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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8:45:59

백일천하


나폴레옹 전쟁 전개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백일천하

1. 개요2. 내용3. 복귀와 "자유 제정"
3.1. 놀라운 언론플레이와 그 실상3.2. 귀환 후 나폴레옹 성명서
4. 몰락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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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전쟁의 마지막 국면으로,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어: "( 나폴레옹의) 백일(les Cent Jours)"[1]

2. 내용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몰락했다. 퐁텐블로 조약으로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 황제에서 퇴위하고 그를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엘바 공국의 군주로 강등되었다. 처음에는 샤르데냐 국왕이나 코르시카 영주로 봉하는 것이 고려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정도만 가져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와 인구 1만 2000명의 작은 섬인 엘바섬으로 가게 되었다.[2] 프랑스 새 국왕이 된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을 포르투갈령인 아소르스 제도로 추방하여 거기서 고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합국은 그 정도까지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여겨 거부했다. 게다가 엘바섬 영주 안을 지지한 러시아가 자기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냥 보나파르트 제국을 유지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결국 엘바로 가게는 되었다.[3]

한편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보낸 뒤 오스트리아 제국 에서는 빈 회의가 열렸고 회의 중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어 루이 18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의기양양하게 4월 29일 콩피에뉴에 도착했으며 5월 2일 생클루 선언으로 입헌군주제는 거부했으나 제헌의회는 보장하였고 절대왕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확언했다. 이로써 프랑스에 신체제가 확립되었고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고도 자신들의 재산을 보장받은 부르주아들은 만족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왕좌를 세운 나폴레옹에 비교하면 동맹국이 옹립한 루이 18세는 카리스마 차이가 너무 확연했고 각종 실책들을 저질렀다. 그 중에서 루이 18세는 동맹국 중에 오로지 영국에게만 고마움을 표시하여 러시아의 분노를 샀다. 특히 거만한 루이 18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어그로를 끌었다.[4] 거기에 수만명의 퇴역병사들은 루이 18세가 제대로 된 처우를 해주지 않자 자신들이 배신당했다고 분노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 루이 18세를 지지한 명사들도 루이 18세가 정교 협약을 폐기하고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이 주교구를 차지하게 함으로 자신들의 재산권에 다시 위협을 가하자 또 분노했다. 특히 루이 18세가 영국 상품을 프랑스 시장에 쏟아놓는 터에 상인들도 빡쳤다. 무엇보다 프랑스 내에 가득한 외국군의 존재에 프랑스인들의 자존심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말이 엘바 공작이지 사실상 엘바 섬에 유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탈출하기 전까지 영주 일은 제대로 했는데 철광석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 현지 법령과 교육제도 점검 같은 같은 현지 기준에서는 굵직한 일을 했으며 엘바 섬 주민들이 '새 영주님 오시고 나서부터는 제대로 잠도 못잔다'고 허구한 날 불평할 만큼 수시로 부역에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워낙 작은 엘바 섬엔[5] 돈 나올 곳도 없고 엘바 섬 주민들은 나폴레옹의 계속된 부역 동원와 세금 부과로 나폴레옹을 혐오해 세금도 내지 않았다. 이에 나폴레옹이 기병대를 출동시켜 세금을 강제 징수했지만 그 세금조차 생활비와 기병대의 유지비와 그들의 보너스로 다 들어갔다. 당시 엘바섬에 1000명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먹여살리는 데 엘바섬 국고의 절반이 소모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루이 18세는 퐁텐블로 조약에서 지급하기로 결정한 200만 프랑의 연금 지출을 거절해[6] 나폴레옹을 극도의 궁핍에 빠뜨렸고 오히려 암살자를 고용해 암살하려고 했다. 거기에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와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가 엘바 섬으로 당연히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7] 전혀 연락이 없자 분노했고 나폴레옹의 누이 폴린은 다시 황족을 하고 싶어 그를 찾아와 연일 탈출을 종용했다. 어머니 레티치아는 아들의 안정된 생활을 내심 반겼지만 나폴레옹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나중에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오히려 탈출을 방조해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한창 바이올렛 꽃이 만발하고 있었다.[8]

3월 1일에 근처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진군을 시작했다. 루이 18세가 나폴레옹을 막으려고 토벌대를 보냈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병사의 총구로 더 다가가서 병사들이여, 병사들의 황제는 여기 있다. 어서 쏴라!라고 호통을 치자 병사들이 대거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르노블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의 병력이 길가에 제5보병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민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측근들은 좀 걱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우리가 속았는지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전진!"이라는 말과 함께 맨앞으로 나아가 제5보병연대를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5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예, 폐하."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 별명)이다. 자네들 중 짐을 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여기 짐의 가슴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만지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나아갔다.

지휘관이던 레자르는 나폴레옹 앞에 칼을 던지며 항복하였다.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런데도 자네는 짐과 싸우기를 원했는가?"
"전 오직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레자르의 칼을 돌려주고 항복한 제5연대를 규합해 그르노블로 전진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린 뙤약볕 아래 골프주앙에 상륙했소. 굉장해. 황제폐하가 가는 어디든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오.
황제폐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도 그를 보자 감동에 못 이겨 우리와 합류했네. 황제폐하를 따라 전투에 임할 것이오. 황제폐하 만세! 프랑스여 영원하리라.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섬까지 갔던 44세의 근위대원 피에르 랑텔름이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랑텔름은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영화 워털루에 이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가히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영화 워털루와, 프랑스 드라마에서 재현한 장면[9][10]

그로노블의 책임자인 마르샹 장군이 내린 명령은 사살이 아닌 체포, 압송이었으므로, 실제 역사에서는 지휘관이었던 레자르조차도, 위 영상에서 네가 한 것처럼 직접 사격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발사 명령이 실제 있긴 했는데, 그것은 레자르가 아니고 마르샹의 조카였던 랑동(Randon) 대위가 독단적으로 한 것으로서, 황제를 마주한 병사들의 의견이 나뉘고 레자르 역시 당황하여 그 명령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일부 병사들만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 발사를 명령했던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지휘관인 레자르의 명령임을 확인한 후에만 이를 수행하겠다고 하면서 방아쇠 당기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네 원수가 합류한 것은, 제5보병연대의 투항으로부터 며칠 후인 3월 14일이다.

이때 나폴레옹의 행보를 보면 기동력을 중시한 그답게 파리 진격도 '전격적'으로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한 후 하루 최대 86km, 일 평균 50km의 속도로 움직였는데 이는 그 유명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의 도주 속도보다도 빠른 수준으로, 당대 인간병기들이라고 불렸던 고참 근위대와 어떻게든 정권 되찾고 싶어서 이 악물었던 나폴레옹 간 환상의 콜라보라고 할 수 있다.

3. 복귀와 "자유 제정"

어쨌든 나폴레옹의 복귀에 프랑스 국민은 환호했고 프로방스 지역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복귀를 환영했다. 루이 18세가 보낸 군대는 토벌은커녕 되려 나폴레옹한테 돌아서면서 나폴레옹은 손쉽게 3월 20일 파리로 귀환해 다시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은 정치적 입지가 많이 약해져 있었으므로 자유주의 세력의 협조가 필요해 헌법에 자유주의 사상을 대거 반영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자유 제정을 실시했다. 비록 백일천하로 끝난 탓에 이 헌법은 사실상 실행되지 못하고 사장되었지만 이 체제는 나폴레옹 사후 평가가 상승하였다.

3.1. 놀라운 언론플레이와 그 실상

당시 프랑스의 유력지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만한 변신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다룬 도서인 <언론, 그들의 변신>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당시의 프랑스의 유력지 '모니퇴르Le Moniteur Universel'는 지금도 권력 앞에 굴절된 언론의 고전적인 본보기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원래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들을 옹호함으로써 최대 일간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권력자로 떠오르자 이번엔 적극적인 나폴레옹 지지로 돌아섰다. 나폴레옹이 민중의 기대를 배신한 채 황제에 오른 뒤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찬양하였다. 그러다 나폴레옹이 1814년 3월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하고 패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된 후에는 다시 복고된 부르봉 왕조의 주구가 되어 나폴레옹에 대한 무서운 독설을 퍼부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20일간의 여정끝에 파리에 입성했는데, 그 20일간 사태 전개 과정에서 보인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의 편집과 제목 그리고 기사는 두고 두고 가히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조소(嘲笑)의 표본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접근할수록 변화하는 모니퇴르의 1면 헤드라인은 가관이다.

3월 9일 '식인귀(anthropophage)', 소굴에서 탈출
3월 10일 "코르시카 산(産) 오우거(Corsican Ogre)", 주앙(Juan) 만(灣)에 상륙
3월 11일 호랑이(tiger), 카르프에 나타나다
3월 12일 괴물(monster), 그레노블에 야영
3월 13일 폭군(tyrant), 벌써 리옹에 진입
3월 18일 찬탈자(usurper), 수도 100km 지점에 출현
3월 19일 보나파르트(Bonaparte) , 북으로 진격 중!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3월 20일 나폴레옹(Napoleon)[11], 내일 파리 도착 예정
3월 21일 나폴레옹 황제(Emperor Napoleon), 퐁텐블로 궁에 도착하시다
3월 22일 어제 폐하(his majesty)께옵서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대동하시고 튈르리 궁전에 납시었다.

이후 모니퇴르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기관지가 되었다가 후에 관보로 흡수된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도시전설이다. # 해외에서도 유명한 도시전설이라 실제로 당시 신문을 찾아봤는데 없었다고 한다. 황제라는 표현이 꺼려지고 위험한 찬탈자처럼 다뤄진 부분은 많지만 저렇게 극적인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며 리옹을 목전에 둔 이제르(Isère)주의 주도 그르노블(Grenoble)에 도착하면서부터 그는 최소한 대공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3.2. 귀환 후 나폴레옹 성명서

프랑스인이여, 카스틸리오네 공작의 변절로 방어 한번 못하고 리옹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내가 믿었던 지휘관이 이끄는 군대와 그안의 수많은 대대들, 그 속의 용감하고 애국심 넘치는 중대들은 면전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꾸준히 때려 부수고, 파리를 위협하고 있는 적의 뒤로 돌아갈 능력이 있었는데. 상포베르와 몽이라이, 샤토티에리, 보샹, 모르망, 모에로, 크란, 레임, 아르시쉬르오브와 생디지에에서의 승리, 로렌과 샹파뉴, 알자스, 프랑슈콩테와 부르고뉴에서 봉기한 용감한 농민들, 내가 적의 후위를 점하고 병기고와 예비군, 호위대 및 모든 장비와의 연결망을 끊어버린 덕에 적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프랑스군은 이보다 더 강할 수 없고 적의 정예부대는 공급원 없이는 패배만 할 뿐이다. 적이 그들이 잔혹하게 약탈했던 저 넓은 평원은 무덤 삼게 되기 직전, 라구사 공이 우리를 배신하고 수도를 내주었고 군의 사기는 꺾여버렸다. 그와 동시에, 조국과 그들의 군주, 곧 은인을 배반한 예기치 못한 이 두 장군의 행동이 전쟁의 향방을 돌렸다. 파리에서 빠져나오던 적의 상황은 피해막심해서 탄약도 없고 예비병력과도 연락이 끊긴 사태였건만... 이 새롭고 심각한 상황에서 나의 가슴은 산산이 찢어졌으나 나의 영혼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오로지 조국의 이익만을 고려했었다. 하지만 결국 바다 한가운데의 외딴 섬으로 추방당했도다. 나의 인생은 유용했고 여전히 그대들에게 유용하겠지만, 나의 운명을 함께 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바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프랑스에 중요할 것이며, 나는 그저 나의 근위병이 될 용감한 병사 몇 명만을 데려갔었다. 그대들의 선택으로만 왕위에 오를 수 있고, 그대들의 동의 없이 벌어지는 모든 일은 위법이다. 25년간 프랑스는 국가 정부와 이 새로운 상황에서 탄생한 왕조의 손으로 새로운 이득과 새로운 제도, 새로운 영광을 갖게 되었다.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 군주는, 우리의 영토를 짓밟은 바로 그 자들의 힘으로 왕위에 앉게 될 것이다. 그는 봉건제도에 의지하는 것이 허사였음을 알게 될 것이고, 오로지 군중의 적이자 지난 25년간 국민의회에서 비난을 받았던 소수의 사람들의 권리만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대들의 평화로운 조국과 널리 퍼졌전 명성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프랑스인들이여! 추방당한 동안 나는 그대들이 비탄하고 요구하는 것들을 들었도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뽑은 정부만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했었고, 오랜 잠에 빠졌던 나를 비난했으며 편히 쉬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조국을 희생시켰다고 꾸중했다. 나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다. 그대들 가운데 도착하여 그대들의 권리이기도 한 나의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나는 파리를 차지할 때까지 개개인이 행동하고 쓰고 말한 모든 것들을 무시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봉사했는지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인간의 손실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여! 아무리 작은 나라일지라도 잠깐의 승리를 거두었을 뿐인 적의 손으로 왕위에 오른 군주에게 복종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당연히 여기는 곳은 없다. 샤를 7세가 파리로 돌아와 헨리 6세의 짧은 지배를 종식시켰을때, 그는 왕위를 얻기 위해선 영국 출신 섭정이 아닌 자신의 용감한 병사들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지금, 그리고 언제나 모든 의무를 영광스러게 행하는 것은 오로지 그대, 용감한 병사 덕택인 것이다.

서명,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대육군의 소장 역할을 맡은 대원수 서명, 베르트랑 백작

4. 몰락

복귀한 나폴레옹은 10년 넘게 국력을 전쟁에 갈아넣었기 때문에 전쟁을 재개할 상황도, 생각도 없었고 유럽 국가들과 화친을 시도했지만 10년 동안 나폴레옹에게 시달리면서 진저리가 난 영국, 프로이센 등은 "저놈 정권 잡은거 방관했다가 또 무슨 피바람이 불 질 모른다."라는 생각에 다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고 나폴레옹도 이에 맞서 벨기에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작년에 고갈된 인적자원이 한 해 만에 회복될 리 없으므로 병력을 아껴야 했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12만과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9만을 분단시켜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리니에선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추격에 지체하는 바람에 결정타를 먹일 기회를 놓쳐 버렸고 콰트르브라에서 네와 싸운 웰링턴군은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수습하면서 브뤼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결국 나폴레옹은 6월 18일에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된다.

파리로 급히 귀환한 나폴레옹에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고 권력을 유지할 동력을 상실했고, 그의 퇴위를 촉구하는 여러 명사들의 요구를 수용, 6월 22일에 다시 퇴위했다. 그 후 처음엔 미국 망명을 시도하려고 비스케이 만 중부의 항구도시였던 호슈포흐로 왔지만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개전으로 영국 해군이 프랑스 연안 해역을 봉쇄하면서 이 곳에도 영국 군함들이 깔렸다. 현지에서 영국 측과 협상이 결렬되었지만[12] 파리에서 정권을 재획득한 루이 18세가 내린 체포명령이 알려지자 결국 나폴레옹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바다에 있던 영국 해군의 전열함 HMS 벨레로폰(3급함, 74문)에 승선했다. 그가 타고 있던 군함은 영국 본토로 소환되었고 플리머스 항에서 상륙없이 잠시 계류하면서 나폴레옹의 신병 처분 문제를 고민한 영국 정부는 테메레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바꿔태워 콕번 제독[13]의 지휘하에 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보냈다.[14] 결국 나폴레옹은 죽을때까지 세인트헬레나 섬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퇴위할 때 칙령을 내려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퇴위 선언을 하고 도피한 당일 정권을 인수한 5인의 정부 위원회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 위원회는 즉각 루이 18세의 귀국을 요청했고 7월 8일 루이 18세가 파리가 도착하여 복위식을 가졌다.

관례적으로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복위한 날인 7월 8일 혹은 그 전날인 7월 7일까지 백일천하라고 지칭하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6월 22일에 퇴위 선언을 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프랑스 제1제정 2기는 6월 22일까지 거의 딱 석달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 상원은 나폴레옹이 퇴위한 당일 긴급 회의를 열어 프랑스 제정의 종식을 선언했다.

한편 이 때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이 첫 퇴위를 할 때 나폴레옹과 협력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조건으로 장인인 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에게 항복한 상태였으며 나폴레옹이 복귀한 뒤에도 그와 협력하지 않았다. 다만 외젠이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고 보기엔 곤란한데 외젠은 장인이 처음 항복 제의를 할 때도 이를 거절하고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 버텼다가 항복한 것이다. 외젠으로선 양아버지와 장인 모두에게 의리를 지킨 것이다.

5. 여담

파일:나폴레옹_루트.jpg

오늘날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할 때 이용한 길은 '나폴레옹 루트'라고 불리며 관광상품화되었다고 한다. 출처
[1] "백일천하"는 일본식 역어다. [2] 코르시카는 상당히 큰 섬인 데다 나폴레옹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곳으로 유배되었다면 현지를 근거지로 삼아 독립 왕국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3] 나폴레옹은 엘바로 유배를 갔음에도 위엄 쩌는 일화를 하나 탄생시켰는데 유배를 떠나는 당일 작별연설에서 근위대에게 "바이올렛이 만발할 때 다시 돌아오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 9개월 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 루이 18세는 차르를 초대한 연회에서 자신의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어르신 행세를 했는데, 알렉산드르 1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누가 보면 내가 루이 18세를 앉힌게 아니라 루이 18세가 나를 앉힌 줄 알겠다"고 분노를 터트렸다. [5]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 샤르데나 다음으로 세번째로 큰 섬이라지만 한국의 기초자치단체 한 개급 수준이다. [6] 그 결과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가져온 400만 프랑의 비자금은 증발해 버렸다. 사실 이는 나폴레옹이 비용이 많이 드는 기병대에 돈을 많이 쓴 것이 원인이었다. [7] 나폴레옹은 이를 위해 자신의 폴란드인 연인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찾아오자 냉대하여 사실상 내쫓기까지 했다. 그후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친척인 백작과 재혼을 했다. 사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보단 조제핀에게 다시 마음이 기울었지만 1814년 5월 29일 조제핀이 사망하자 소식을 듣고 멘붕한다. [8] 출처 : 히스토리채널 - 나폴레옹, 영웅의 뒷모습 [9] 드라마에서 처음 나오는 권총을 두고 오가는 실랑이는 측근이 위험하니 권총이라도 챙기라는 것을 나폴레옹이 필요없다고 만류하는 장면이다. 흔히 나폴레옹 2002로 잘 알려진 드라마로 나폴레옹 역의 배우는 프랑스의 국민배우인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다. 클라비에는 영화 저스트 비지팅 시리즈 장 르노의 촐싹맞은 하인 역이자 아스테릭스 1, 2편에 아스테릭스로 출연했으며 원래 우스꽝스럽고 코믹한 배우로 알려진 배우였는데 이 드라마에서 나폴레옹 역을 맡아 제왕적 카리스마를 제대로 표현해 호평받았다. 오벨릭스 역의 제라르 드파르디외도 이 드라마에서 푸셰 역으로 같이 나왔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조제핀, 존 말코비치가 탈레랑으로 나온다. [10] 앞의 워털루에서와 달리 드라마에서는 어째서인지 5보병연대를 미셸 네 원수가 지휘하고 있다. 1회용 배우 추가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던 듯한데 실제 당시 프랑스군에서 원수씩이나 되면서 연대기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급이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병력은 연대 하나만 주어졌더라도 원수면 그 급에 맞는 깃발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므로 명백한 고증오류. 게다가 상대방이 비저항인 상태에서 체포를 하라고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걍 쏘라고 하는데, 일개 대령이야 지시받은 대로 하는 게 그럴듯할 수도 있지만 네를 원수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어색해진다. [11] 여기서부터는 나폴레옹을 군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군주는 성(姓) 대신 이름을 부른다. 군주를 성으로 부르면 한 왕조의 모든 왕들의 왕호가 똑같아지니 이름으로 부르는 게 당연하다. 위의 보나파르트와 아래 나폴레옹의 차이는 단순한 게 아니라 군주로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도 영국 국왕을 찰스 3세라고 부르지 윈저라고 부르지 않는다. 윈저라고 부르는 사람은 왕실을 인정하지 않는 공화주의자들이다. [12]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잠시 설립된 프랑스 임시 정부는 나폴레옹의 망명길에 필요한 통행증 발급을 약속했지만 영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현지의 해군 지휘부에 미리 훈령을 내려 나폴레옹의 해상 탈출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다. 나폴레옹이 호슈포흐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영국 해군 측은 통행증 발급이 지연되고 있다고 발뺌하고 봉쇄의 보강을 위해 추가 군함을 급히 파견하는 중이었다. 기록상으로는 협상 도중 영국 측의 일원인 벨레로폰의 함장 메이틀랜드 대령이 나폴레옹의 사절단에게 영국의 정치 체제가 유럽의 다른 전제 군주 국가들에 비해 자유롭고, 나폴레옹은 영국 정부에 관용과 선처를 호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나폴레옹의 결정에 영향을 줬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한 처분은 관대하지 않았고, 처우를 결정할 권한이 영국 해군 장교들에겐 없었지만 나폴레옹이 배에 승선하고 영국에 도착할 때까진 황제로서의 예우를 최대한 받았다. [13] 영국 해군의 제독(소장)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의 제1대 총독으로 재직중 1816년 4월 허드슨 로우 장군과 교대했다. 기록상으로는 그는 나폴레옹에게 나름 예우를 해준 인물로 나폴레옹도 그에 대해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14] 이때 미국에 망명했으면 우호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 등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이야기와 1799년에 획득한 루이지애나를 팔지 않았으면 "뉴 프랑스"란 이름으로 다시 발악을 해보지 않았을까? 란 이야기도 있다. 다만 2년전에 미영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을 듯.