達洙), 이경옥(李慶玉) |
자 | 동수(東洙) |
출생 | 1909년 8월 5일 |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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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년 5월 16일 (향년 59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89호 |
본관 | 충주 지씨 (忠州 池氏)[1]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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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09년 8월 5일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지청천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용자[2]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 내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일찍이 아버지 지청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고, 1932년 한국독립군에서 중사(中士) 급 분대장으로서 한·중 연합군의 일원으로 지린성 솽청시(雙城市)[3]·아청현(阿城縣)[4]·우가둔(牛家屯)[5] 등지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며 만주군과 교전했다.
그 뒤 한·중연합군이 와해되고 독립군의 근거지가 중국 본토로 옮겨지자, 아버지를 따라 난징으로 가서 둥관터우(東關頭)[6]에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민족혁명당 군사부원이 되었다. 그리고 1938년 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화베이 및 쑤이위안성(綏遠省) 지구 공작대장으로 특별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주계(主計) 및 경리로 임명되었고, 그해 11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간부에 보임되었다. 1941년 2월 나태섭· 고시복· 유해준(兪海濬) 등과 함께 쑤이위안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민혁명군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으며, 쑤이위안성 일대부터 관동군 점령 하에 있는 허베이성의 베이징· 톈진· 탕산지구와 장자커우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전방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전에 장자커우에서 포섭했던 조선인 청년 최준(崔俊)이 관동군 헌병대에 자수하여 밀고함으로써 동지들이 검거되자, 산시성 시안으로 복귀하여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평수(平綏)[7]지구 적 후방 공작단 부단장에 임명되어 활동했고, 1943년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장 및 난징 임시편입 지대 부대장을 역임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가,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다.
1969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