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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1976)

조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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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o72v3jpgxR1sqk8veo8_r2_500.png 1993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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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창설~2000년)
2001년 이후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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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e5e5e5
1958 1959 1960
이영민 타격상 제정 김동주
경남고
백인천
경동고
최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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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1962 1963 1964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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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식
경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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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1992 1993 1994 1995
강혁
신일고
노상진
배명고
조현
신일고
김건덕
경남상고
박현철
광주일고
1996 1997 1998 1999 2000
박진형
경동고
신민기
경남고
백정훈
광주상고
수상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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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7

LG 트윈스 등번호 3번
김선진
(1990~1994)
조현
(1995~1996)
손지환
(1997~2003)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번}}}
김상훈
(1994~1995)
조현
(1997)
김태룡
(1998~2002)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33번
김태룡
(1996~1997)
조현
(1998~2001)
장정석
(2002.6.16.~2002)
한화 이글스 등번호 29번
윈스턴
(2001.7.15.~2001)
조현
(2002)
조윤채
(2003)
}}} ||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2_529103_1345591815711808.jpg
조현
曺炫
출생 1976년 10월 4일[1] ([age(1976-10-04)]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신일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5~1996)
해태- KIA 타이거즈 (1997~2001)
한화 이글스 (2002)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여담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국프로야구 선수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신일고 시절에는 1년 위의 선배들인 김재현, 조인성과 함께 팀 타선을 이끌었으며, 1993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만 3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0.667, 6홈런 17타점이라는 맹활약으로 대회 MVP를 차지했고 그 해 이영민 타격상까지 수상했다.[2]

1994년 황금사자기에서는 부산고와의 8강전에서 주형광을 상대로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했고 광주일고와 준결승전에서는 만루홈런과 3점홈런으로 7타점을 쓸어담았다. 덕수상고와의 결승에서 4타수 4안타 3홈런 1 2루타를 기록하는 등 타격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조현은 계약금 1억 800만 원, 연봉 1,200만 원 등 총액 1억 2,000만 원을 받고 LG 트윈스에 입단하게 된다.[3]

2.2. 프로 경력

이미 앞서 고졸 신인 김재현의 맹활약을 지켜본 바 있는 구단과 팬들은 조현 역시 무리 없이 프로에 연착륙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조현은 데뷔 시즌인 1995년, 전반기에만 팀 내에서 가장 많은 9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기대를 충족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어퍼스윙이 높은 공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노출되면서 슬럼프에 빠졌고, 결국 후반기에는 홈런을 한 개도 때려내지 못했다.[4] 이듬해인 1996년에는 레벨스윙으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스윙폼이 흔들려 혼란만 가중시키며 0.212의 타율에 4홈런 21타점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고, 1996년 시즌이 끝난 후 동봉철 송유석을 상대로 최훈재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해태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1998년 시즌 후 군에 입대했다가 전역 후 방출당했다.[5] 그리고 2002년, LG 시절 감독이었던 이광환 한화 이글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에 입단해 기회를 노렸지만, 1군 6경기에 교체로 나와 1안타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고 결국 은퇴했다.

3. 여담

4.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1975년생이라고 하는데 1974년생이라는 말도 있다. 중학교 시절 유급 때문에 나이가 바뀌게 된 것. [2] 사실 그 해 이영민 타격상 수상 예정자는 고교 최고 타율을 기록한 김재현이었으나, 신일고 졸업 예정인 연세대학교와의 가계약을 파기하고 LG와 계약해 버린 것에 화가 난 대한야구협회에서 수상 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3] 조현이 받은 1억 2,000만 원은 당시 역대 타자 최고 계약금액이었다. 불과 몇 달 후 심재학, 김재걸 등이 이를 경신하긴 했지만. [4] 1995년 후반기에 조금만 힘을 더 냈다면 LG의 역사는 달라졌을것이다. [5]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의 보복으로 10승 투수였던 자신을 패전처리조로 내보낸 것도 모자라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라고 지시했고 송유석은 백네트에 공을 던져 퇴장당했다고 한다. 더이상 해태에서 야구를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LG 정삼흠 코치에게 부탁해 팀을 옮겼다고 밝혔다. [6] 김재현도 실제로는 1974년생이다. 조현이 1974년생이 맞다면 나이로는 동갑인셈 [7] 당시 멤버들로는 이호준, 김경태, 조인성, 신경현, 채종국, 김재현, 손인호가 있었다. 투수가 이호준, 포수가 조인성이었는데 한국어로 대놓고 말로 사인을 교환했다고 이호준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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