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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롯데 자이언츠 소속 좌완 투수 주형광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에 입학해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입학 당시 3학년 염종석, 2학년 손민한, 1학년 주형광은 부산고 역대 최강의 트로이카로 꼽힌다.[1] 손민한이 3학년 시절[2] 부상으로 인해서 실질적으로 2학년때부터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혹사 때문에 팔꿈치 이상이 빨리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고 재학 시절에는 당시 경북고 좌완 에이스였던 이승엽을 상대로[3] 홈런을 치기도 하였다. 뛰어난 이닝소화 능력과 더불어, 고등학교 선수 기준으로는 수준급의 완급 조절능력도 있어서 꾀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1992년 대통령배우승, 황금사자기 준우승, 1993년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어 내며 당대 최고의 고교 좌완으로 손꼽혔으며 이러한 실력 때문에 프로와 대학에서 스카웃 경쟁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동국대학교 측에서 입학하면 고교 동기들도 같이 입학시켜주겠다고 제안, 결국 동국대학교 입학을 선택하고 가등록까지 마쳤다. 그런데 이때 롯데가 당대 신인 최다금액을 주겠다며 나섰고 주형광은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사건 당시, 이미 대학에 가등록을 해놓은 선수에게 스카웃 제안을 한 롯데와 이를 받아들인 주형광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롯데에서는 고졸 신인 역대 최대 금액을 제시하기 위해 LG와 입단계약을 맺은 김재현의 계약금 발표시기보다 늦게 발표하려고 했는데 LG 측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신인 계약 발표가 늦어지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결국 주형광이 계약금 9,200만원과 연봉 1,200만원을 합쳐서 1억 400만원을 받아 계약금 9,100만원으로 총액 1억 300만원을 받은 김재현을 100만원 차이로 따돌리고 당대 고졸 신인 최고 몸값을 기록하게 되었다.[4][5]
3. 롯데 자이언츠
3.1. 1994 시즌
1994년에 데뷔했으며 당시 고졸신인 역대 최고 몸값인 1억 4백만원의 몸값을 받고 입단했다. 정확히는 계약금이 9천 2백만원이었고 연봉 1,200만원을 합쳐 1억을 돌파한 것이긴 했지만 저 9천 2백만원의 계약금도 당시로서 고졸신인 역사상 최고액이었다.[6]
데뷔전은 4월 13일 사직구장에서 OB 베어스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 그러나 이 경기에서 3이닝동안 5피안타 3볼넷 5실점으로 난타를 당해[7] 역시 프로의 벽은 높은건가 라는 인식도 있었으나, 다음 경기인 LG전에서 4:0으로 앞서다가 4:3에 무사 2,3루까지 추격을 허용한 강상수의 구원 투수로 구원등판해 무사만루에서 김재현을 홈병살시키고 깔끔하게 세이브를 따내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뒤이은 세 번째 등판이자 프로 두 번째 선발등판인 한화전에서 9이닝 2피안타 9탈삼진 1실점(비자책)이라는 엄청난 피칭으로 완투승을 따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인 시즌은 11승 5패 1세이브 3.04의 평균자책점으로 고졸 신인으로서는 엄청난 호성적을 올렸지만, 신인왕은 아쉽게도 유지현이 차지한다.[8]
3.2. 1995 시즌
2년차인 1995년에는 200이닝을 넘게 소화하며 10승 7패 평균자책점 3.05를 기록했다. 저 엄청난 이닝과 준수한 평균자책점에도 불구하고 노디시전 경기가 많아 10승에 그치긴 했지만, 한풀이를 하듯이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 특히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시리즈를 끝낸 6차전의 1피안타 무사사구 1:0 완봉승은 그 백미.[9] 플레이오프에서 MVP에 선정되었다. 그해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도 선발로 등판해 패전투수가 되긴 했지만 8.1이닝 2실점으로 잘 막았다. 또한 시즌 후인 11월에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도 참가한다.덤으로 루키 시즌 데뷔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로선 꿈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통산 200승을 목표로 뛰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본인 표현으론 나이가 어린만큼 매년 10승씩 20년간 뛰면 달성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는데, 정말 본인의 다짐대로 2년차까지 매년 10승 이상을 거두었다. 이렇게 말 뿐만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자 하일성 해설위원 또한 주형광은 이미 200승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로 극찬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2년차 시즌을 마친 1995년 11월 한 언론사에서 뽑은 각계 유망인 50인 가운데 스포츠선수 가운데선 농구의 현주엽, 골프의 박세리와 함께 야구선수로는 유일하게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주형광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일 듯 여겨졌다.
3.3. 1996 시즌
(출처 : 포토로) |
3년차인 1996년에는 무려 216 2/3이닝을 던지며 18승 7패 1세이브 3.36의 평균자책점과 221개의 탈삼진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렸으며, 다승왕과 탈삼진왕에 올라 2관왕을 차지했다. 216과 2/3이닝을 던지면서도 볼넷 38개/탈삼진 221개라는 압도적인 볼삼비를 뽐냈으며[10] 한 시즌 221 탈삼진은 대선배 최동원(1984년, 223K)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었다.[11][12] 그러나 MVP는 아쉽게도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구대성이 가져갔다.[13][14]
보다시피 고작 3년차에 그야말로 리그를 정복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게 겨우 만 20세에 거둔 성과였다는 것이다.
3.4. 1997 시즌
그러나 저 압도적인 1996년 시즌이 본인의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무리였던지, 시즌을 마친 후 주형광은 피로 누적으로 인한 신장 기능 약화와 무리한 어깨 근육 사용으로 인한 골절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한화의 구대성이나 OB의 김민호 등이 잇달아 신체검사에서 군 면제 판정을 받아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주형광 또한 병원을 핑계로 입대를 미룰 수가 없었고 결국 재검 끝에 현역으로 입대를 했다. 리그의 역사를 바꿔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주형광의 현역 입대는 사람들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만 해도 군 복무 기간이 26개월이었기 때문에, 3년의 공백은 주형광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애당초 여론의 시선 때문에 무리를 해서 입대를 한 주형광은 어깨와 신장 이상으로 도저히 훈련을 소화할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련에서 열외된 채 군 병원에만 머무르다가 결국 의병 제대 판정을 받았다. 모두가 에이스의 귀환을 환영했지만 역설적으로 주형광의 야구인생에 치명타를 안긴 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마 때의 혹사와 더불어 지난 3년간 600이닝을 넘게 던지며 기록한 총 9,464개의 투구, 심지어 의병 제대까지 받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던 몸 상태임을 감안하면 지금 같으면 당연히 쉬게 하며 선수를 보호했겠지만, 분업 야구가 조금씩 정착되어가던 1990년대 후반까지도 프로야구에 있어서 선수 보호에 관한 의식은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다는게 주형광으로서는 크나큰 불운이었다.[15]
설상가상으로 1997년 롯데는 시즌 초반부터 순위가 꼴찌로 추락해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했고, 당초 현역 입대로 인해 이 시즌은 전력 외로 분류된 주형광이었지만 이런 팀 사정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대하자마자 바로 1군 엔트리에 투입되었다. 심지어 퇴소 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마운드에 올라 3.1이닝을 던져 승리투수가 되었을 정도. 기사
몸이 좋지 않아 조기 전역을 했을 정도로 몸상태가 나쁜 선수가 동계훈련도 없이 마운드에서 온전히 공을 던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롯데구단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라고 한 셈. 당시 지금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후진적이었던 리그 환경은 그렇게 롯데구단과 주형광을 내몰았다.[16]
주형광은 꼴찌로 추락한 팀을 구하기 위해 젊은 혈기로 선발·구원을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으며, 심지어 면도삭발까지 불사하면서 투혼을 불살랐다. 그러나 32경기에 등판해 131과 2/3이닝을 던지며 6승 13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5.88이라는 처참한 성적[17]을 기록했고, 팀을 꼴찌에서 구해내지도 못했다. 애시당초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로 동계훈련조차 치르지 못하고 공을 던진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3번의 완투를 기록해 에이스의 자존심만은 지켰다.
그리고 이 시즌의 휴식 대신 무리한 출장은 결국 몇 년 뒤에 심각한 후유증으로 돌아온다. 만약 이 시즌에 관리를 했었다면 이후의 부상도 없었을지 모른다.[18]
3.5. 1998~1999 시즌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11회말 3연속 삼진을 잡으며 경기를 끝내면서 |
이듬해 절치부심하며 1998 시즌과 1999 시즌 2년 연속으로 200이닝 가까운 투구에 두자리 승수를 올렸다.
특히 1999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고군분투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19]에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었고, 시즌 후인 11월에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도 참가한다.[20]
3.6. 2000 시즌
2000 시즌에는 8승 6패 3.4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당시 나이는 고작 만 24세였다. 그때까지 그의 통산 기록은 무려 77승에 1,200이닝 1,000 탈삼진 돌파로 불과 20대 초반 나이로는 쉽게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주형광이 24세 시즌까지 쌓은 누적 이닝은 무려 1258.1이닝이다.2000 시즌 종료 후 일본 진출을 꾀했으며 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줬고, 자매구단인 치바 롯데 마린스로 2년 임대료 1억엔에 연봉 7천만엔의 구체적인 조건 이야기까지 나오며 이적이 확정되나 싶었지만 야쿠르트의 용병투수 제이슨 제이컴[21]이 자유계약으로 풀리자 주형광과 협상을 중단하고 제이슨 제이컴을 영입하는 바람에 일본프로야구 진출에 실패했다.[22]
3.7. 2001 시즌
결국, 2001년에 팔꿈치가 탈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시즌 개막하고 열흘도 안된 시점에서 2경기 등판하고 팔꿈치 통증으로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휴식과 재활을 병행하며 8월부터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복귀를 타진했으나 이 과정에서 그렇지 않아도 부분 파열 상태였던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결국 시즌 아웃.[23] 시즌 후 일본 요코하마의 미나미공제병원에서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으나 당시 흔치 않은 수술 방식인 '힘줄을 쇠못으로 고정하는 방식의 수술'을 받았다.그러나 이 수술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며, 이 시기부터 주형광은 길고 긴 내리막길을 타게 된다.[24]
3.8. 2002 시즌
1년 가까운 재활 끝에 2002 시즌 막바지에 한타자씩만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7경기를 시범 등판했지만 이미 그는 예전의 주형광이 아니었다.3.9. 2003 시즌
2003 시즌부터는 다시 풀시즌을 소화하게 되었지만 그는 더 이상 선발투수가 아닌 짧은 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가 되어 있었다. 62경기에 등판해 74와 2/3이닝을 소화하며 13홀드를 기록했지만 승리 없이 9패 1세이브만 떠안으며 결국 3년 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다.[25]3.10. 2004 시즌
2004 시즌은 주형광이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웠던 시기. 겨울동안 착실히 준비해 4년만에 다시 3선발로 로테이션에 복귀했다. 무엇보다 구위가 다시 전성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왔으며 신임 양상문 감독도 주형광의 부상 전력을 고려해 등판간격과 투구수를 철저하게 관리해주면서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6월 1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삼성전에서 배영수와 맞대결을 펼치며 7과 2/3이닝동안 6피안타 2실점(1자책)으로 호투하던 와중 다시 팔꿈치 부상을 입게 되고,[26] 그렇게 선발 투수로서의 주형광은 끝이 나고 말았다. 주형광 본인도 훗날 회고하길 "내 공은 그 때 죽었습니다." 라고 했을 정도. 바로 시즌 아웃되어 잔여시즌을 출장하지 못했으며, 토미 존 서저리를 다시 한 번 받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결국 주형광은 수술 대신 재활을 택했다.[27]3.11. 2005~2006 시즌
이듬해인 2005 시즌엔 6경기에 선발 등판하며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전술했듯이 이후 다시는 선발 투수로 재기하지 못했다. 재부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흔히 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힘줄을 쇠못으로 고정하는 형태의 수술을 받은 것도 큰 원인으로 꼽는다. 재활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복귀한 것도 부상 재발의 큰 원인이며, 본인 또한 이 점을 가장 아쉬워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28] 선발로서의 재기가 실패한 이후 그 뒤로 3년간 좌완 중간계투 및 원 포인트 릴리프 등으로만 뛰었고3.12. 2007 시즌
2007 시즌은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등번호 28번을 직계 후배인 장원준에게 물려주고 중간계투로만 활약했다. 33경기에 등판해 21과 2/3이닝을 던져 2패 1홀드 4.1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시즌을 마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시점의 나이는 불과 31세.커리어 초창기 200승 달성을 기대받았던 선수가 200승은 고사하고 100승도 채우지 못하고 겨우 31세에 은퇴했다는 것은 롯데 자이언츠가 주형광을 얼마나 막 굴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15년까지 현역으로 활약한 손민한보다 1살 적고, 2017년 까지 현역에 있던 이승엽, 2018년까지 현역이었던 임창용과 동갑이다.[29][30] 24세 시즌(2000년)까지 거둔 승수는 77승.[31] 만약 제대로 된 팀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다면 기복 등을 고려해도 200승 까지는 아니더라도 150승쯤 달성했거나 더 나아가서 정민철의 161승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할 정도.[32][33]
4. 연도별 주요 성적
- 진한 글씨는 리그 5위내 기록이고, 붉은 글씨는 1위 기록이다.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1994 | 롯데 | 28 | 186⅔ | 11 | 5 | 1 | 0 | 0.688 | 3.04 | 147 | 15 | 66 |
142 (4위) |
75 | 63 |
1995 | 30 |
200⅓ (3위) |
10 | 7 | 0 | 0 | 0.588 | 3.05 | 170 | 18 | 56 |
152 (4위) |
73 | 68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1996 | 롯데 | 30 |
216⅔ (2위) |
18 (1위) |
7 | 1 | 0 | 0.720 | 3.36 | 196 | 20 | 47 |
221[34] (1위) |
86 | 81 |
1997 | 32 | 131⅔ | 6 | 13 | 3 | 0 | 0.316 | 5.88 | 138 | 25 | 63 | 84 | 91 | 86 | |
1998 | 31 |
183⅓ (4위) |
11 | 7 | 1 | 0 | 0.611 | 3.63 | 179 | 17 | 50 | 148 | 90 | 74 | |
1999 | 31 |
190 (3위) |
13 | 12 | 1 | 0 | 0.520 | 3.98 | 190 | 25 | 47 |
177 (3위) |
88 | 84 | |
2000 | 26 | 149⅔ | 8 | 6 | 0 | 0 | 0.571 | 3.49 | 136 | 18 | 52 | 127 | 60 | 58 | |
2001 | 2 | 3 | 0 | 1 | 0 | 0 | 0.000 | 15.00 | 6 | 3 | 4 | 2 | 6 | 5 | |
2002 | 7 | 1⅔ | 0 | 1 | 0 | 1 | 0.000 | 16.20 | 3 | 0 | 0 | 1 | 3 | 3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2003 | 롯데 | 62 | 74⅔ | 0 | 9 | 1 |
13 (4위) |
0.000 | 4.58 | 85 | 13 | 29 | 49 | 42 | 38 |
2004 | 11 | 63⅓ | 4 | 4 | 0 | 0 | 0.500 | 3.41 | 53 | 8 | 23 | 45 | 26 | 24 | |
2005 | 11 | 34⅓ | 3 | 2 | 0 | 0 | 0.600 | 6.03 | 39 | 7 | 15 | 23 | 24 | 23 | |
2006 | 52 | 67⅓ | 3 | 6 | 1 | 7 | 0.333 | 4.14 | 82 | 6 | 18 | 26 | 38 | 31 | |
2007 | 33 | 21⅔ | 0 | 2 | 0 | 1 | 0.000 | 4.15 | 24 | 3 | 6 | 12 | 10 | 10 | |
KBO 리그 통산(14시즌) | 386 | 1524⅓ | 87 | 82 | 9 | 22 | 0.515 | 3.83 | 1448 | 178 | 476 | 1209 | 712 | 648 |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94 | 4완투 | 1완봉 |
1995 | 5완투 | 0완봉 |
1996 |
10완투 (2위) |
1완봉 |
1997 | 3완투 | 0완봉 |
1998 |
6완투 (1위) |
1완봉 |
1999 | 4완투 | 0완봉 |
통산 | 33완투 | 3완봉 |
[1]
그리고 이들의 공을 받아낸 포수는 손민한의 동기
진갑용이었다.
[2]
그 당시
손민한은 몸쪽 볼을 잘 못 던져서 주형광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보는 시각이 꽤 있었다.
[3]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홈런왕 이승엽이 맞다. 원래 포지션이 투수였고 삼성에 지명받을 때도 투수로 입단했다. 그러나 타자로 전향해 대성공을 거뒀다.
[4]
당시 롯데는 신인들에게는 후하게 쳐줬다. 주형광 이전 대졸신인인
김경환에게는 1억원을 지불하기도 했고 1996년
차명주, 1997년
문동환과
손민한이 입단했을때 5억원을 주면서 특급대우를 해줬다. 돈이 급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총액 2500만원을 받은
염종석이 운이 없었던 수준.
[5]
이 때 신인들 몸값이 억대 이상으로 뛰자 몸값 거품이라는 목소리가 야구계 안팎에서 나왔다.
[6]
다만 최초의 고졸신인 1억 이상 몸값 기록은 LG의
신윤호가 가지고 있다. 계약금 8,800만원 연봉 1,200만원
[7]
다만 5회에 롯데가 동점을 만들며 패전투수는 면했다.
[8]
신인 최초
20-20을 했던 김재현이 묻힐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김재현은 타율 0.289, 21홈런 21도루를 기록했지만
유지현은 타율 0.305에 15홈런 51도루를 기록하며 확실히 신인왕에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보였다. 1992년~1998년은 리그 내에서 걸출한 신인들이 많이 나왔던 시기였다. 다만 이 시즌 신인왕은 신인 최초 20-20을 기록한 김재현쪽에 무게가 쏠리는 분위기였으나, 정작 투표는 유지현 쪽으로 몰려 김재현이 당시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에게 밉보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9]
그 피안타조차도 정타가 아닌 빗맞은 안타였고, 바로 다음 타자를 병살로 잡아내며 정확히 27타자를 상대했다.
[10]
심지어 그
류현진조차도 200이닝 이상 투구 시즌은 볼넷이 50개가 넘는다.
[11]
무려 2020년까지 통산 탈삼진 1, 2위가 변하지 않았다. 2021에 이르러서야 시즌 두산의
아리엘 미란다가 225탈삼진으로 최동원의 기록을 경신하며 순위가 조정되었다.
[12]
안우진이 2022년 224탈삼진을 기록해 4위로 내려갔다.
[13]
이해 구대성 말고도 최초의
30-30인
박재홍도 MVP후보에 올랐으나, 당시 분위기는 "신인왕,MVP 동시석권은 안된다" 였던지라 MVP는 구대성이 받는다.
주형광이 이 시기에 순수 선발로 뛰었다면,
구대성은 강병철에게 선발,구원 안가리고 굴려졌다.
[14]
이 이후로 221 탈삼진을 기록한 선수는
두산 베어스의
아리엘 미란다이다.
[15]
92년 우승의 주역이던
염종석의 재활을 주장했던
강병철 감독의 의견을 묵살해 염종석이 그 사달이 났음에도, 역시 말 안 듣는 구단 답게 주형광도 이렇게 무너질지 누가 알았을까?
[16]
반면 같은 시기에 신장염 때문에 병역면제 처분을 받은 LG 김재현은 아예 1997시즌을 거르면서 몸을 만든 뒤, 이듬해 복귀해 2010년까지 롱런한다.
[17]
심지어 WAR조차도 -0.09로 음수를 기록했다. 투혼을 불사른 것과 별개로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18]
돌아보면 당시 시즌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시즌 개막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에서 팀내 프랜차이즈가 확실했던 발빠른
전준호를
현대 피닉스의
문동환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게 현금 5억에 트레이드시켜버렸다.
김대익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실행한 트레이드였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탓에 리드오프 문제가 부각되고 실상 이 때 부터 롯데의 시즌이 꼬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팀 내 선수들이 단체로 금전 사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져 팀 분위기조차도 뒤숭숭했고, 결국 시즌 초반부터 꼴지로 추락한 뒤 한 번도 반등하지 못하고 48승 77패 1무승부로 그 시즌을 꼴찌로 마감했다.
[19]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대회였다.
[20]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한국팀이 펼친 4경기 모두 불펜으로 등판한다.
[21]
일본 등록명 제이슨 하카미
[22]
동년도인 2000시즌 종료 후에
정민태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대성은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한다.
[23]
주형광의 이탈로
김명성 감독이 마음 고생이 심했고 이것을 주변 지인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명성 감독 장례식장에 주형광이 갔을때 한 지인이 "너 때문에 감독님 돌아가셨다" 란 말을 듣고 죄책감에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
야만없이지만 만일 주형광이 시즌 초반에 부상당하지 않았더라면 2001 시즌에 최하위를 안 했을수도 있다. 뭐... 2001 시즌은 감독의 급사와
4번타자가 경기 중
타팀 투수를
죽빵을
때려그 해 남은 잔여경기 출전정지를 먹는악재가 겹친것도 한몫했지만....그런데 호세 빠지고 1군 올라온 선수가
훗날 롯데의 대스타로 성장하는 내야수라는 게 함정 그리고, 두 사람은
2006년 함께 팀 타선을 이끄지만, 투수들과 나머지 타자들이 노답이라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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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사례로 주형광이 토미존을 받은 시즌에 호세에게 얻어맞은
배영수가 있다. 배영수 역시 2006년 시즌 종료 이후 팔꿈치 인대가 완전히 끊어지며 토미존을 받았는데, 그 역시 주형광처럼 극심한 구위 저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복귀 첫 시즌의 부진 이후 그 다음 해 조금씩 부활을 하고 결국, 2년 뒤에서야 10승 투수로 돌아와 어느정도 조짐을 보여줬다. 다만 배영수 역시 주형광처럼 한화로 가서는 갑자기 구속이 10km가 또 줄며 전성기 시절에 비해 20km나 느린 공인 130km도 못 던지는 투수가 되었으나 어찌저찌 재활해서 결국 두산 이적 후 커리어 마지막을 헹가래 투수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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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03시즌 10선발-52구원등판으로 10-40 클럽에 들어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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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에 박힌 쇠못이 탈이나서 팔꿈치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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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존 서저리를 3번씩이나 받은
권오준이 여러번 재기하는데 성공하는 걸 생각하면 수술을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다만 말년에 자포자기하고 재활을 포기한 걸 보면 또 모르겠다. 권오준은 2019년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가 2020년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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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선수들이 많이 찾는 김진섭정형외과의 김진섭 원장은 '주형광은 원래 팔꿈치의 근육량이 적어 이런 투수일수록 재활기간이 길어야 하고, 이상적인 투구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어 충분한 기간동안 재활을 했다면 롱런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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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주형광의 경우는 빠른생일이라 학번으로 따지면 94학번이다. 그걸 감안해 한 살 올려 32세라고 쳐도 너무 일찍 은퇴한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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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인
박지철이 그보다 롱런했으며(2009년 완전 은퇴), 또 다른 동기인 임경완이 40세까지 현역(2015년 까지
한화 이글스)으로 활동하는 걸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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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이 2012년 25세 시즌까지 달성한 승수가 98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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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몸이 안 좋을 시기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하필 군에서도 면제 판정이 나와서 휴식 기간이 없이 바로 투구를 시작했다. 투수에 따라 군 복무 기간은 휴식, 재활 기간(예로 SK의
채병용)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정말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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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한은 물론이요 6년(프로 입단은 2년) 선배인
가득염보다도 빨리 은퇴할 줄 아무도 몰랐으니. 거기에 혹사로 인해 주형광보다도 더 많은 재활, 수술을 거친
염종석마저도 주형광보다 1년 더 뛰었다. 허나, 염종석마저 가득염보다 일찍 은퇴했다. 다만 염종석은 2019년 전까지 롯데 최장기간 소속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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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시즌 탈삼진 4위 기록, 1위는 미란다의 225개, 2위는 안우진의 224개, 3위는 최동원의 223개. 토종 좌완투수 한정으론 1위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