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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9:54:47

젠겔레르 줄러

젠겔레르 줄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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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실버슈.png
1938 FIFA 월드컵 실버슈
}}} ||
파일:Zsengellér Gyula.jpg
이름[1] 젠겔레르 줄러
(Zsengellér Gyula)
출생 1915년 12월 2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체글레드
사망 1999년 3월 29일 (향년 83세)
키프로스 니코시아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틀:국기|]][[틀:국기|]](1915~1918)
파일:헝가리 제1공화국 국기.svg 헝가리 제1공화국(1918~1919)
파일: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국기.svg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1919)
파일:헝가리 제1공화국 국기.svg 헝가리 제1공화국(1919~1920)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1920~1946)
파일:헝가리 제2공화국 국기.svg 헝가리 제2공화국(1946~1949)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57–1990).svg 헝가리 인민 공화국(1949~1989)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1989~1999)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7cm | 73kg
소속팀 설고터르이아니 TC (1935-1936)
우이페슈트 FC (1936-1947)
AS 로마 (1947-1949)
AC 안코나 (1949-1950)
데포르티보 사마리오스 (1951-1953)
국가대표 39경기 33골 (1936-1947)
감독 코센차[2] (1950)
데포르티보 사마리오스 (1951-1953)
페조포리코스 라르나카 (1953-1954)
페조포리코스 라르나카 (1955-1957)
네아 살라미스 (1957-1959)
코센차 (1959-1960)
페조포리코스 라르나카 (1960-1961)
살레르니타나 (1961-1962)
라벤나 (1962-1964)
아폴론 칼라마리아스 (1964-1965)
아포엘 FC (1965-1966)
페조포리코스 라르나카 (1966-1968)
아노르토시스 파마구스타 (1968-1970)
페조포리코스 라르나카 (1970)
ASK 올림피아코스 볼보스 (1972-1974)
아포엘 FC (1974-1976)
APOP 파포스 (1976-1979)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생활2.3.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5.1.3. 개인
5.2. 감독

[clearfix]

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3]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체글레드(Cegléd)에서 태어난 젠겔레르는 1929년 도시 팀에서 축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듬해 설고터르이아니(Salgótarján)로 팀을 옮겨 1935년에 1부 리그에 데뷔했다. 젠겔레르는 데뷔 시즌부터 24경기 출전, 19골의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팀은 강등되고 말았다. 이런 그를 헝가리의 다른 클럽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고 우이페슈트 FC가 젠겔레르의 새로운 팀이 되었다.

젠겔레르는 우이페슈트에서 뛰던 11년간 팀의 기대에 넘치도록 부응했다. 이적 첫 시즌부터 체흐 라슬로에 한 골차로 리그 득점 2위에 랭크되었고 리그 득점왕 5회와 더불어 4회의 리그 우승과 3회 준우승, 미트로파 컵 우승도 한번이 있었다. 1939년에 미트로파 컵에서 우이페슈트가 우승할 때 9골로 컵 득점왕에 오른 것을 포함, 총 56골을 넣은 젠겔레르는 그 시즌에 세계에서 가장 골을 많이 넣은 선수였다.[4] 이 시즌에는 6골을 넣은 경기 3회, 5골 2회, 4골 1회, 해트 트릭 3회를 기록했다.

우이페슈트에서 303 경기, 368골을 기록한 젠겔레르는 1947년 10월에 1,400만 리라의 이적료에 AS 로마로 이적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젠겔레르의 모습은 노쇠화로 인해 기대 이하였다. 데뷔 시즌에서 8경기만에 리그 데뷔골을 신고할 정도였고 28경기에서 5골만을 넣었다. 두 번째 시즌부터는 아예 출전 경기수도 줄어 6경기 출전에 그쳤다.

결국 젠겔레르는 세리에 C의 안코나로 이적했고 30경기에서 18골을 넣으며 팀의 승격을 도왔다. 안코나와의 동행을 1년 만에 끝낸 젠겔레르는 1950년 8월부터 무국적자들, 헝가리 출신 선수들이 뛰던 헝가리아 FbC 로마에 합류했다. 1949년부터 헝가리 축구협회의 종신 금지조치로 젠겔레르는 헝가리로 돌아갈 수 없었고 헝가리아 소속으로 독일 스페인을 거쳐 콜롬비아에서 몇 차례 순회 친선 경기를 가졌다.

젠겔레르는 1951년, 데포르티보 사마리오스 선수 겸 감독 계약을 체결했고 2시즌간 선수 겸 감독으로 뛰다 감독으로 전환했다.

2.1.2. 국가대표

젠겔레르는 1936년 12월 2일, 잉글랜드를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지만 헝가리는 2대6으로 패했다.

하지만 젠겔레르는 다음 A매치 상대인 스위스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 헝가리의 5대1 대승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리고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선 한수 아래인 그리스를 상대로 5골을 넣어 버렸다. 최종 스코어는 11대1.[5]

이 활약으로 헝가리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 눈도장이 찍힌 젠겔레르는 1938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젠겔레르는 5골을 넣어 7골의 레오니다스에 대회 득점 랭킹 공동 2위에 오르며 헝가리의 준우승에 일조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헝가리 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에는 꾸준히 참가했고 1947년 8월 20일의 알바니아전에서 국가대표팀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2. 감독 생활

젠겔레르는 주로 키프로스, 이탈리아, 그리스에서 감독 생활을 했고 페조포리코스 라르나카(Pezoporikos Larnaca)를 이끌고 키프로스 리그 우승도 했다.

1976년 아포엘 FC를 이끌고 키프로스 컵 우승을 차지한 것이 그의 마지막 우승 기록이며 그는 1979년에 축구 감독직에서도 은퇴했다.

2.3. 사망

그는 니코시아에서 1999년에 사망했으며 2013년에 고향 체글레드로 이장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볼 컨트롤과 골 감각, 어시스트 능력을 모두 상위급으로 갖춘 전천후 포워드. 그는 부상으로 장기간 필드를 비운 1939-40 시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시즌이 단축된 1943-44 시즌을 제외하면 항상 25골 이상을 넣어주는 꾸준함도 갖춰서 통산 500골을 넘게 넣은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1930년대 유럽 축구계 최고급 선수로 꼽힐 만한 실력자였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5.1.3. 개인

5.2. 감독



[1] 헝가리 출신 인물은 성+이름의 조합으로 이름을 표기하고 항목명도 그에 따랐다. 다만 인터넷 검색을 하려면 서양식으로 이름+성의 순으로 검색하는 게 더 찾기 쉽다. [2] 이 구단은 2003년에 제명되었고 현재의 코센차 칼초는 그 이름을 물려받은 다른 팀이다. [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4] 1943-44 시즌에 36골로 한번 더 이 기록을 달성했다. [5] 이 경기가 그리스 대표팀의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이 나온 경기이다. [6] 샤로시 죄르지, 실비오 피올라와 공동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